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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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개신교, 근본주의, 교회 분열 등에 대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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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안녕하세요? 당분간 자리를 비우셨군요. 전 그것도 모르고 …
그리고 써놓고 보니 제 글이 창피하게 느껴져서 지웠었습니다.
하지만 제 이메일로 주신 신부님의 답장에 용기를 내어 다시 올립니다.
깔끔하게 수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다시 올립니다.
이 사이트가 앞으로 계속해서 뜻깊은 공간이 되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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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은 이름만 반반한 ‘중도’이기보다는 ‘혼란과 딜레마’의 길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저 자신이 혼란과 딜레마의 길을 걸어왔고, 어찌보면 대부분 사람의 삶 자체가 정돈되지 않고 양극단에 처하고 부조리하고 일관성 없는 것이라 성공회 교단 전체에 대하여 그러한 이상 내지는 이념의 완전한 실천을 강요하는 것은, 그럴만한 자격도 없고 또 부적절한 일이라고 봅니다.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성공회든 그 제도(‘제도화된 종교’라는 말도 있습니다만)를 운영하고 실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기에, 어찌보면 어린아이가 걸음마 하듯이 뒤뚱대고 지척이며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성장의 과정 속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엉성하고 다소 편협한 문제 제기를, 신부님께서 직접 정돈하셔서 열려 있는 답변으로 내어놓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명색은 가톨릭 신자이지만, 그 본성(?)상 프로테스탄트적인 기질이 몸에 밴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외견상 제도적으로 완전히 구비된 안정성, 다양한 수도회 카리스마, 독신이라는 형태로 표현되는 완전한 봉헌 그리고 성화(聖化) 등 가톨릭의 화려한 외모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복음적 가치를 급진적으로 실현(제게 있어서는 무교회주의, 이는 정치적 무정부주의와 일맥 상통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하는 내용적 면에서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갈망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이 양극단에 짓눌려 있을 때 제게 새로운 비전을 열어 주는 제3의 길은 어쩌면 숨통을 터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중도’보다는 ‘합(合, synthesis)’을 바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하늘나라에 가면 찾을 수 있겠죠.^^ 하지만 저는 ‘하느님 나라’를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선포하시고 가르치셨던 예수님의 그 갈망이 예수님의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제가 찾는 것은 어떤 흠 잡을 데 없는 교회인 것 같지만, 사실은 진리(veritas)와 정의가 온전히 구현된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셨기에 그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가장 먼저 기도하셨고 그래서 겨자씨 같은 미미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나라의 건설하는 위대한 일을 몸소 시작하셨다고 봅니다. (그것은 물론 여러 제도 교회에서 얘기하듯이 기독교의 전파나 원주민의 개종이 아니겠지요. )

이러한 갈망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다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기도야말로 이런 인류 전체의 갈망을 대신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제적 기도의 전형이 아니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제가 근본주의를 비판했지만, 사실 그러한 신앙 체계 내지는 양식이 제게 크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대로 부정할 수 없는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중세 시대 성 프란치스코나 사막 교부시대 성 안토니오 같은 사람들은 성서를 글자 그대로 믿었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리고 자기에게 들려오는 그 말씀을 어떤 신학적인 반성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온 몸으로 체현한 사람들 아닙니까? 저 자신 슐라이어마허가 말하는 “무한한 존재에 대한 감수성과 취향”을 근본주의 교단에서 얻었습니다. “종교 고유의 특징은 신비스런 체험, 영원의 세계에 감동됨이다. 종교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그러니까 천상적 섬광인 바, 이것은 경건한 영혼이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에 감동될 때 발생하는데, ‘종교의 거장들’은 이러한 종교 체험을 언어 등을 통해 직접 표현하며,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전해준다.”(한스 큉, 그리스도교, 분도출판사, 856쪽)

저는 그때 정말 순수하게 믿었고, 그러한 체험은 그러한 분열되고 깨어지지 않은 믿음에 대한 그분의 선물이었다고 믿습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체험에 그대로 머물 때, 다시 말해 개인적 체험을 절대화하고 그 달콤함에 중독될 때 근본주의의 폐해는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보다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러한 체험(관상)을 전할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반성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전반적으로 왜곡된 사회구조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전망을 얻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좀 뒤죽박죽이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식으로 ‘대화’해 본 적이 없어서… 신부님이 주신 글에 대한 답글이라기보다는 제 넋두리가 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이걸 말하려면 저게 생각나고 저걸 말하려면 이게 생각나서 어디서부터 가닥을 잡아야 할지… 정말 혼돈과 딜레마에 빠져 있는 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드리는 것 같아 민망하네요. 신부님이라면 어떤 얘기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앞으로 이 게시판을 자주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생각을 정리해서 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할 얘기들이 많을 것 같거든요. 신부님의 답장을 기다려 봅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글을 살려서 올려주셨으니, 개인 메일로 보낸 편지였지만, 저도 그냥 살려서 여기에 덧붙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개인 메일로 보내는 것과 이런 공개된 게시판과 올리는 것이 사뭇 다른 인상이 드는 군요. 뭐 어쩝니까? 이미 뱉어낸 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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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평화

지난 번에 게시판을 통해서 주신 글 잘 받아 읽었습니다. 그 이후 곧바로 어떤 회의에 2주일 가까이 참석해야 했기에 게시판에 답글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 참에 다시 찾아와 보니 글을 지우셨더군요.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해서 답장을 해야지 하는게 이렇게 늦어졌습니다. 짧게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님께서 하신 말씀의 대부분을 동감하고 있습니다. 특히 근본주의의 문제는 매우 상당한 도전으로 다가오는데, 제 자신이 근본주의를 매우 싫어하는데다가, 여러가지 경험을 통해서 그 폐해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는 종교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형태의 신념 체계와도 맞물려 돌아가기가 일쑤입니다.

