성공회 질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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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질문과 종교적 신앙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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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과거에 성공회 서울교구옆을 자주 지나다니던 사람입니다 (영국문화원때문에) 몇번 서울교구 주일 예배(미사??)에 슬그머니 혼자 참석해서 앉아있다가 새신자로 등록하려다가 말기를 몇번했습니다. 그이유는 과거 폼으로 다녔던 개신교회에서 겪 은 (물론 믿음이 없어서 이겠지만)일들을 통해, 동료 기독교인과 목사님들에게서 많은 실망과 분노를 느끼면서 교회를 그만두었기에 지금도 망설임이 많이 남아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종교를 좀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은 저의 마음앞에는 다음과 같은 원초적인 무식한 회의가 어느새 깊이 드리워져있습니다.

제가 겨우 몇권의 책들을 읽으면서 (ex, 야스퍼스,에리히 프롬, 램프레히트등)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예수의 신성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것은 사도바울과 예수제자들과 갈등 문제 그리고 신약성경이 원본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로마교황청의 많은 편집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후 더욱더 그들의 주장에 대해 동조하는 의식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스퍼스와 에리히프롬은 구약에 기초한 기독교인 이라고 들었으며, 특히 야스퍼스는 그의 저술 “철학적 신앙”에서 성서종교를 비판하면서 성서의 어느 한귀절도 주석이 아닌것이 없으며 인간의 한계를 고려했을시 순수한 계시 자체는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수천년에 걸친 인간의 한계 체험의 보고이며, 이 경험들을 통해서 성서 속의 인물들은 신을 확신하게 되고 이 확신에 의하여 자기를 확신하에 된 것이다 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믿음은 주어지는 것이지 (gift) 노력으로 얻는것이 아니라는 말과 정면 대치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를 인간으로 평가 절하 한다 해도,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신에게 도달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실존을 통해서만 영원에 도달할 수 있는것이며, 성육신한 신으로서의 그리스도 신앙은 성서종교의 본질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야스퍼스의 주장은 저에게는 충격이면서도 다시 종교를 찾게하는 기회로서 인식되고 있습니다.

기회라고 말씀드린것은 저는 예수의 신성이 이미 서양의 종교학자들에게도 공격을 많이 받았으며 신약의 신성적 진위여부도 사도바울의 자체적 해석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렇다면 기독교를 믿을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신적인 혼란에 있었는데, 이에 대해 기독교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 할 수 있는 그 길이 위에서 말씀드린 야스퍼스식의 논법이라면 갈등이 해소될 수도 있겠으며 신앙의 개인적이 체험이 가능하리라는 희망도 가지게 됩니다.

저의 이런 거친 얕은 이해에 대해 신부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싶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기독교에 대해 다시 접근이 어려울것이라는 회의감이 들고 있습니다.

+ 주님의 평화

깊은 평화의 인사로 때늦은 답변에 대한 사과를 대신합니다.

님 께서 주신 훌륭한 질문은, 믿기지 않을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성직자인 제 안에서도 계속되는 의문들입니다. 아직 진행중인 이런 의문이 부끄럽지 않은 까닭은, 일언지하에 이런 의문들을 깨끗하게 씻어낼 수 있다면 한 순간의 행복일는지 몰라도, 무한하신 하느님을 대하는 태도로서 정직할 것일까 하는 좀더 깊은 의문이 저를 붙잡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생각에 님께서는 매우 중요한 신앙의 출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문이 없는 신앙은 맹목적이기 쉽거니와, 삶의 길 속에서 만나는 또 다른 의문의 복병 앞에서 무릎 꿇기 십상이지요.

