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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와 천주교 – 전례 개혁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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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십시오…

안녕하세요? 신부님!! 미국에서 고생이 많으시죠?? ^^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제가 알고 있는 유일한 성공회 신부님이라는 사실에 신부님과의 만남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수도 공동체에 함께 살고 계신 신부님께서 작년 태백에 있는 성공회 신부님께서 활동하시는 공부방에서 형제들과 함께 며칠 계셨다고 하는데 참 좋았다고 하시더군요… ^^

성공회 신부님과 교류를 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던데…저도 신부님과 그런 교류가 가능하겠죠?? ^^

아~~ 주제에서 벗어나는 말을 오랫동안 했군요…

질문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전례개혁을 했습니다. 성 비오 5세 미사 또는 트리덴틴 미사라고 일컫는 미사를 대신해서 자국어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고, 제대위치도 벽을 보는 것이 아닌 회중을 향하게 되었고 미사가 다소 간소화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티칸 공의회를 주도하신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트리덴틴 미사를 아예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전통도 인정하면서 보편적으로 드릴 수 있는 미사를 제정하셨는데요…

성공회와 가톨릭의 미사 형태가 비슷한 시점에서 성공회의 미사는 어떤 변화를 거쳐왔는지요… 어떤 성공회 성당의 제대를 보니 벽쪽에 제대를 붙여 놓은 곳도 있던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성공회 내에서도 미사전례에 대한 변화가 있었는지, 아니면 독자적인 변화를 거쳤는지…

그리고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도 성공회의 미사는 지금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

질문이 많죠?? ^^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일치하는 그대의 벗 이정은(요한 보스코)수사 두 손 모음…

+ 주님의 평화

이정은 수사님 안녕하세요? 근래에 이 공간을 통해서 자주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에큐메니칼 대화와 협력은 서로의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를 향한 공동의 발걸음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양 교회의 공식적인 채널뿐만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대화와 협력일 때에 그 진정성을 굳건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늘 새로운 물음과 열린 대화의 태도로 좋은 물음을 던져 주시는 이수사님은 이런 대화를 이끌어 가시는 분입니다. 이수사님의 손에 끌려 다니다가 덤으로 얻는 배움이 크다고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례(예전)개혁에 관련해서 말씀드립니다. 아시다시피 그리스도교계의 세계적인 전례 개혁은 이른바 “전례 운동”(Liturgical Movement)이라는 이름으로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추동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제는 역시 형식화되고 화석화된 예배가 아니라 신앙인의 “적극적 참여”(active participation)를 기반으로 한 하느님 백성의 일(레이투르기아)로서 예배를 회복하자는 것이었지요. 그 반세기 넘은 결과물로 바티칸 2차 공의회의 그 유명한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전례 헌장)이 나오게 되었고, 그 영향력은 로마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계에 걸쳐 지대한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례개혁은 “하느님 백성”의 전례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라틴어 미사”가 각 지역 언어 미사로 번역될 수 있었고, 기존의 미사와 성사를 대대적으로 개정하여 1969년과 1970년(로마 미사)에 나왔던 것이지요. 즉 전례 개혁의 요지를 바티칸 2차 공의회의 용어로 정리하자면 ‘하느님의 백성이 백성의 일(의무)인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미사와 성사를 개정하고, 미사의 지역어 번역을 허용한다’는 것이겠지요.