성공회에 관련해서만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아무래도 성공회가 최고의 이상적인 교단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성공회는 그래서 스스로를 언젠가 사라져야 할 교단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일치가 이뤄지는 날, 이 분열을 극복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소망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그 벽을 허무는 순간을 위해서, 그 사라짐을 위해서 전력질주하는 것이 성공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품어왔으면서도 성공회가 내내 독자적인 교단을 고수해왔던 것은 다름아니라 성공회가 근본주의적 태도들과 대결해왔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 가톨릭이나, 퓨리탄 중심의 개신교 사고 방식은 성공회가 보기에 하나의 사고 방식으로 모든 것을 획일화하려는 태도로 보였고, 그것은 근본적 교리, 근본적 신앙이라는 “근본주의”의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이기에 이를 거부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본주의에는 혼란이 없습니다. 그러나 혼란없는 아주 깔끔한 이론은 실제로 삶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엉성하게 뒤얽혀 있는 것이 삶이고, 내 삶 자체에서도 모순은 이리저리 나를 괴롭히는 실정입니다. 사람들은 바로 그 모순과 당당히 대결하기 보다는, 누군가가 지어준 산뜻한 논리, 혹은 교리, 혹은 어떤 윽박지르는 듯한 신앙 체험을 약처방으로 삼아 그걸 의지하고 살아가기가 쉬운 법, 그래서 (부정적으로 보자면) 종교는 끊임없이 그런 약처방으로 지금까지 버텨오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이것이 종교의 전부는 아니지요.

성공회에 대한 한 생각… 이런 점에서 성공회는 다른 방법을 취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삶의 혼란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 하지만 우리는 다만 하느님을 향해서 길을 걷는 자일 뿐, 진리를 거머쥐고 있다고 자랑하지 않을 것… 다만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가 누구이든지 그들과 함께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며 지치지 않도록 길을 걸을 것…

사람은 지치기 마련인지라, 쉬고도 싶고, 자리에 틀어 앉아 안주하며 집을 짖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성공회에는 개신교의 어떤 모양이 드러나기도 하고, 로마 가톨릭의 어떤 양상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그 여정 가운데 하나이니, 앞서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리 쉴 터는 항상 필요하니까요. 다만 자리 틀고 앉아서 길 걷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비 걸며 털석 주저 앉으라며 가던 길을 포기하라고 권유하진 말았으면 하는 것이지요 ^^

아침에 일어난 상념으로, 편안하게 적어봤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2004년 7월 3일 at 2:57 pm

니케아 신경 – 마지막으로, 현대 교회에 대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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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시도해본 어설픈 답변이었습니다. 신경을 살필 때 그 어구에 담긴 그 성서적인 근거와 더불어 역사적인 필요의 상황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그 한정된 상황을 뛰어넘어 그 위대한 신앙 선언이 담고 있는 현대적인 의미들을 늘 성찰해야 한다고 봅니다. 바로 그때 그것은 과거의 신경이 아니라, 현대에도 역시 메시지를 전해주는 살아있는 전통으로서의 신앙 선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하나이요,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선언이 현대의 분열된 사회, 반목하는 교회 속에서 ‘일치’를 되새겨주고, 현실과 체제에 늘 안주하려는 신앙인에 대해서 ‘거룩한 여정을 통해서 사회를 거룩하게 만들라’는 촉구로 들리며, 지엽적인 사고를 부추기고 경쟁 중심의 사회 속에서 ‘모두를 아우르는 공동선을 추구하라’는 명령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잊혀지는 이 신앙 문화 속에서 그분과 함께 했던 ‘사도들의 나눔과 섬김의 선교’를 채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고정된 역사적인 문서이기 이전에 이미 우리 교회와 사회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대안적인 가치요, 종말론적인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설프나마 참된 교회 안에서 신앙의 여정을 굳건히 하려는 분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질문을 주셔서 저도 한껏 다시금 성찰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고맙습니다. ^^;

주님의 넓으신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2004년 5월 27일 at 2:45 pm

니케아 신경 – 4. 사도적인 교회 – 주교의 교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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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사도적”이라는 말을 통해서는 크게 두 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그리스도의 선교 위임을 받은 사람들을 사도로 불렀던 탓에, 그 사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교회는 이런 선교적 위임을 받은 공동체라는 생각이겠구요. 이것이 사도적 교회의 기본적인 근간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이 사도적인 위임은 교회를 통해서 신뢰감있게 지속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표현은 바로 사도들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통해서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맥락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보완적이라 생각합니다. 선교 위임이라는 근본적인 정신과, 이를 교회 안에서 권위있게 지탱해 나가려는 구체적인 교회 치리 형태의 구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발전 과정에서 후자의 맥락을 매우 중요시한 교회들은 전통적으로 감독(주교) 중심적인 교회 치리 형태를 가졌습니다. 분열되기 이전의 초대교회들과, 로마 가톨릭 교회, 정교회, 성공회가 대표적이며, 서유럽 루터교의 일부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사도적인 정신과 감독의 지위를 분리하고자 했습니다. 감독은 이후에 만들어낸 교회 치리에 따른 직제일 뿐 사도적인 계승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사도로서의 교회의 선교적 위상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도계승권 문제는 내내 교회의 일치와 가르침을 위해 중요하게 작용했고, 실제로 성서에도 혼란은 있으나 “주교직”의 존재에 기능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합니다. 교회가 발전하면서 그 역할이 특화되고, 교회의 행정적 치리와 교리적 일치를 위한 중요한 직책으로 안착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회의 선교가 자유로워지면서 교회가 확장되고, 이에 따른 다양성이 자칫 ‘하나인 교회’라는 이상과 이미지에 훼손을 줄 염려도 있었던 것이지요. 어쨌든 사도적 교회라는 의미는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선교 위임, 복음 전파를 근간으로 하여, 역사적인 필요에 따라 구체적으로 주교직을 통해서 그 선교와 사도적인 직무가 지속된다는 생각을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성공회는 기본적으로 사도적 계승권을 굳이 “주교”의 안수를 통한 계승이라는 식으로만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성공회가 교회 일치 운동을 위해 내 놓은 기준 가운데 “주교직”에 관한 문제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적용된 주교직의 형태에 집중하지, 특정한 형태의 주교직에만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물론 성공회 안에서도 다양한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만, 이와 관련해서 아주 좋은 사례를 미국성공회와 미국루터교회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교단은 오랜 교회 일치 대화 끝에, 양 교단의 예배와 성직자의 사목을 교류하고, 안수(서품)까지 함께 하는 “완전 상통” FULL COMMUNION의 관계에 들어섰는데, 그전까지 논란의 핵심은 “주교직”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공동 선교를 향한 부르심”이라는 문서를 통해서, 주교직을 비롯한 성직, 그리고 모든 사목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선교적 증언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주교직은 이런 선교 위임을 받은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선교에 충실하도록 하는 직책이라고 이해했기에, 전통적인 ‘사도 계승권’ 교리를 갖고 있던 성공회와 이와는 다른 치리 구조를 갖는 ‘감독직’을 갖고 있는 루터교가 서로 이런 차이와 공통점을 받아들였던 것이지요.