님 께서 들어주신 철학자들은 공교롭게도 근대 철학자들치고는 상당히 종교편향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분들입니다. 야스퍼스와 같은 실존철학의 대가와 더불어, 에리히 프롬은 서구의 신맑스주의로 불리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자이기도 한데, 한결같이 철학과 종교의 대화에 대해서 깊이 고민했던 분들이었습니다. 근대철학이 내내 기존 종교-신학이 짓눌러온 숨통에서 조금씩 기세를 얻기 시작하면서 그 “지배의 신학”에 대해서 비판한 것은 당연한 결과요, 또한 종교와 신학 자체의 반성에 중요한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그 결과, 예를 들어주신 성서의 형성사와 관련된 역사적인 사실 혹은 문학 비평적인 연구 등은 이미 신학계에서 일반화되어 신학생들뿐만 아니라 저 같은 성직자들까지도 괴롭히고 있고, 하느님과 인간의 구원 사이에 놓여 있는 예수님의 성육신 교리는 그 “성육신 교리”를 둘러싼 신화 논쟁이 이미 1960년대 그리스도교계를 발칵 뒤집어 큰 생채기를 남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누가 괴롭힘을 당하며, 누가 상처를 입었다는 말일까요? 아무래도 하느님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거나, 그 모종의 답으로 짐짓 사람을 위협하거나 저주했던 지배적인 사람들, 혹은 그들의 생각이 아니었을까요? 성직자로서 나 자신이 이런 모종의 위협적 인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이런 회의와 의심의 시대에 어떻게 하느님에 대해서 말할까 하는 질문을 다시 해봅니다.

야스퍼스가 옳을까? 에리히 프롬이? 아니면 어거스틴 성인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교부들이 역시 맞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송아지를 낳는 암소을 옆에 두고 순산케 해달라고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께 연신 빌어마지 않는 촌부가 옳은 것일까?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열어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내가 성서를 읽고 내 삶을 반추하며, 예배에 참석하여 그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느끼면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지치지 않는 눈으로 살펴볼 것을 요구합니다.

그 대답들은 지금까지의 논리가 철학이 되었든, 기존 교회의 가르침이었든, 신학이 되었든 간에 그것들에게 새로운 회의를 일으키게 하고, 깨지게 하고,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들로 남아서 나를 괴롭혀서 내가 항복 선언을 하려고 하는 순간, 나도 몰래 내 앞에 성큼 와 있거나, 내 뒷전에서 이미 나를 새로운 모험으로 밀어대고 있기가 일쑤입니다. 저는 이것이 신앙을 통해 주고 받은 질문과 대답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현대에 이르러 철학은 종교철학 혹은 신학과 큰 경계를 가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그리스도교 신앙이 일반적인 철학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비 (혹은 화두라고 해도 좋겠지요)를 가지고서 씨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건 그 신조를 날조된 것이라고 말하든, 처녀의 몸에서 낳았다는 이야기가 신화 속에서나 공통적인 것으로 엿보이는 현상이라고 이해하든 아니면 그리스도교 유일의 사건이라고 믿든, 혹은 그 부활의 ‘사건’을 두고 어떤 의미로 해석하든, 그 역사적 사실성을 증명하려고 들든 간에, 문제는 한가지입니다.

예 수 그리스도가 도대체 내게 뭐라고 하는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향해 ‘너는 도대체 누구냐?”라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혹은 내 스스로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떤 길을 제시하는지 눈 여겨 보고, 그 길을 따라가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당당히 대화해보겠다고 감히 도전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도전을 시작하는 길은 여러 가지이겠습니다만, 저는 단연코 예배 공동체의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처지에서 서로 다른 질문을 갖고 모여든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모여,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내는 그 순간의 체험들을 지속시키는 것이 종교적인 신앙에 대한 질문과 답변의 중요한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러지 않을 테니, 님께서도 질문의 끈을 놓치지 않고 스스로를 열어 놓으며 허물 벗듯 전진하기 바랍니다.