한편 성공회는 흥미롭게도 이미 종교개혁(16세기) 이래로 이러한 전례 개혁의 원칙들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즉 영어(지역어) 성서 번역과 함께, 성서에 기초하면서 초대 교회와 중세 교회를 아우르고 영국 지역에서 발전된 예전 전통(대체로 사룸 미사)를 종합한 성찬례(미사)를 영어(지역어)로 만들어 냈습니다. 아울러 성직자 혹은 수도자 중심으로 되어 있던 성무일도를 개혁하여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로 이루어진 공동 예배의 틀을 마련하여 사용했습니다. 아울러 방만하게 나뉘어져 있던 여러 예전서들을 취합하여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가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예전과 성사, 그리고 사목 예식들을 간소화하고 이를 한 권의 기도서로 만들어서 접근이 쉽도록 했습니다. 즉 1549년으로부터 1662년에 이르는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의 개정 과정을 통해서, 1) 성서에 근거한 전례, 2) 초대 교회 전통에 부합하는 전례, 3) 교회의 일치를 위한 전례, 그리고 4) 모든 신자들이 쉽게 접근하여 사용할 수 있는 전례라는 전례 개혁의 원칙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회의 공동기도서는 성공회가 어떤 교리적 혹은 신학적 선언에 기초한 교회가 아니라, 기도서의 영성에 기초해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교회 (Church in Prayer)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성공회에는 이런 공동기도서에 기초하면서 여러 신학적 성향과 교회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경향의 예배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로마 가톨릭에서 일어난 전례 운동과 비슷한 전례 운동이 19세기에 “의례주의”(Ritualism) 운동이라는 형태로 영국 성공회 안에서 발전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당시의 신학적 운동 가운데 하나였던 옥스퍼드 운동과 만나면서 세계성공회 내에 교회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전통적 전례에 대한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실제로 당시 영국 성공회의 경우 전례복이나 전례 지침 혹은 행위 등이 매우 간소화되어 있었고 성찬례도 일년에 네 차례, 혹은 한달에 한번 꼴로 이뤄지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주일 예배는 공동 예배 의식으로 마련된 “아침 기도”를 통해서 드리는 것이었기에, 이러한 흐름은 매우 새롭고도 획기적인 운동이었습니다. 이런 움직임에 힘입어 성공회는 초대 교회의 다양한 예배들을 다시 연구하고, 중세의 전례 관습을 비판적으로 복원하면서 현재의 로마 가톨릭과 비슷한 형태의 전례가 급속하게 퍼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공회가 현재와 같은 매우 전례적인 교회의 모습을 일반적으로 회복한 것은 이제 겨우 100여년 된 현대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성공회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자국어 전례와 전례 개혁의 자율성을 전통을 갖고 있었던데다, 세계 성공회의 구조 상 각 관구 교회가 독립된 교회로서 치리의 자율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자국어 전례와 전례 개혁(대체로 기도서 개정)의 자율적 권한을 자연스럽게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58년 람베스 회의(세계성공회 주교회의)에서는 이러한 전례 개혁의 자율성과 전례 토착화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공식화함으로써, 당시 그리스도교 전체에서 일고 있던 전례 운동의 흐름에 협력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세계성공회의 각국 성공회는 대대적인 기도서 개정과 전례 개혁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의 유산, 그리고 다른 개신교 전통 교회들과 깊은 교류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바티칸 2차 공의회의 “하느님 백성의 적극적 참여”라는 개혁의 원칙은 역시 성공회의 원칙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전례 개혁에 관하여 이제는 로마 가톨릭, 성공회, 개신교회들이 모두 함께 연구하고 이 연구의 성과를 각 교단의 전통에 따라 반영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러다 보니 이제는 전례의 구조적 특징(특별히 성찬례)과 관련해서는 거의 일치된 형태를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세계성공회는 영국성공회의 기도서인 1662년의 기도서를 모본으로 삼아서 기도서 개정을 진행하였고, 이후 세계성공회 국제 전례 위원회를 통해서 함께 전례 개혁의 신학적 원칙을 연구하고, 각국 교회에 권고하는 전례 문서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각국의 성공회는 이를 원칙적으로 존중하지만, 그 교회의 전례는 그 교회에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계성공회의 전례는 그 형태 상의 특징이 서로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같은 나라에서 같은 기도서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행하는 다양한 전례 관습을 강제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교구에 따라 혹은 심지어는 같은 교구 안에서도 개별 교회에 따라, 다른 전례 관습이 온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러 다른 조건들이 관여하는 바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는 여전히 벽에 붙은 제대를 사용하는 교회가 있는데, 이는 현존하는 성당의 구조상 그런 것일 뿐인 경우가 많고, 새롭게 지어지는 성당에서는 신자들을 향한 제대 배치가 대부분입니다. 또 기본의 벽에 붙은 제대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보존하고 새로운 제대를 신자를 향해 마련하여 미사를 드립니다.

전례에 대한 에큐메니칼 연구가 확대되는 것이 세계 교회의 현실이지만, 한국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전통적인 전례의 구조와 형태를 강조하다 보면 왜 로마 가톨릭 교회를 따르냐는 핀잔이 개신교 측에서 우세하다면, 좀더 자유롭고 현대적인 예배의 모본을 전례 전통의 교회에 도입하려 하면, 왜 개신교적 ‘악습’을 도입하려 드느냐는 또 다른 핀잔이 다른 쪽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것은 성공회의 전례 개혁 선구자들과 로마 가톨릭의 바티칸 2차 공의회 교부들이 올바르게 밝혔듯이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과 대화하며 호흡하는 “하느님의 일인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야 말로 전례 개혁의 원칙이 되어야 하겠지요.

함께 하느님의 백성인 것을 기뻐하며,

주낙현 신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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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와 천주교의 상호 미사 참석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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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주신부님… 전 에큐메니컬 운동에 관심이 많은 카톨릭 신자입니다… 성공회, 정교회, 콥트교회등의 형제교회에 관심이 많습니다… “왜 갈라졌어야만 하나” 생각이 계속 머리 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누누히 배운 역사적 배경이나 정치적 배경은 떼어 놓고 말입니다.. 전 30대 초반의 청년 신자인 동시에 직장인이라서 카톨릭 교회에서 주관하는 사도직학교에 등록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가끔 미사 후 저희 본당 신부님께 교회의 일치에 관한 질문을 많이 합니다….