다시 말씀드려 큰 맥락 안에 예수님의 선교를 이어나갈 위임 받을 공동체로서의 “사도적 교회”가 있다면, 그 선교를 위한 방편으로서 ‘주교직’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다시 한번 복음서의 선교 대 위임의 말씀을 되새겨야 할 때입니다. (마태 28:16-20,)

Written by skhfaq

2004년 5월 27일 at 2:42 pm

니케아 신경 – 3. 보편적 교회의 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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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와 관련해서 용어의 사용에 대한 이해가 우선해야 합니다. 신경에서 말하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믿음은, 흔히 말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천주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개신교 일각에서 “사도신경”에도 “가톨릭 교회”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 이것은 개신교의 신앙 고백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매우 심려할 말한 무지가 횡행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이라는 말은 “보편적” “전체적”이라는 의미를 담은 말입니다. 해서 가톨릭을 용어를 사용하고 싶어하지 않는 개신교 신학자들은 CATHOLIC 대신에 UNIVERSAL 이라는 대체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어떤 용어가 되었든 이 생각의 근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란 점에서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 교회라는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다가 선교를 통한 교회의 확장과 더불어 전체 세계 교회를 아우르는 의미에서 교회의 체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의미 변화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스스로를 ‘가톨릭’이라고 부를 때, 자신들의 교회 체제가 보편적이고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에 대해서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교회 체제의 전체성이 아니라, 교리의 보편성을 가지고 이에 대항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실제로 교회 체제의 보편성이 가능하고, 교리의 보편적인 동의가 가능한 것일까요?

“하나인 교회”에 대한 생각과 닿아 있는 이 문제 역시 좀더 넓은 시각을 요구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앙인들이 서로 다른 의견과 삶의 형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가운데 사로 협력하고 교제하는 것에 대한 꿈이라고나 할까요? 혹은 그렇지 않은 현실에 대한 도전이라고 보아야겠지요. 다양성은 늘 존재합니다. 그 다양성을 넘어서 우리를 묶어주고 “일치”시켜서 “가톨릭” 교회가 되도록 하는 여정은 이러한 협력과 교제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의 삶이 무엇이었는지를 묻고 그 삶을 현실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공동선”에 대한 성서의 말씀이 이러한 “가톨릭” 교회를 향한 새로운 선교 임무로 들립니다. (로마 8:28, 1고린 12:4-7 을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Written by skhfaq

2004년 5월 27일 at 2:40 pm

니케아 신경 – 2. 거룩한 교회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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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 문제도 교회가 거룩한 것이 당연하다면 굳이 언급되지 않았을 문제이겠지요. 앞서 “하나인 교회”에 대한 이야기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도나투스 논쟁과 그와 비슷한 논쟁들이 거듭되면서, 교회에는 “거룩한 사람들”만의 곳인지 아니면 “가라지와 알곡”이 섞여 있는 곳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 역시 역사적인 현실과 이론적인 믿음 사이의 갈등이라고 하겠고, 이 역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갈등과 거리이기도 합니다.

이 믿음의 근거는 역시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근거한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겨왔기에, 이상적으로 그 몸에 참여한 사람들도 거룩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이상적 기준으로만 판단하면 거룩하지 못한 사람은 교회에서 축출되어야 마땅합니다. 실제로 교회는 역사적으로 이런 축출과 배제를 경험했으며, 그 어리석음을 거듭 깨닫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 거룩함의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누구 교회의 다른 사람을 거룩하지 않다고 간단 명료하게 판단하게 그들을 갈라내어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할 것인가? 이런 사고 방식은 몇가지 역사적인 연원에 근거해서 이름을 붙이자면 “청교도적 사고”(PURITAN)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들만이 “정결하다”는 식의 도덕적 엄격주의의 옷을 입고 등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가라지와 알곡이 섞여 있을테고, 그것을 가리는 일은 우리들의 일이 아니라 마지막 때의 하느님께서 하실 일로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성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니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근거한 만큼 그 그리스도의 몸에 초대된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해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모두 하느님 앞에 선 자로서 마지막 때에 거짓은 거짓으로, 진리는 진리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 마지막 때의 하느님 앞에 설 자로서 ‘나’는 이 교회를 통하여 나를 얼마나 거룩하게 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앞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광야를 배회하며 약속의 땅을 밟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순례하는 공동체”이기에 거룩함을 향한 그 순례의 과정에 충실할 때만이 “거룩한 교회”의 이상이 썩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즉 “거룩한 교회”라는 믿음은 어떤 추상적 개념 정의가 아니라, 이 순례의 과정 속에서 드러날 “아직 아닌” (NOT YET) 종말론적인 공동체의 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대체로 “칭의론”(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에 대한 편견과 과도한 집착으로 인해서, 신앙인의 “성화”(SANCTIFICATION)의 순례적인 개념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신앙 사건이 끝난 것처럼 오도되고, 신앙과 교회 공동체의 사귐 속에서 발전시켜야 할 “거룩함”에 대한 지속적인 순례의 여정은 끝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당신과 계약을 맺은 백성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레위기 19장 2절)

Written by skhfaq

2004년 5월 27일 at 2:38 pm

니케아 신경 – 1. 하나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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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인 교회”에 대한 믿음은 그 믿음이 깨뜨리는 위협의 순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니케야 신경이 형성되기 전에 교회는 매우 큰 분열의 조짐을 보였는데,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기 전인 250년경의 박해 사건과 더불어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했던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박해에 의한 “배교자”들 가운데는 일반 신자들뿐만 아니라 주교들과 같은 고위 성직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해 이후 이들이 다시 그 일을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대두되었고, 이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과 그럴 수 없다는 주장으로 첨예하게 갈라졌습니다. 도나투스 논쟁이라 불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교회의 일치에 위협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논쟁 끝에 과거의 잘못을 근거로 독자적인 교회를 만들려는 생각은 “교회의 분열” 위협으로 간주되고 최종적으로, 교회는 “하나”로서 일치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여파 속에서 니케아 신경 (325년)에도 이 내용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회의 일치에 대한 믿음은 그리 성실하게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분열했고 (1054년), 서방교회 역시 1517년 개신교 종교개혁을 통해 분열되고, 이후 개신교의 분열은 가속화되어 지금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니케아 신경 당시의 상황을 가지고 보면, 모든 교회는 지금 분열 안에 있는 교회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현재의 교단들(로마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은 저마다 니케아 신경이 선언하는 “하나인 교회”에 대한 믿음을 자기의 논리 속에서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 신경(CREED)가 보여주는 믿음의 선언과 분열의 현실 사이에는 분명한 거리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며, 이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인 교회에 대한 믿음을 현재의 상황에서 다시 생각해야 할 필요가 뒤따릅니다.