주님의 넉넉한 길에서 만나 걷길 기대하며,

주낙현 신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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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9월 29일 at 3:12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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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 좀더 깊은 기도와 성찰을 위한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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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좀더 깊은 기도와 성찰을 위한 제안

어찌 보면 매우 무책임한 답변과 요구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는 제 자신과 많은 그리스도인들께 손쉬운 판단을 잠시 유보하고 하느님의 뜻에 대한 좀더 깊은 성찰과 기도를 요청합니다. 그 성찰은 내용을 저는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첫째로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우리의 시각을 좀더 멀리, 그리고 깊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신념으로 하느님의 뜻을 모두 헤아릴 수 있겠느냐는 자문과 그 안에서 얻게 될 “하느님 앞에 선 자의 겸손”입니다.

둘째, 지금까지 우리는, 자신과는 다른 사람들, 비종교인, 타종교인,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했는가?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낯선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이 질문이 우리 각자 앞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우리”라는 말에는 그 낯선 사람을 포용하는 뜻이 있는 것인데, 언제부터인지 “우리끼리”라는 의미가 더 강세를 보이는 듯합니다.

셋째,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을 찾아 그 길을 걸으며, 그 길 속에서 은총을 누리는 사람이지, 하느님의 뜻을 알았노라고 누구에게 짐짓 강요하는 사람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의 성찰과 기도를 실제로 진전시키는데 중요한 밑바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성찰들은 사실 제 개인적인 신앙적인 고민이거니와, 또한 성공회 신앙의 전통에서 얻은 큰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어떤 분의 질문에 답하면서 성공회는 “비아 메디아” Via Media, 즉 “중간의 길”이라고 표현되기도 했지만, 달리 표현하면, “길 걷는 가운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런 와중에 최근 책을 읽다가 전혀 다른 맥락에서 장송곡의 표제어인 “메디아 비타” Media Vita 라는 말을 만났습니다. 우리 말로 하자면 “삶의 한 가운데서”라고 옮길 수 있을 터인데, 그 장송곡의 맥락을 생략하고 이 말 자체가 주는 울림을 “비아 메디아”와 함께 생각해보려고 했고, 지금도 씨름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제 생각과 너무 닮아 있는 글을 만나서 기뻤습니다. 역시 이 동성애 문제를 둘러싼 미국 성공회 안의 고민을 담고 있는 글인데, 그 글을 읽고 단숨에 번역해서 한국의 여러 신부님들과 함께 나누고자 했습니다. 미국성공회 사제(여성사제)이며, 대학과 신학교의 교수로 일하면서, 미국 교회 최고의 설교가 12명 안에 꼽히는 매우 통찰력 있고 영성 깊은 분의 글입니다. 사실 그 분의 글을 읽으면서 위에서 시도한 제 답변이 너무 너절한 것이 아니냐는 반성을 했습니다만, 이 글도 역시 이제 제 활시위를 떠난 것으로 생각하고, 그 판단을 읽는 분들께 맡겨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냥 남겨 둡니다.

그 분의 깊은 성찰과 제 얄팍한 성찰을 비교하지는 말아주십시오. ^^

아, 그리고 최근에 번역되어 있는 책가운데 일부가 인터넷에 있어서 덧붙여 드립니다. 미국 천주교의 다니엘 헬미니악 신부의 책이 한글로 번역되었군요. 새로운 성서 해석의 일부분인데, 다른 성서 해석들과 비교할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길 속에서 만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주낙현 신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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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 22일 at 1:32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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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정의를 향한 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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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신부님을 찾아뵙네요.. 제가 어느 개신교 권사님과 얘기를 나누었는데요.그분 말씀으로는 술과 담배는 그리스도교인으로써 할짓거리가 못된다고그러시더군요..