카톨릭 신자로서 성공회 미사에 참석할 수 있는지…(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성체를 모셔도 되는지… 또 거꾸로 성공회 신자의 카톨릭 미사 참석은 그러한지…
다른 분들에 의해 저의 질문이 교리적 논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면…답변은 안 해 주셔도 되구요… (예를 들어… 신품성사, 수위권등…)

아울러 여기 방문하시는 카톨릭 신부님, 수사님, 신학생님의 고견도 듣고 싶습니다…

오늘은 카톨릭 교회에서 지정한 농민 주일입니다…
저희의 일용한 양식을 땀과 힘으로 경작하는 이 세상의 모든 농민들께 주님의 축북이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요셉 배상…

+ 주님의 평화

요셉님 안녕하세요? 교회 전통 간의 대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신 분을 만나니 기쁘고 반갑습니다. 교회의 분열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많은 유산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대체로 그것은 서로에 대한 반목과 질시로 이어졌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라는 맥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신앙의 열매를 가져다 주는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생각에 이르기도 합니다.

역사적 배경과 원인은 그 나름대로 언급하고 논구해야 할 여지가 있다면, 또 그것과 다른 맥락 속에 있는 우리가 서로 함께 이해해야 할 면들이 더욱 크고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님의 고민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나눠야 할 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신 질문은 대체로 천주교 측에서 답변해야 할 것들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만, 그걸 성공회의 처지로 돌려 놓고 답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면 질문의 방향이 조금 달라지는 것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걸 이해해 주시겠지요?

우 선 천주교 신자가 성공회 미사에 참석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요셉님께서 상담하신 천주교 신부님께서는 가능하다고 하셨는데, 그 참여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 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한에서 한국 천주교의 사목지침서에서는 피치 못하게 천주교에서 미사를 드리지 못하는 경우, 혹은 위급한 경우에 한해서 성공회에서 미사를 드리고 영성체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목적 상황에 따른 제한이 있습니다. 성공회는 어떤 경우이든 적법하게 세례를 받은 신자라면 성공회 미사(감사성찬례)에 참여하여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회와는 달리 성공회는 이런 적법한 세례의 범위를 거의 대부분의 건전한 개신교 교단들과 천주교, 정교회의 세례까지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공회 미사에 참석하고 영성체를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찬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열려 있는 식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성찬 이해의 교리적 차이가 여전하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미사에 참석하기 전에 성공회 성직자와의 상담이나 대화를 갖도록 권유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성공회 신자가 천주교 미사에 참여해서 영성체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주교 측이 답변해야 할 것이지만, 제가 이해하고 있는 내용을 밝히면 이렇습니다. 천주교가 성공회의 세례를 적법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으나, 일정한 교리 교육과 “일치 예식”을 통해서 천주교 신자가 된 이후에 영성체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이해라면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이 와 관련해서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특수한 처지에서 제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곳은 지역과 교회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성공회 신자가 천주교 안에서 조건 없이 영성체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공회의 경우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성체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정교회는 서방교회(천주교, 성공회 및 기타 개신교단) 신자들을 영성체로 초대하지 않습니다.

아 울러 성공회 일각에서 논의되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영성체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영성체 개방”(Open Communion)에 관련된 논쟁이 그것인데, 예수님의 식탁 공동체 혹은 밥상 공동체가 어떤 차별의 벽도 철폐하는 매우 급진적인 환대(radical hospitality)였다는 점에서 그 뜻을 새롭게 하고 실천하자는 취지입니다. 이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도대체 성찬례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새롭게 생각하고, 그리스도인됨이 무엇인지를 되새기는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제 짧은 답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좋은 대화의 계기를 열어주신 요셉님께 감사 드립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7월 21, 2005 at 3:5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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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에서 받은 세례와 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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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신부님.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의 아버지인 저는 우연한 계기에 성공회 신앙에 접했습니다.
전 어렸을때 가톨릭 영세와 견진을 받았습니다.
성공회에서는 어떤 입교 과정이 있습니까
가톨릭의 영세와 견진을 성공회에서는 어떻게 수용합니까?
항상 축복있으시길…….

+ 주님의 평화

성공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떤 우연한 계기가 되든 그건 하느님의 손길이 아니겠습니까?

성공회는 그리스도교 내의 다른 교단에서 받은 세례를 인정합니다. 천주교나 정교회, 그리고 큰 의심이 여지가 없는 개신교의 여러 교단들의 세례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견 진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세례가 그리스도인됨이라는 넓고 더욱 근본적인 신앙 입문의 의미를 갖고 있다면, 견진성사는 그보다는 좀 구체적인 교회 공동체, 즉 그리스도교 전통의 한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짙기 때문입니다.