일치에 대한 희망 사항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눈여겨 볼만한 주장은 세 가지입니다. 즉 현실의 분열을 인정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이고, 세상의 끝 날에 이르러서는 이런 분열이 해소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를 종말론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두번째는 나무 가지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나무가 성장하기 위해서 한 뿌리를 두고 다양한 가지를 뻗듯이 다양한 교회는 하나의 현실이지만 한 나무로서의 유기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마지막으로 교단적인 통합에 대한 이상보다는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하여, 교회의 다양한 문화적 조건과 역사적 상황 속에서의 다양성을 인정한 후에, 이 다양성 안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교의 본질들을 부분적으로 나누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모자이크론이라고 명명하면 될까요? “다양성 속의 일치”는 말이 여기에 닿아 있지요. 교회 일치 운동에 매우 헌신적인 성공회는 기본적으로 이 세가지 입장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현실적인 일치의 노력을 위해서 마지막 입장을 강력하게 견지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이런 논의는 지속적으로 한분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기초한 교회들이 다양할지라도 서로 교류하고 함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갖게 합니다. 그리고 다양성이 아니라 반목과 질시, 심지어는 싸움으로 치닫는 상황에 대한 반성 속에서 더 이상의 분열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을 위해서 드리는 “일치와 사랑”을 위한 기도는, 니케아 신경의 “하나인 교회”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해석하는 기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7장 20절에서 26절에 이르는 예수님의 절절한 “일치”의 기도를 현재의 분열된 교회들은 거듭 되새겨야 하겠지요.

Written by skhfaq

2004년 5월 27일 at 2:3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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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분열과 일치 – 누구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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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님이 쓰신 글]

안녕하세요 .. 저는 가톨릭 신자 입니다

본론만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과연 이렇게 나누어진 교회의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 일까요?

여러가지 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희 교회에 교리에 반대?

한다는 근거야 다의적인 의미가 많이 있는 성경에서 찾아서 신학적으로 정립하면 되

는 것이지 않습니까?

여하튼 주님이 세우신 교회의 본질을 제대로 실천하는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예수님을 직접 체험했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을 조금이나마 더 간직하고 사도들과 여러 성인들의 가르침이 남아있는

있는 교회는 가톨릭(동방가톨릭 포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잘못 속에서도 가톨릭이 구원사업을 행 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성령의 은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분열되었습니다. 피를 흘렸습니다.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모습일까요?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모습일까요?

사도 바오로도 고린토 교회의 분열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두서없이 어설프게 한 말씀 드렸습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 주님의 평화

“가톨릭”님 안녕하세요?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역시 안타깝게 생각하는 그리스도교의 한 신앙인으로서 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생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분열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무엇보다 지난 세기 이후 교회 일치 운동에 가장 헌신적이었던 성공회는 이 아픔을 더욱 크고 깊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분열에 대한 진단의 시각 자체가 서로 다르면, 치유를 위한 처방 역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 속에서 얻는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 교회가 가장 역사적으로 사도적인 교회’이니 ‘이 교단’을 중심으로 일치가 전개되어야 한다든가, ‘이 교회가 가장 성경에 기반한 교회’이니 ‘이 교단’을 중심으로 되어야 한다는 등의 의견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 정교회, 성공회를 비롯한 여러 개신교회들 안에는 이런 자기 주장을 통해서 서로를 설득하려는 움직임이 여전합니다. 그러나 그 전개나 결과는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가톨릭’님께서 주장하시는 대로 로마 “가톨릭 교회(동방 가톨릭 포함)”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의견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오래된 주장입니다만, 정교회(동방교회 및 각 전통의 정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예수님을 직접 체험했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을 조금이나마 더 간직하고 사도들과 여러 성인들의 가르침이 남아 있는 교회”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를 그런 교회로 자신할 지 언정 로마 가톨릭 교회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종교개혁은 크게 보면 중세 서방교회 안에서의 자기 개혁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쉽게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종교개혁이란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어떤 특정한 교단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이 속해있던 서방교회 전체 자체 “안에서” 일어나, 성서의 권위를 새롭게 비추어 보고, 그에 따라 교회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살펴본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다양한 개신교 형성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전혀 분열되지 않은 ‘정통’ 교회라고 자처하는 동방 교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서방 교회 내의 자기 분열일 뿐입니다. 즉 로마 가톨릭 교회도 하나의 분열된 교회의 일원일 뿐인 것이지요.

교회가 분열하여 서로 싸우고 피를 흘렸던 부끄러운 역사는 자신을 중심으로 어떤 일치건 통합이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 속에서 싹텄습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들은 세속 정치 권력을 이용하고 거래를 했으며, 한 분이신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형제들을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도륙했던 것이지요. 즉 어떤 배타적 기준에 의한 일치라는 것이 이미 하나의 환상이거나, 동시에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깨달은 지 오래라는 사실입니다. 서방교회 전통 안에 있는 개신교회가 세월을 거듭해서 분열했던 이유들은 이런 ‘배타적 진리 소유’라는 입장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런 전철을 밟질 않길 바랍니다. 이미 로마 가톨릭 교회는 1960년대 초 바티칸 2차 공의회 이후 이런 배타성의 원리에 대한 반성을 제기하였고, 그 이후 지속적인 교회 일치 대화가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무엇보다도 서로를 통해서 복음의 진리, 교회 신앙의 전통을 풍요롭게 배우는 시기였습니다. 이미 1940년대에 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 측의 교회 일치 운동과 더불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런 포용성의 원칙을 제공한 것은 그리스도교 역사에 큰 축복으로 남아 있습니다.