제가 알기로 예수님께서도 포도주를 드셨으며,술,담배는 그리스도교인으로써 즐기되 빠지지만않는다면 괜찮다고 생각하거든요..만약에 위와같은 논리라면,콜라,사이다도 즐겨서는 안된다는(콜라,사이다는 술보다 해로운성분이 더 많다고합니다)논리가성립이되는데요,이에대한 신부님의 견해를 듣고싶습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제가 주한미군범죄근절(주한미군철수운동본부)회원으로 활동중인데,정말 주한미군이 우리나라사람들에게 악한일을 저지르고도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는것이 너무 ***없어보여서 적극적으로 활동을하고있습니다..이에대해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이렇게답변하시더군요. 아버지께서 대학생일때(이승만~전두환)는 항상 물수건을 손주머니에 넣고다니면서 입과코를가리고 다니셨고,사회의 부정부패와독재에 학생들이 피로써 맞써싸우고 있었던시기였습니다. 당시 광주에서 대학을 휴학하고계셨던아버지께서는 군인들에게 대모진압용곤봉에 엊어터지면서도 자유민주주의만세!독재정권을 유지하려는 정권은물러가라는 학생들의 처절한외침에 충격을 받으시고 아버지께서도 학생운동과 데모에 참가하여 독재정권에 맞서싸우셨고,주한미군이 악한일을하면 그들에게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것을 알려주고,옳은것을 옳다고 말할줄알며,잘못된 역사의 흐름을보고 바로잡지않는것은 진정으로 배운자의도리,신앙인의 도리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제가 진정 옳은길을 걷고있는것일까요? 일제의탄압에 독립군의 자금을전달하고,쫒기는 독립투사에게 숨을곳과음식을 제공하며 독립운동에 참가하셨던 할아버지와, 독재정권에 맞서서 당당히 싸우셨던 우리아버지..그러나 독립유공자라는 제대로된 대접조차 받지못하는 이사회에서 `이 사회는 뭔가 잘못되었다!

그것을 고쳐라!,라고 당당히 외치는고, 사회에서 개판치고있는 이단사이비에 `너희는 그런점이 잘못되었다!진실은 이것이다!,라고 말을해야 하는것이 제가가야할 길인지요,그런길을 가는데,가려고 마음을 단단히먹고,다잡아보지만,왜이리 두려운지..이런길을간다고 누가알아주는것인지..너무나 두렵습니다..

+ 주님의 평화

양승우 형제님 안녕하세요? 너무 늦은 답변에 미안하다말로 무색할 지경입니다.
요즘 낯선 환경에서 새롭게 공부를 시작하는 처지에서 겪는 게으름이니 용서하십시오.

양승우 형제님의 고민은 잘 읽었습니다. 사실 변명아닌 변명을 하자면, 나름대로 여러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거듭하고, 굳은 의지를 갖고 계셔서 특별히 어떤 조언을 한는게 필요한가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조언을 바라신다면.. 글쎄요..

우선 “술”에 관한 논란은 사실상 그리스도인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지요. 아예 그런 논란 자체가 좀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거야 아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제 의견을 말씀드렸으니, 잘 헤아리시고 개인의 처지에 맞게 판단을 내리시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래에도 언급한 것처럼 그건 일반화시킬 수 없는 “조심스러운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사회 정의를 위한 행동에 대해 간단히 답변드립니다. 사회 정의 활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연스러운 발로이겠지요. 주한미군철수나, 사회 정의의 문제, 그리고 그 밖의 민주화를 위한 싸움들은 우리나라 사회에선 매우 필요한 일이요, 그리스도교 신앙에도 부합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깊은 자기 성찰과 공부, 그리고 자신의 조건에 맞는 적절한 투신을 요구합니다. 자칫 매우 가벼운 논리나 얕은 성찰로 어떤 분위기에만 휩쓸리게 되면, 그것은 자기 자신 뿐만이 아니라 이런 올바른 운동에도 해를 미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굳이 선후를 따지자는 것은 아니지만 “깊이 성찰하고 고민”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나 신앙적 자의식이 이제 막 형성되거나, 사회의식이 형성되는 초기에는 더욱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지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이를 “기도를 통한 성찰”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기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기 조건에 맞는 실천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어린이에게 어른의 옷을 입힐 수 없듯이, 그에 맞는 적절한 옷을 찾는 것이지요. 제가 보기에 양승우 형제님은 아직 성인이 아니고, 성년을 향해서 공부하는 중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떤 행동과 실천이 적절한 지를 나름대로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점들을 아버님이나 선생님과도 이야기를 나누시거나, 출석하는 교회의 선생님과 목사님을 통해서도 이야기를 나눠 조언을 얻어야지요.