아직 논의 중인 이야기입니다만, 견진이라는 이름 안에는 세 가지 다른 의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첫째는 천주교나 정교회에서 받은 견진을 인정하고 성공회 공동체로 받아들이는 영접 예식이겠고, 둘째는 견진을 받지 않은 분들을 위한 견진 예식입니다. 성공회가 아닌 여느 개신교에서 오신 분들은 견진을 받는 것이겠구요. 마지막으로 신앙 생활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오는 것일텐데, 신앙 재확인 예식이라고 할까요?

이런 세가지의 의미가 한국성공회 내에서는 섞여 있으니 굳이 구별하지 않아도 그 처지에 맞게 이해하시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견진은 성공회에서 다시 받는 것이지요.

교 회 마다 새로운 신자, 그리고 교단을 이적한 분들을 위한 새신자 교육 과정이 다양하게 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의 형태가 될 수 있고, 어떤 그룹을 통한 공부일 수도 있고, 작은 교회에서는 신부님과의 친밀한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가능할 수 있습니다. 교리에 얽매이기보다는 신앙 생활, 즉 하느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걷는 삶에 초점을 둔 대화의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근처 있는 교회를 찾으셔서 신부님과 상의하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성공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신앙 속에서 아름답고 건강한 가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11월 26, 2004 at 3:1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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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개신교, 근본주의, 교회 분열 등에 대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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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안녕하세요? 당분간 자리를 비우셨군요. 전 그것도 모르고 …
그리고 써놓고 보니 제 글이 창피하게 느껴져서 지웠었습니다.
하지만 제 이메일로 주신 신부님의 답장에 용기를 내어 다시 올립니다.
깔끔하게 수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다시 올립니다.
이 사이트가 앞으로 계속해서 뜻깊은 공간이 되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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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은 이름만 반반한 ‘중도’이기보다는 ‘혼란과 딜레마’의 길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저 자신이 혼란과 딜레마의 길을 걸어왔고, 어찌보면 대부분 사람의 삶 자체가 정돈되지 않고 양극단에 처하고 부조리하고 일관성 없는 것이라 성공회 교단 전체에 대하여 그러한 이상 내지는 이념의 완전한 실천을 강요하는 것은, 그럴만한 자격도 없고 또 부적절한 일이라고 봅니다.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성공회든 그 제도(‘제도화된 종교’라는 말도 있습니다만)를 운영하고 실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기에, 어찌보면 어린아이가 걸음마 하듯이 뒤뚱대고 지척이며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성장의 과정 속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엉성하고 다소 편협한 문제 제기를, 신부님께서 직접 정돈하셔서 열려 있는 답변으로 내어놓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명색은 가톨릭 신자이지만, 그 본성(?)상 프로테스탄트적인 기질이 몸에 밴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외견상 제도적으로 완전히 구비된 안정성, 다양한 수도회 카리스마, 독신이라는 형태로 표현되는 완전한 봉헌 그리고 성화(聖化) 등 가톨릭의 화려한 외모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복음적 가치를 급진적으로 실현(제게 있어서는 무교회주의, 이는 정치적 무정부주의와 일맥 상통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하는 내용적 면에서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갈망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이 양극단에 짓눌려 있을 때 제게 새로운 비전을 열어 주는 제3의 길은 어쩌면 숨통을 터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중도’보다는 ‘합(合, synthesis)’을 바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하늘나라에 가면 찾을 수 있겠죠.^^ 하지만 저는 ‘하느님 나라’를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선포하시고 가르치셨던 예수님의 그 갈망이 예수님의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제가 찾는 것은 어떤 흠 잡을 데 없는 교회인 것 같지만, 사실은 진리(veritas)와 정의가 온전히 구현된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셨기에 그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가장 먼저 기도하셨고 그래서 겨자씨 같은 미미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나라의 건설하는 위대한 일을 몸소 시작하셨다고 봅니다. (그것은 물론 여러 제도 교회에서 얘기하듯이 기독교의 전파나 원주민의 개종이 아니겠지요. )

이러한 갈망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다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기도야말로 이런 인류 전체의 갈망을 대신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제적 기도의 전형이 아니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제가 근본주의를 비판했지만, 사실 그러한 신앙 체계 내지는 양식이 제게 크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대로 부정할 수 없는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중세 시대 성 프란치스코나 사막 교부시대 성 안토니오 같은 사람들은 성서를 글자 그대로 믿었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리고 자기에게 들려오는 그 말씀을 어떤 신학적인 반성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온 몸으로 체현한 사람들 아닙니까? 저 자신 슐라이어마허가 말하는 “무한한 존재에 대한 감수성과 취향”을 근본주의 교단에서 얻었습니다. “종교 고유의 특징은 신비스런 체험, 영원의 세계에 감동됨이다. 종교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그러니까 천상적 섬광인 바, 이것은 경건한 영혼이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에 감동될 때 발생하는데, ‘종교의 거장들’은 이러한 종교 체험을 언어 등을 통해 직접 표현하며,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전해준다.”(한스 큉, 그리스도교, 분도출판사, 856쪽)