님 께서 말씀하신 대로, 교회는 잘못을 통해서도 성령의 은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쉬지 않고 전개합니다. 그러나 그 성령의 은총을 로마 가톨릭 교회만이 독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자유롭고 넓으신 성령은 그리스도교회 전체의 분열이라는 아픔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내의 여러 신앙 전통 안에서 그 역사와 그 신앙인들과 그 현장의 삶을 통해서 내내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넓으신 성령님의 활동을 감지하면서, 교회의 분열과 그 아픔을 응시하는 일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해나가는 일은 늘 “내 탓이오” 하는 철저한 자기 반성을 통해서 더욱 깊어짐과 동시에 다른 이들과의 폭넓은 대화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회의 태도에 대해서만 짤막하게 덧붙이면 이렇습니다. 성공회는 교회 일치와 관련하여 “일치를 위해서 스스로 사라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 기꺼이 사라지길 다짐하는 교회”라는 신념을 그 신앙과 실천 속에서 발전시켜왔습니다. 이 때문에 성공회는 어떤 가능성에도 열려 있는 교회가 되기도 하고, 또한 이런 개방성 때문에 그 모호한 정체성에 대한 비판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회는 최소한 이러한 태도가 교회 일치에 진전을 가져오리라는 확신과 경험을 통해서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길도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중요한 하나의 길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 길 속에서 함께 만나서 이야기하고 걷고 어깨동무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길만이 옳다고, 이런 걸음자세만이 옳다고, 이런 여행 복장이 옳다고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종종 이런 자기 주장들은 ‘남을 제어하기 위한 내 신념’이었을 망정 성령님의 은총에 나를 맡기는 ‘투신의 신앙’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길 어느 모퉁이에서 다시 만나기를 희망하며,

주낙현 신부 합장

신부님의 글 정말 잘 읽었고 많이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일치라는 것 말은 쉽지만 서로 양보와 희생을 기본 전제의 바탕으로 삼아야 겠지요.

이것이 어려워서 지금도 이렇게 갈라진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렇고 신부님도 그렇고 자신의 교회에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신부님 말씀대로 교회가 누구를 중심으로 일치해야 되는가란 문제는 정말 많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동안은 무조건 저희 교회 중심으로 라는 생각만 앞섰던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그럼 신부님에 말씀을 제 주관으로 해석한다면

(게다가 종교개혁은 크게 보면 중세 서방교회 안에서의 자기 개혁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부님의 말씀 중에서

만약에 성공회가 잘못한점이 있어서 누군가 개혁이 필요하다고 교회를 나간다면
그것은 올바른 행동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감리교는 성공회에서 나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공회에서는 감리교를 자기개혁를 잘한 교회로 보시는 지요???

마 지막으로 교황 선출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의 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봅니다. 신부님이 앞서 글에서 성령의 작용이 어느 교회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황님에 대한 비판의 글은 남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결국 신부님의 성공회 중심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됩니다. 이 점에 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또 염치 없이 글을 올립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 되기를 기원하며 -엘리사- (제 본명 입니다.)

+ 주님의 평화

엘리사님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 답변과 다른 글에 대해 의견 주신 것 고맙습니다. 어떤 질문이든 함께 나눠보자는 초대한 것이니 엘리사님이 염치 없을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즐거움이기를 바랍니다.

이 미 많은 이야기를 위에서 했으니, 다시 질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제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교회 일치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종교개혁을 통한 분열이 하나의 자기 개혁 운동이라고 할 때 성공회와 감리교의 분열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는 블로그에 올렸던 새로운 교황에 관한 글이 “성공회 중심의 비판”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제가 답변에서 했던 말과 모순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첫째로, 성공회와 감리교의 분열에 관한 것입니다. 앞서 답변에서 종교개혁에 대한 제 나름의 표현을 다시 언급하자면, 종교개혁이란 세계 그리스도교의 견지에서 보았을 때 “서방 교회 내 자기 개혁 운동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엘리사님이 감리교에 빗대어 말씀하신 “자기 개혁이 잘된 교회”를 뜻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디에서도 종교개혁이 “자기 개혁이 잘된 교회”라는 의미에서 그 분열을 정당화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런 생각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 평가는 잠시 접어두고 그것이 하나의 필연적인 “산물”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회 역사 안에서 일어났던 특정 시기의 어떤 신앙 쇄신 운동이 기존의 전통 안에서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감리교가 독립적인 교단으로 발전해 나간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반성이 필요합니다. 그 하나는 이런 자기 개혁의 동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당시 교회의 폐쇄성에 대한 반성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개혁 운동의 주창자가 끝까지 성공회 안에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의 추종자들이 교단적인 분리를 택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성공회로서는 당시의 폐쇄성에 대해서 반성해야 할 것이고, 감리교로서는 분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느냐는 반성이 필요합니다. 즉 반성은 서로에게 요구하는 것이기 이전에 먼저 자기 안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그 때에 건설적인 대화가 진행될 여지가 마련됩니다. 결국 세계 각국으로 펼쳐진 감리교와는 달리 정작 영국 감리교는 최근 영국 성공회와 실질적인 교단 통합과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그 시점을 두고 “올바름”을 따지고 들었다면 요원한 일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더 욱이 현재의 우리는 과거 분열 시대의 당사자들과는 다릅니다. 그 분열과 분리의 역사적, 신학적 계기가 동기가 어떠했든 간에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전통을 유지하면서 살아왔고 그 전통의 영향권 아래서 자신의 신앙을 발전시켜왔습니다. 다만 그 발전 속에서 복음과 신앙의 전통 속에서 우리 신앙을 재발견하며, 우리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반성하고 새로운 교회와 선교의 비전을 찾아가며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교회의 일치는 우리가 이미 살아가고 있는 이 전통 안에서 복음을 통한 이러한 개혁의 길 가운데 만나야 할 어떤 것이지, 과거 어느 시점을 중심으로 한 환원 운동이 아닙니다.

교회의 분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열에는 건설적인 분열이 있는가 하면, 파괴적인 분열이 있습니다. 건설적인 분열과 분리는 교회의 일치를 위협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다양성과 복음의 보편성을 아우르게 하여, 결국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파괴적인 분열은 서로에 대한 반목과 질시를 낳고 결국 대결과 폭력을 동반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훼손할 것입니다.