모든 것에 궁금해 하고, 특별한 세상을 통한 하느님의 정의 실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양승우 형제님은 분명히 더욱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정진하시고, 자기 생활도 많이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

Written by skhfaq

2002년 10월 25일 at 11:40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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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옮겨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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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4대째 내려오는 개신교 장로교파 집안에서 자나란 기독 청년입니다.
저희 친척 어른들은 장로교회 목사들 입니다.

10여년 정도는 침례교회를 다녔고, 그 나머지 시간들은 장로교회를 다녔습니다.
그 사이에서 교회와 여러 성직자들 때문에 얼마만큼의 상처와 괴리를 겪었습니다.

침례교의 열광적인 기복신앙과 능력신봉주의, 주의 이름으로 사역을 감당하겠다며 절대자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요구하는 성직자들의 욕심…

또 반대로 장로교의 보수적인 완고함과, 말씀주의라 불리우는(하지만 절대 말씀주의라고 할 수 없는)매마르고 건조한 형식적인 예배… 이 사이에서 기독교는 시계추처럼 진자운동을 하고 있다는 어느 목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아픔을 느낍니다.

주낙현 부제님의 아래 글들을 모두 읽으면서 ‘한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 사람들의 각기 다른 모양’과 그것의 다원적인 모습을 인정하며 나약한 지체들을 감싸안는 성공회의 방침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저는 주님의 슬픔을 덜어드리기 원합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한때는 다른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고 생각했으나, 제 생각을 무너뜨리는 주님 앞에서
이제는 제가 가야하는 길이 낮은 종의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것이라고 혼자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대천덕 신부님의 글을 읽으면서
교파와 교리에 먹매이지말고,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것이 옳다고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두렵습니다. 삽십년 가까이 친숙했던 환경을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말입니다.

제가 어떻게 하는것이 좋을까요?

+ 주님의 평화

하연님 안녕하세요? 깊은 고민을 나눠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하연님께서 고민하는 내용의 일부를 저도 똑같이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저는 교단을 옮겼고,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하느님께서 제게 열어주신 새로운 문이었다고 생각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느님의 도구이자, 유한한 인간 집단인지라 그 한계는 분명합니다. 그러니 현실 교회와 하느님 나라의 이상을 혼동하지는 말 일입니다. 그러면 조금 마음이 편해지실는지 모릅니다. 지상의 교회를 이상으로 삼지는 말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교회의 의무와 본 모습을 추구하지 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만. 이런 모순적인 교회의 모습을 두고 교부들은 “순결한 창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까?

다른 교단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아주 좋은 식별 과정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망이 길을 찾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리고 제 생각으로는 사람마다 그에 맞는 신앙적 형태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성공회 교인은 성공회 안에서 전혀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가 하면, 그 반대인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성공회 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찾았습니다만, 다른 교회에서도 여전히 그런 즐거움과 기쁨을 선사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어떤 분들이 들으면 놀라실는지 모르지만, 저는 성공회라는 교단 안에서 그런 고민이 있으면 언제든지 기쁘게 다른 교회로 보내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공회만이 참된 교회는 아니기 때문이요. 그저 하느님의 은총을 담는 여러 그릇 가운데 하나이요, 그만의 특징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맞지 않으면 바꿀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 방황하는 것도 이럴 때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교단을 알아보시구요. 교회를 옮기시는 것도 괜찮습니다. 성공회가 아니라 다른 감리교도 천주교로 가셔도 좋구요. 바라기는 오랫동안 성장해 오신 장로교에서 새로운 은총의 길을 찾으시면 더할 나위가 없습니다. 우선은 다른 장로교회를 찾아보시는 것이 순서일 듯 싶습니다. 성공회는 한국개신교의 전반적인 형태와는 좀 달라서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지실 수가 있습니다. 그런 점을 감안하셔서 성공회 예배에도 참석하시고, 신부님과도 만나 이야기를 나누셨으면 합니다.