저는 그때 정말 순수하게 믿었고, 그러한 체험은 그러한 분열되고 깨어지지 않은 믿음에 대한 그분의 선물이었다고 믿습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체험에 그대로 머물 때, 다시 말해 개인적 체험을 절대화하고 그 달콤함에 중독될 때 근본주의의 폐해는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보다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러한 체험(관상)을 전할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반성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전반적으로 왜곡된 사회구조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전망을 얻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좀 뒤죽박죽이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식으로 ‘대화’해 본 적이 없어서… 신부님이 주신 글에 대한 답글이라기보다는 제 넋두리가 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이걸 말하려면 저게 생각나고 저걸 말하려면 이게 생각나서 어디서부터 가닥을 잡아야 할지… 정말 혼돈과 딜레마에 빠져 있는 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드리는 것 같아 민망하네요. 신부님이라면 어떤 얘기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앞으로 이 게시판을 자주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생각을 정리해서 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할 얘기들이 많을 것 같거든요. 신부님의 답장을 기다려 봅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글을 살려서 올려주셨으니, 개인 메일로 보낸 편지였지만, 저도 그냥 살려서 여기에 덧붙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개인 메일로 보내는 것과 이런 공개된 게시판과 올리는 것이 사뭇 다른 인상이 드는 군요. 뭐 어쩝니까? 이미 뱉어낸 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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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평화

지난 번에 게시판을 통해서 주신 글 잘 받아 읽었습니다. 그 이후 곧바로 어떤 회의에 2주일 가까이 참석해야 했기에 게시판에 답글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 참에 다시 찾아와 보니 글을 지우셨더군요.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해서 답장을 해야지 하는게 이렇게 늦어졌습니다. 짧게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님께서 하신 말씀의 대부분을 동감하고 있습니다. 특히 근본주의의 문제는 매우 상당한 도전으로 다가오는데, 제 자신이 근본주의를 매우 싫어하는데다가, 여러가지 경험을 통해서 그 폐해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는 종교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형태의 신념 체계와도 맞물려 돌아가기가 일쑤입니다.

성공회에 관련해서만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아무래도 성공회가 최고의 이상적인 교단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성공회는 그래서 스스로를 언젠가 사라져야 할 교단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일치가 이뤄지는 날, 이 분열을 극복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소망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그 벽을 허무는 순간을 위해서, 그 사라짐을 위해서 전력질주하는 것이 성공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품어왔으면서도 성공회가 내내 독자적인 교단을 고수해왔던 것은 다름아니라 성공회가 근본주의적 태도들과 대결해왔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 가톨릭이나, 퓨리탄 중심의 개신교 사고 방식은 성공회가 보기에 하나의 사고 방식으로 모든 것을 획일화하려는 태도로 보였고, 그것은 근본적 교리, 근본적 신앙이라는 “근본주의”의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이기에 이를 거부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본주의에는 혼란이 없습니다. 그러나 혼란없는 아주 깔끔한 이론은 실제로 삶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엉성하게 뒤얽혀 있는 것이 삶이고, 내 삶 자체에서도 모순은 이리저리 나를 괴롭히는 실정입니다. 사람들은 바로 그 모순과 당당히 대결하기 보다는, 누군가가 지어준 산뜻한 논리, 혹은 교리, 혹은 어떤 윽박지르는 듯한 신앙 체험을 약처방으로 삼아 그걸 의지하고 살아가기가 쉬운 법, 그래서 (부정적으로 보자면) 종교는 끊임없이 그런 약처방으로 지금까지 버텨오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이것이 종교의 전부는 아니지요.

성공회에 대한 한 생각… 이런 점에서 성공회는 다른 방법을 취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삶의 혼란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 하지만 우리는 다만 하느님을 향해서 길을 걷는 자일 뿐, 진리를 거머쥐고 있다고 자랑하지 않을 것… 다만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가 누구이든지 그들과 함께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며 지치지 않도록 길을 걸을 것…

사람은 지치기 마련인지라, 쉬고도 싶고, 자리에 틀어 앉아 안주하며 집을 짖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성공회에는 개신교의 어떤 모양이 드러나기도 하고, 로마 가톨릭의 어떤 양상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그 여정 가운데 하나이니, 앞서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리 쉴 터는 항상 필요하니까요. 다만 자리 틀고 앉아서 길 걷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비 걸며 털석 주저 앉으라며 가던 길을 포기하라고 권유하진 말았으면 하는 것이지요 ^^

아침에 일어난 상념으로, 편안하게 적어봤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7월 3, 2004 at 2:57 오후

교회의 분열과 일치 – 누구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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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님이 쓰신 글]

안녕하세요 .. 저는 가톨릭 신자 입니다

본론만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과연 이렇게 나누어진 교회의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 일까요?