둘째로, 최근 교황 선출과 관련된 글에 대해서는 짧게 답변하겠습니다. 우선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시라고 권유하는 수 밖에 없지만, 좀더 덧붙인다면 이렇습니다. 그것은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의 신앙인으로서 바라본 하나의 “상념”이었을 뿐입니다. 다만 그 상념의 근거들을 여러 사람들의 평가 – 제가 공부하고 있는 미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 나오고 있는 – 와 더불어 확인하고, 종국에는 어떤 희망을 가져보려는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많은 미국 가톨릭 신자들의 비판과 실망감을 보면서, 다른 교단의 성직자 한 개인으로서 느끼는 아쉬움의 표출 정도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글 말미에 언급한 것처럼, 그분의 새로운 이름대로 세계와 교회에 “축복”이길 희망할 뿐입니다.

평화를 빌며

주낙현 신부 합장

신부님 이번 글도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인터넷으로 나마 허물없이 대화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교황님에 대한 신부님의 글을 보고 맞는 말씀이지만 제 생각과 다른 부분을 이야기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보수라는 의미의 약간은? 부정적인 어조 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판치는 시대로 옛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의견이 팽배한 세상 입니다. 이 점은 신부님께서도 충분히 동의 하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진리는 지켜져야 합니다. 진리가 무너질때 세상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진리보다 행위가 앞설 때 역사는 말해 줍니다. 그 결과는 바로 마르크스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켜져야 할 것은 지켜야 합니다. 단순히 개방 자유. 인간 존중 이라는 논리 아래 지켜야 할 것을 버리는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이겠습니까?
신부님의 의견이 물론 아니시겠지만 성공회의 동성애자에 대한 주교 서품 같은 것은 자유의 미명아래 해서는 안될 것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반성하고 새로운 교회와 선교의 비전을 찾아가며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라는 신부님의 글은 모순 됩니다.
복음을 강조하면서도 개혁과 진보라는 미명아래 복음 정신에 어긋나는 것들을 주장하는 논리말입니다.

또 한가지 질문들입니다. 성공회는 성찬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임재설을 교리로 가지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임재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즉 성체를 어떻게 바라보시는 지를 알고 싶습니다. 분명 가톨릭의 성체이해가 왜곡되어 있다고 하시겠지만 성경에 분명히 그리스도에 몸과 피를 나누어 마셨다는 초대교회에 증언이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한 의견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공회는 가톨릭과의 유대성에 따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3단계로 나누어 진다고 하는데 이점에 대해서도 답변 부탁드립니다.
하이 class 로우 class 라는 표현 말입니다.

일치(Unitas)의 출발은 대화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신부님과 대화 할 수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주님의 평화

엘리사님과 이야기가 길어지는군요(^^). 이곳에만 시간을 쓸 수는 없는 처지이니 최선을 다하되 되도록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일 치의 출발을 대화”로 생각하게 되었다니 기쁩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 속에서는 공통점도 발견하게 되지만 극명한 차이점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차이점들을 이미 엘리사님이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선 이러한 차이점은 로마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천양지차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우선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제가 엘리사님께 우선 바라는 게 있다면 이렇습니다. 어떤 분명한 기준을 두고 분명한 견해를 밝히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 분명한 기준에 대한 성찰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성찰이 충분하지 않으면 필요 없는 오해가 줄기차게 생겨나고, 결국 자신을 어느 시점 안에 가두고 다른 것을 보지 않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예를 들어봅니다. 저는 “완고한 보수주의자”라는 제한된 표현 속에서, 그리고 그런 표현의 선택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 속에서 나름의 생각을 펼쳐낸 것이지, 엘리사님께서 지적하는 것처럼 “보수”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지적들은 내내 엘리사님이 가진 선입견 안에서 확대해석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견해나 “진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표현들이 그 예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태도, 그리고 “세상이 무너지는” 증거로 제시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평가 자체가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다양하다는 점을 먼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엘리사님은 제 말을 인용한 “우리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반성하고 새로운 교회와 선교의 비전을 찾아가며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라는 말을 어떤 모순 어법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에는 “복음”과 “진리”를 엘리사님이 마음에 두고 있는 어떤 특정 교리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습니다. 교리는 “복음”과 “진리”를 드러내고 소통하기 위한 제한적인 방법이요 표현에 불과합니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으로 교리는 “복음”과 “진리”를 막는 장애물로 등장하기도 했고, 그것을 훼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오류에서 어떤 교회 전통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또 그런 이유에서 교리는 시대와 상황 속에서 변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리가 변화와 요구와 도전을 용기 있게 받아들일 때 그것은 또한 복음을 드러내는 수단으로서 유용성을 항상 유지하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과 교리의 차이이자, 그 관계이기도 합니다. 이 상관관계의 긴밀한 역동성을 식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이기도 하며, 또한 우리의 기도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런 식별을 통해서 교회는 교리의 변경을 결정하기도 하고, 잘못된 교리에 근거했던 교회의 생활과 실천을 바꾸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자기 개혁입니다. 이것이 또한 맹목적인 세속적 지배 이데올로기와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른 점입니다.

이런 생각 끝에 저는, 엘리사님이 그리스도교 전통, 최소한 로마 가톨릭 전통 자체의 풍부한 자산들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많은 내적인 대화를 열어가길 권유합니다. 그리고 대화가 깊어가는 과정 속에서 다른 여러 동료 신앙인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엘리사님의 교회 성직자와의 대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전통의 신앙인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전통에 대한 이해가 폭넓고 깊어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성찬례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는 이 게시판의 다른 곳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화체설”과 “성찬”과 같은 검색어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질문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성공회 내의 어떤 성향에 대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가톨릭과의 유대성”이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기 어렵고, 예전적인 성향과 신학적인 성향에 따라 “고교회” “광교회” 그리고 “저교회”라는 표현으로 성공회 내의 다양한 흐름을 설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내용 역시 검색어를 통해서 먼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 삶과 죽음과 부활로 보여주신 복음의 길을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만나게 될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그 잡히질 않고 내내 걸어야 할 것을 요구하는 복음의 목소리가 엘리사님을 늘 이끌어 주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넓고 크신 은총이 함께 할 것입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2004년 4월 23일 at 3:22 pm

성직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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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들어오면, 개신교 다니다가, 성공회 성직자 되고 싶다고 질문 하는 사람 많은데, 왜 이런 사람이 요즘 부쩍 늘었는지?