아무쪼록 주님 안에서 기쁨의 길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된 형제
주낙현 신부 합장 ^^

Written by skhfaq

2002년 8월 28일 at 11:2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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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에서 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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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에 감사드립니다.저는 제가 궁금한사항이있으면,성격이급해서 금당답을 듣지않으면 못배깁니다^^그건그렇구 제친구들이 요즘 하나둘씩이단사이비에 현혹되고있습니다.몰몬교,안상홍증인희,대순진리회,여호와 증인,증산도…이런 친구들을 멸망의 늪에서 구해주고싶고,또 그래야 할것같습니다.이들을 어떻게 빼내서 주님의 품안으로 들어올수있게해야하나요…

+ 주님의 평화

안녕하세요? 양승우 형제님.

제가 갑작스레 미국에 오는 바람에 그 일 준비로 답변이 늦어졌습니다.
이런 사정을 널리 헤아려 주십시오.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주변에 이른바 “신흥 종교” 신자들이나 거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모양입니다. 참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만, 또 다른 면에서보면 이것이 우리 사회의 영적 갈망의 한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종교를 가질 때, 어떤 “확신”과 “체험”에 큰 무게를 둡니다.
그리고 그것이 좀더 강력한 것이어야지, 미지근하거나 고민스러운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을 못배겨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성정(性情)으로 인해 우리나라에 그렇게 많은 신흥종교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 관심을 갖거나 이미 빠져 있는 분들을 위해서 걱정하는 것은 대단히 훌륭한 그리스도인의 덕행입니다. 자칫 이런 신흥종교가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는 커녕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초래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런 분들에게 접근하거나, 이야기할 때는 좀더 너그러운 마음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떤 교리적인 기반과 논리적인 근거를 통해서 이들을 설득하려고 하면 서로 싸움에 휘말리게 되거나, 오히려 신흥종교의 덫에 빠지기 쉽습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린대로 기나긴 그리스도교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부정적인 이미지를 끄집어 내어 신흥종교가 그리스도교를 공격하기가 일쑤이기 때문이지요.

제 생각으로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그들의 진정한 영적인 갈망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헤아림 속에서 격려도 해주고, 이야기도 들어주고 정말 좋은 친구로 곁에 항상 있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종교적인 교리 체계(대체로 주입된)에 따른 말이 아니라, 서로의 고백을 듣게 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인도를 느끼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런 마음 자세를 위해서 양승우 형제님 자신을 위한 기도를 놓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 친구들을 위한 사랑의 기도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

Written by skhfaq

2002년 8월 28일 at 11:19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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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서 신앙과 선행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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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평화

세번째 질문과 답변입니다.

질문 3.

잘 아시겠지만 가톨릭의 구원관은 신앙 + 선행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 개신교는 오로지 신앙만으로 족하다고 하지요.. 이 부분은 종교개혁시부터 굉장히 중요한 논점중의 하나로 부각되었었고요. 아직도 좀 그렇지만 그렇다면 개신교 중 가장 가톨릭 색채가 강한 성공회는 이 부분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요.? 구원이 신앙만으로 족하다고 보시는지 아님, 선행이 덧 붙여져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답변 3.

여기서 가톨릭이라면 로마 가톨릭 즉 천주교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되묻는 것은 “가톨릭”에 대한 오해와 선입견 때문입니다. “가톨릭”이란 한 그리스도교 전통 교단의 명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그리고 구원자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교의 대명사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톨릭 신앙”이란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 쯤으로 이해해야 할텐데, 그런 용법이 늘 문제가 되는 것 같군요.