여러가지 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희 교회에 교리에 반대?

한다는 근거야 다의적인 의미가 많이 있는 성경에서 찾아서 신학적으로 정립하면 되

는 것이지 않습니까?

여하튼 주님이 세우신 교회의 본질을 제대로 실천하는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예수님을 직접 체험했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을 조금이나마 더 간직하고 사도들과 여러 성인들의 가르침이 남아있는

있는 교회는 가톨릭(동방가톨릭 포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잘못 속에서도 가톨릭이 구원사업을 행 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성령의 은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분열되었습니다. 피를 흘렸습니다.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모습일까요?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모습일까요?

사도 바오로도 고린토 교회의 분열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두서없이 어설프게 한 말씀 드렸습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 주님의 평화

“가톨릭”님 안녕하세요?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역시 안타깝게 생각하는 그리스도교의 한 신앙인으로서 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생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분열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무엇보다 지난 세기 이후 교회 일치 운동에 가장 헌신적이었던 성공회는 이 아픔을 더욱 크고 깊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분열에 대한 진단의 시각 자체가 서로 다르면, 치유를 위한 처방 역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 속에서 얻는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 교회가 가장 역사적으로 사도적인 교회’이니 ‘이 교단’을 중심으로 일치가 전개되어야 한다든가, ‘이 교회가 가장 성경에 기반한 교회’이니 ‘이 교단’을 중심으로 되어야 한다는 등의 의견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 정교회, 성공회를 비롯한 여러 개신교회들 안에는 이런 자기 주장을 통해서 서로를 설득하려는 움직임이 여전합니다. 그러나 그 전개나 결과는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가톨릭’님께서 주장하시는 대로 로마 “가톨릭 교회(동방 가톨릭 포함)”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의견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오래된 주장입니다만, 정교회(동방교회 및 각 전통의 정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예수님을 직접 체험했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을 조금이나마 더 간직하고 사도들과 여러 성인들의 가르침이 남아 있는 교회”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를 그런 교회로 자신할 지 언정 로마 가톨릭 교회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종교개혁은 크게 보면 중세 서방교회 안에서의 자기 개혁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쉽게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종교개혁이란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어떤 특정한 교단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이 속해있던 서방교회 전체 자체 “안에서” 일어나, 성서의 권위를 새롭게 비추어 보고, 그에 따라 교회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살펴본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다양한 개신교 형성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전혀 분열되지 않은 ‘정통’ 교회라고 자처하는 동방 교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서방 교회 내의 자기 분열일 뿐입니다. 즉 로마 가톨릭 교회도 하나의 분열된 교회의 일원일 뿐인 것이지요.

교회가 분열하여 서로 싸우고 피를 흘렸던 부끄러운 역사는 자신을 중심으로 어떤 일치건 통합이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 속에서 싹텄습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들은 세속 정치 권력을 이용하고 거래를 했으며, 한 분이신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형제들을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도륙했던 것이지요. 즉 어떤 배타적 기준에 의한 일치라는 것이 이미 하나의 환상이거나, 동시에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깨달은 지 오래라는 사실입니다. 서방교회 전통 안에 있는 개신교회가 세월을 거듭해서 분열했던 이유들은 이런 ‘배타적 진리 소유’라는 입장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런 전철을 밟질 않길 바랍니다. 이미 로마 가톨릭 교회는 1960년대 초 바티칸 2차 공의회 이후 이런 배타성의 원리에 대한 반성을 제기하였고, 그 이후 지속적인 교회 일치 대화가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무엇보다도 서로를 통해서 복음의 진리, 교회 신앙의 전통을 풍요롭게 배우는 시기였습니다. 이미 1940년대에 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 측의 교회 일치 운동과 더불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런 포용성의 원칙을 제공한 것은 그리스도교 역사에 큰 축복으로 남아 있습니다.