신부님옷이 멋있어서 그러는지?

성직자의 길이 생각하는만큼 멋있고 화려한 길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인내와 고난으로 가득한 좁고 힘든 길입니다.

예배집전하는 모습만 보고, 폼난다고 여러가지 변명들이대며, 나도 성소 받은것 같으니까 성직자 되고 싶다, 뭐, 미안하지만, 솔직히 그런 인상들이 강합니다.

성직자는 일절 세속인과는 그 생활방식이 달라야 하며, 주님과 자기의 양떼를 위해서는 모든것을 희생하는 불타는 소명의식과 처절한 자기희생이 있어야 되는겁니다.

이런것 진정으로 생각들 해보셨나요? 나는 이런것 생각하면 성직자는 정말 아무나 하는거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직자가 폼난다고 할 생각하지말고, 처절한 자기희생과 인내, 절제를 감당할 수 있을지 진정으로 다시 생각들 해봅시다.

+ 주님의 평화

궁금이님께서 매우 중요한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이 게시판이 어떤 의문에든지 성실하게 답변하려는 것이었기에 저는 그동안 이런 지적들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답변을 시도했습니다. 이미 성소에 대한 질문을 던지시는 분들은 이 문제를 이미 많이 생각하고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궁금이님께서 중요한 지적을 하신 것을 핑계삼아서, 이와 관련된 제 생각을 나누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궁금이님의 이 문제 제기는 사실 간과하기 쉬운, 그래서 상당히 위험한 문제들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성직은 하느님이 주신 소명인가? 아니면 나의 개인적인 결단인가? 많은 성직지망자, 그리고 서품받은 성직자들마저도 여기서 혼란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하게도 “주님의 종”이라는 본뜻과는 전혀 모순되게도, 이 용어를 쓰면서 목회자로서의 온갖 권력을 행사하거나, 짐짓 존경을 강요하는 개신교의 혼란이나, “존재의 격이 다른 사람”으로 사제를 이해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혼란에서, 성공회도 사실 자유롭지 않습니다. 결국 “성직자”라는 것이 하나의 신분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거나, 궁금이님께서 지적하시듯이 “짐짓” 권위있는 “체”하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성직의 본 뜻과는 거리가 먼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매우 현실적인 이유로 특별히 성공회 성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철저한 개교회주의에 따른 난립과 경쟁때문에, “좀더 안정적인 체제”를 갖고 있다고 “보이는” 성공회에 관심을 갖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앞서 지적한대로 내면화된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멋있게 보이는 것”이 성직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을 자연스럽게 부추길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동안 교회의 개혁과 사회의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제거하려고 했던 교회 역사의 나쁜 잔상들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멋있는 “성직자 복”도 곧 닳아 헤어지기 마련이며, 한국에서 성공회는 매우 가난한 교회인 것이 현실입니다.

이런 처지에서 보면 결국 드러나야 할 것은, 그리고 드러나고 마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완전히 발가벗겨진 한 개인의 존재이며, 그 가냘픈 존재에게 하느님께서 맡기신 공동체에 대한 인도와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여기서 부르심을 받았느냐 하는 식별이 매우 중요하게 떠오릅니다.

또한 성공회는 그리스도교 전통이 발전시킨 하나의 신앙 생활 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어찌 보면 전혀 새로운 전통 안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겠느냐, 그 전통과 생활 방식이 요구하는 신학과 신앙을 발전시키겠느냐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교단은 단순히 어떤 외적인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 안에서 발전된 신앙의 축적에 자신을 던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공회 안에서 성직 소명을 찾으시는 분들은 이런 점들을 생각하며 그 소명을 좀더 분명하게 식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저는 궁금이님과는 다른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은 아니라 생각합니다만, 성직자는 세속과 전혀 동떨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철저히 세속 안에서, 세속적인 삶을 통해서 오히려 하느님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성직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이 추한 세상이 오히려 하느님을 드러나는 아름다운 마당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찾아주고, 그 실마리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성직자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세속과 성직이라는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구분이 바로 권위주의를 낳는 싹이라고 보며, 실제로 많은 목회자와 성직자들이 이를 바탕으로 오히려 위선적이며, 권위적인 생활을 정당화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이 게시판에서 오래 전에 “성사로서의 사제직”에 대한 성찰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많은 이곳에 오시는 많은 분들은 그런 내용에는 관심이 적은 것 같습니다. 조회수를 보니 금방 두드러지더군요.

궁금이님의 지적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미 많은 분들이 성공회 안에서의 성직에 대한 질문을 하셨고 그에 대한 답변을 드렸습니다. 그 내용을 다시 간추리자면, “하느님의 부르심인가 내 결단인가?”에 대한 식별, 그리고 성공회 신앙 공동체의 경험과 그 안에서의 식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샌프란시스코 그레이스 대성당에서 열린 성직 서품식에 다녀왔습니다. 그 축하의 장에서 설교하신 마이클 잉햄 주교님(캐나다 성공회)은 분명하게 이렇게 단언했습니다. “교회를 위한 봉사라는 일을 정확히 식별하지 않고 성직자가 되는 것은 단연코 자신을 파괴하고, 나아가 공동체를 파괴할 것이다.” 이 대림절의 절기에 사제인 제 자신이 되새기고 성찰해야 할 식별의 경고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혹시 검색 명령어를 통해서 “성소” “성직” “사제”와 관련된 내용을 찾아 읽어보시면 부족하나마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스쳐지나갈 수 있는 중요한 문제를 지적해주신 궁금이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힘없는 아기로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낙현 신부 합장 ^^

Written by skhfaq

2003년 12월 8일 at 1:35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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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사회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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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주 신부님.
저는 장로교회를 다니는 청년입니다.
이번에 SOFA개정을 위한 서명을 교회 이름으로 하려고 했었습니다.
청년회 담당 전도사님도 크게 호응을 해 주셨고,(교단차원으로 소파
개정운동이 벌어지도록 하실정도였습니다.) 학생회 담당 전도사님도
크게 호응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문제는 담임 목사님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사회참여를 하는게 싫으신 듯 합니다.
교회이름으로 사회참여를 하면 안된다면서, 오히려 교회의 사회 참여를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성경에서는 사회참여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합니다.
정말 교회에서 사회참여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인지요..
답답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저는 교회가 사회참여를 하지 않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한국 개신교가 독재에 침묵을 지킨 것을 알기에….