본론에 들어서서,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신앙과 선행의 문제는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 논란을 여기서 재현할 필요는 없지만, 이런 논란에 대한 한가지 불만은 신앙의 원리를 너무 쉽게 단정하려는 듯한 태도입니다. 그러니까 천주교에서 믿음과 선행을 병렬로 놓은 것도 문제지만, 이를 굳이 선후의 문제 혹은 종속의 문제, 아니면 배제 용법을 써서 “믿음만”이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앙”은 이러한 인간적인 손쉬운 용법 너머에 있습니다. 신앙과 선행의 문제는 하나의 문제이지 선후의 문제 혹은 병렬의 문제가 아니지요.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신앙인에게 선행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할 생활의 덕목이라면, 그것은 이후에 무엇이 덧붙여져야 구원이 가능하다는 조건법과 상당히 다르지요. 그리고 신앙은 그것을 가진 사람의 총체를 드러낼텐데 “신앙”이라는 하나의 이념적인 아집만 있고 “이에 따른 삶”이 보이지 않는 것 또한 가톨릭 신앙에서 벗어납니다. 이는 모두 신앙의 경지에 들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신앙+선행”이라는 등식이나 “신앙만”이라는 조건도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참 인간이요 참 하느님으로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보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분에게 신앙과 선행이라는 것은 구별되어 있지 않습니다.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한 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드림 ^^

Written by skhfaq

2001년 8월 15일 at 2:38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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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정답, 그리고 영국의 천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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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전 카톨릭 신자인 이승봉 빈첸시오 입니다..
영국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성공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반감도 생겼지만, 다 무의미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 어릴적부터 천주교에 다녀서 그것만이 유일하다고 생각했죠..
부모님을 따라서 그냥 삶의 일부분이 되었죠..
그런데, 만일 부모님이 개신교 신자였다면, 전 개신교 신자였을테고
성공회 신자였으면, 성공회 신자고, 불교 신자였으면, 불교 신자였겠죠..
물론 힌두교나 다른 종교가 국교인 나라에 태어났다면, 그런한 종교를 믿겠죠..
전 선택된건인가요, 아님 제가 선택한건 가요?
제가 만일 영국에 가면 카톨릭을 나갈수 있는지요?
아님 성공회를 주말마다 가야 하는지요?
같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사람을 만드셨는데,
왜 우리는 하느님의 생각과 뜻을 종교란 테두리에서 나누고 있는가?
란 생각에 서글퍼 집니다..
자기랑 다른 신도수가 적은 종교는 모두들 이단 취급하는데,
그들도 첫신앙을 자기가 선택했는지…
오늘밤은 그런생각에 씁쓸합니다..
신부님 두서 없는 글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주님의 평화,

빈센치오 형제님 반갑습니다.

이런 가상 공간에서 한 분이신 주님 안의 형제들과 생각을 나눌 수 있다는게 제게는 큰 기쁨입니다. 형제님은 두서 없는 글이라고 했지만, 뼈가 있고 우리 아픈 곳을 건드리는 매우 핵심적인 지혜를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직도 숫자놀음에 빠져서 사람들을 평가하거나, 자신의 신념 체계를 자기고 다른 이들의 신앙과 생활을 섣불리 판단하는 신앙적인 맹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신앙이 덜 영근 탓이려니 생각합니다.

영국에 가실 일이 있다니 좋겠습니다. 저는 영국에 가본 적이 없는 터라, 이래 저러 주섬주섬 이야기만 들었을 뿐이지요. 영국에는 천주교가 많습니다. 신자 수도 아무 많지요. 공식적인 통계로는 인구의 10%라고 듣고 있습니다만, 실제 교인출석률로 보면 영국 성공회와 영국 천주교의 신자수는 거의 비슷할 것입니다. 영국에서 성공회와 천주교는 서로 많은 교류가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 돌아가신 바실 흄 추기경은, 역시 최근에 돌아가신 로버트 런시 캔터베리 대주교와 더불어 영국 전체에서도 존경받는 성직자이셨지요.

영국에서 가시거든 천주교회뿐만 아니라 성공회에도 들러서, 하나인 교회의 두가지 맛을 모두 느끼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된 형제 주낙현 신부 드림 ^^

Written by skhfaq

2001년 8월 14일 at 2:32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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