님 께서 말씀하신 대로, 교회는 잘못을 통해서도 성령의 은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쉬지 않고 전개합니다. 그러나 그 성령의 은총을 로마 가톨릭 교회만이 독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자유롭고 넓으신 성령은 그리스도교회 전체의 분열이라는 아픔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내의 여러 신앙 전통 안에서 그 역사와 그 신앙인들과 그 현장의 삶을 통해서 내내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넓으신 성령님의 활동을 감지하면서, 교회의 분열과 그 아픔을 응시하는 일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해나가는 일은 늘 “내 탓이오” 하는 철저한 자기 반성을 통해서 더욱 깊어짐과 동시에 다른 이들과의 폭넓은 대화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회의 태도에 대해서만 짤막하게 덧붙이면 이렇습니다. 성공회는 교회 일치와 관련하여 “일치를 위해서 스스로 사라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 기꺼이 사라지길 다짐하는 교회”라는 신념을 그 신앙과 실천 속에서 발전시켜왔습니다. 이 때문에 성공회는 어떤 가능성에도 열려 있는 교회가 되기도 하고, 또한 이런 개방성 때문에 그 모호한 정체성에 대한 비판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회는 최소한 이러한 태도가 교회 일치에 진전을 가져오리라는 확신과 경험을 통해서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길도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중요한 하나의 길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 길 속에서 함께 만나서 이야기하고 걷고 어깨동무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길만이 옳다고, 이런 걸음자세만이 옳다고, 이런 여행 복장이 옳다고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종종 이런 자기 주장들은 ‘남을 제어하기 위한 내 신념’이었을 망정 성령님의 은총에 나를 맡기는 ‘투신의 신앙’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길 어느 모퉁이에서 다시 만나기를 희망하며,

주낙현 신부 합장

신부님의 글 정말 잘 읽었고 많이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일치라는 것 말은 쉽지만 서로 양보와 희생을 기본 전제의 바탕으로 삼아야 겠지요.

이것이 어려워서 지금도 이렇게 갈라진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렇고 신부님도 그렇고 자신의 교회에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신부님 말씀대로 교회가 누구를 중심으로 일치해야 되는가란 문제는 정말 많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동안은 무조건 저희 교회 중심으로 라는 생각만 앞섰던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그럼 신부님에 말씀을 제 주관으로 해석한다면

(게다가 종교개혁은 크게 보면 중세 서방교회 안에서의 자기 개혁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부님의 말씀 중에서

만약에 성공회가 잘못한점이 있어서 누군가 개혁이 필요하다고 교회를 나간다면
그것은 올바른 행동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감리교는 성공회에서 나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공회에서는 감리교를 자기개혁를 잘한 교회로 보시는 지요???

마 지막으로 교황 선출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의 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봅니다. 신부님이 앞서 글에서 성령의 작용이 어느 교회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황님에 대한 비판의 글은 남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결국 신부님의 성공회 중심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됩니다. 이 점에 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또 염치 없이 글을 올립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 되기를 기원하며 -엘리사- (제 본명 입니다.)

+ 주님의 평화

엘리사님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 답변과 다른 글에 대해 의견 주신 것 고맙습니다. 어떤 질문이든 함께 나눠보자는 초대한 것이니 엘리사님이 염치 없을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즐거움이기를 바랍니다.

이 미 많은 이야기를 위에서 했으니, 다시 질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제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교회 일치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종교개혁을 통한 분열이 하나의 자기 개혁 운동이라고 할 때 성공회와 감리교의 분열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는 블로그에 올렸던 새로운 교황에 관한 글이 “성공회 중심의 비판”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제가 답변에서 했던 말과 모순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첫째로, 성공회와 감리교의 분열에 관한 것입니다. 앞서 답변에서 종교개혁에 대한 제 나름의 표현을 다시 언급하자면, 종교개혁이란 세계 그리스도교의 견지에서 보았을 때 “서방 교회 내 자기 개혁 운동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엘리사님이 감리교에 빗대어 말씀하신 “자기 개혁이 잘된 교회”를 뜻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디에서도 종교개혁이 “자기 개혁이 잘된 교회”라는 의미에서 그 분열을 정당화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런 생각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 평가는 잠시 접어두고 그것이 하나의 필연적인 “산물”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회 역사 안에서 일어났던 특정 시기의 어떤 신앙 쇄신 운동이 기존의 전통 안에서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감리교가 독립적인 교단으로 발전해 나간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반성이 필요합니다. 그 하나는 이런 자기 개혁의 동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당시 교회의 폐쇄성에 대한 반성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개혁 운동의 주창자가 끝까지 성공회 안에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의 추종자들이 교단적인 분리를 택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성공회로서는 당시의 폐쇄성에 대해서 반성해야 할 것이고, 감리교로서는 분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느냐는 반성이 필요합니다. 즉 반성은 서로에게 요구하는 것이기 이전에 먼저 자기 안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그 때에 건설적인 대화가 진행될 여지가 마련됩니다. 결국 세계 각국으로 펼쳐진 감리교와는 달리 정작 영국 감리교는 최근 영국 성공회와 실질적인 교단 통합과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그 시점을 두고 “올바름”을 따지고 들었다면 요원한 일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더 욱이 현재의 우리는 과거 분열 시대의 당사자들과는 다릅니다. 그 분열과 분리의 역사적, 신학적 계기가 동기가 어떠했든 간에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전통을 유지하면서 살아왔고 그 전통의 영향권 아래서 자신의 신앙을 발전시켜왔습니다. 다만 그 발전 속에서 복음과 신앙의 전통 속에서 우리 신앙을 재발견하며, 우리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반성하고 새로운 교회와 선교의 비전을 찾아가며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교회의 일치는 우리가 이미 살아가고 있는 이 전통 안에서 복음을 통한 이러한 개혁의 길 가운데 만나야 할 어떤 것이지, 과거 어느 시점을 중심으로 한 환원 운동이 아닙니다.