질문에 대한 아타나시오님의 답변

저도 같은 내용을 고민하고 있어
함께 나눠보고자
그냥 주제넘게 답변을 드립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점점 더 보수화되어가는 교회의 침묵에
무척이나 답답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성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느끼는 점은
기독교의 본질은 구약에서 신약까지
철저히 사회적인 종교라는 점입니다.
바울로 신학에 와서야 개인적으로 편향된 느낌도 약간 받습니다만
적어도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성서는 철저히 사회적으로 민감한
종교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 참여하지 않는 것보다도
훨씬 종교적으로 어렵다는 것도 함께 느낍니다.
종교가 자칫 잘못 참여할 경우
독재와 제국주의의 첨병 구실을 하거나
이익집단이나 정치집단으로 오용되기에 너무나도 좋은 조건을 가진 것이
교회이기도 한 것같습니다.
이것은 비단 보수적이거나 식민적인 이념을 부르짖을 때 뿐 아니라
진보와 인권을 지향할 경우에도 교회가 권력이 되는 순간
언제든지 변질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변질은 보수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추구하는 하느님의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세속적으로 오용되지 않기 위해서는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운 걸음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참된 진리를 조금이나마 깨달은 사람이라면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향한 올바른 신앙의 자세가 되는지를
성령께서 알려주실 것이라는 점을 굳게 믿을 것입니다.

저 양심에서, 저 수많은 사람들의 울림 속에서 메아리치는
성령의 메시지에 귀를 닫고 마음을 닫는 것이 신앙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형제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가로막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양심의 울림을 따라 살고자 노력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저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신부님이건 목사님이건 간에
잘못된 의도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존중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경계선은 여전히 모호하고
쉽지만은 않은 일인 것같습니다.
제 고민도 사실 여기에 있습니다.

+ 주님의 평화

김재홍 형제님 안녕하세요?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게으름을 피우는 동안에 아타나시오 형제님이 참 좋은 답변을 주셨군요.
역시 나눔은 서로를 살찌우고, 풍요롭게 하는게 틀림없습니다.

좋은 답변에 제가 또 무슨 말을 덧붙일까요?

다만 한가지만 덧붙여보고자 합니다. 사족이 되질 않길 바라면서….

김재홍님께서는 한국 교회가 역사 속에서 독재 정권 앞에서 침묵한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보수적인 교회들은 대체로 교회의 정치 참여는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런 교회들이 보여주었던 것은 “침묵”을 통한 독재 정권의 “인정”이라는 암묵적인 정치 참여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교회의 사회적 책임, 혹은 정치적 책임은 그것이 어떤 외향적 성격을 띄는 적극적인 것이든, 암묵적인 책임 회피이건 분명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삶의 모든 행동들은 모두 “정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역사적으로 살피건대, 사회 정의를 부르짖고 실천했던 많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 신앙인들을 탄압했던 정치 권력자들에 편승하여, 보수적인 교회들이 신학적인 이유를 들어 함께 비판하며 입을 막었던 것은, 정반대의 행동으로 보여준 명백한 “정치 참여”였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행동은 어떤 점에서 모두 정치적인 행동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꿈과 이상은 정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현실 사회의 변화를 꿈꾸고, 이에 대한 실천이 없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 염려하고, 기도하고 나아가 행동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부르심입니다.

그 참여의 구체적인 방법과 전략은 물론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아타나시오 형제님의 깊은 고민에 대한 “사족”이 아니었나 두렵군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

Written by skhfaq

2002년 1월 14일 at 12:37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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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교회 전통의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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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평화

마지막 질문과 답변입니다.

질문 4.

가톨릭은 성서와 함께 그 보충적 권위로서 성전(聖傳)을 인정하고 있는데요.. 이에 비해 개신교 다른 교파들은 오로지 성서만을 유일한 권위로 보고 있지요.. 이 부분에 대하여도 성공회의 입장을 알고 싶군요. 성공회도 聖傳을 인정하는지요? 그렇다면 그것은 종교개혁 이전의 것까지 포함하는지..? 또 가톨릭의 성전과 다른 점이 있는지.?


답변 4.

로마 가톨릭(천주교)과 개신교의 성서 범위는 조금 다릅니다. 그것을 질문하신 분께서는 성전(聖傳)이라고 하셨는데, 이런 용어를 쓰면 너무 범위가 넓어집니다. 고쳐 말하자면 첫 번째로 성서에서 정경으로 인정하는 문제가 되겠고, 둘째로 교회의 전통에 대한 권위의 차이가 질문이겠는데요?

먼저 로마 가톨릭은 구약의 많은 경전 가운데 여럿을 제 2경전으로 표현하며 정경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개신교들은 이들을 모두 외경으로 표현하여 성서 연구와 이해의 참고 자료로만 인정하고 있습니다. 성공회는 외경에 대해 경전적인 권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만,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고 읽기를 권장합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요.

둘째 교회의 전통에 대한 권위의 문제는 구체적으로 지목하지 않으면 논란이 많아집니다. 다만 성공회의 접근 태도는 교회 가르침을 위한 권위의 최상의 근거는 성서입니다. 이와 병렬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바탕 아래 교회의 전통인 외경과 교부들의 신학, 그리고 공의회의 결정과 신학적 저술 등을 살핍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언제나 위험은 있습니다. 최상의 근거인 성서 자체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분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권위는 어디서 구해야 할까요?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교회의 고민이요 질문이 아닐까요? “우리 권위의 원천은 성서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성서 연구와 더불어 오랫동안 기도하며 말씀을 연구하며 사목한 결과인 교회의 전통을 쉽게 무시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성서와 교회의 전통은 이런 상관 관계 혹은 대화의 관계에 있습니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기도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유명한 신학적 등식이 있지요. “기도의 법은 신앙의 법”(Lex orandi, Lex credendi). 환원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면서 말한다면, 하느님을 향한 기도(예배)야 말로 신앙의 요체요 권위가 아닐까요?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한 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드림 ^^

Written by skhfaq

2001년 8월 15일 at 2:39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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