교회의 분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열에는 건설적인 분열이 있는가 하면, 파괴적인 분열이 있습니다. 건설적인 분열과 분리는 교회의 일치를 위협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다양성과 복음의 보편성을 아우르게 하여, 결국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파괴적인 분열은 서로에 대한 반목과 질시를 낳고 결국 대결과 폭력을 동반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훼손할 것입니다.

둘째로, 최근 교황 선출과 관련된 글에 대해서는 짧게 답변하겠습니다. 우선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시라고 권유하는 수 밖에 없지만, 좀더 덧붙인다면 이렇습니다. 그것은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의 신앙인으로서 바라본 하나의 “상념”이었을 뿐입니다. 다만 그 상념의 근거들을 여러 사람들의 평가 – 제가 공부하고 있는 미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 나오고 있는 – 와 더불어 확인하고, 종국에는 어떤 희망을 가져보려는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많은 미국 가톨릭 신자들의 비판과 실망감을 보면서, 다른 교단의 성직자 한 개인으로서 느끼는 아쉬움의 표출 정도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글 말미에 언급한 것처럼, 그분의 새로운 이름대로 세계와 교회에 “축복”이길 희망할 뿐입니다.

평화를 빌며

주낙현 신부 합장

신부님 이번 글도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인터넷으로 나마 허물없이 대화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교황님에 대한 신부님의 글을 보고 맞는 말씀이지만 제 생각과 다른 부분을 이야기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보수라는 의미의 약간은? 부정적인 어조 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판치는 시대로 옛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의견이 팽배한 세상 입니다. 이 점은 신부님께서도 충분히 동의 하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진리는 지켜져야 합니다. 진리가 무너질때 세상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진리보다 행위가 앞설 때 역사는 말해 줍니다. 그 결과는 바로 마르크스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켜져야 할 것은 지켜야 합니다. 단순히 개방 자유. 인간 존중 이라는 논리 아래 지켜야 할 것을 버리는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이겠습니까?
신부님의 의견이 물론 아니시겠지만 성공회의 동성애자에 대한 주교 서품 같은 것은 자유의 미명아래 해서는 안될 것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반성하고 새로운 교회와 선교의 비전을 찾아가며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라는 신부님의 글은 모순 됩니다.
복음을 강조하면서도 개혁과 진보라는 미명아래 복음 정신에 어긋나는 것들을 주장하는 논리말입니다.

또 한가지 질문들입니다. 성공회는 성찬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임재설을 교리로 가지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임재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즉 성체를 어떻게 바라보시는 지를 알고 싶습니다. 분명 가톨릭의 성체이해가 왜곡되어 있다고 하시겠지만 성경에 분명히 그리스도에 몸과 피를 나누어 마셨다는 초대교회에 증언이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한 의견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공회는 가톨릭과의 유대성에 따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3단계로 나누어 진다고 하는데 이점에 대해서도 답변 부탁드립니다.
하이 class 로우 class 라는 표현 말입니다.

일치(Unitas)의 출발은 대화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신부님과 대화 할 수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주님의 평화

엘리사님과 이야기가 길어지는군요(^^). 이곳에만 시간을 쓸 수는 없는 처지이니 최선을 다하되 되도록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일 치의 출발을 대화”로 생각하게 되었다니 기쁩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 속에서는 공통점도 발견하게 되지만 극명한 차이점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차이점들을 이미 엘리사님이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선 이러한 차이점은 로마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천양지차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우선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제가 엘리사님께 우선 바라는 게 있다면 이렇습니다. 어떤 분명한 기준을 두고 분명한 견해를 밝히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 분명한 기준에 대한 성찰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성찰이 충분하지 않으면 필요 없는 오해가 줄기차게 생겨나고, 결국 자신을 어느 시점 안에 가두고 다른 것을 보지 않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예를 들어봅니다. 저는 “완고한 보수주의자”라는 제한된 표현 속에서, 그리고 그런 표현의 선택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 속에서 나름의 생각을 펼쳐낸 것이지, 엘리사님께서 지적하는 것처럼 “보수”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지적들은 내내 엘리사님이 가진 선입견 안에서 확대해석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견해나 “진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표현들이 그 예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태도, 그리고 “세상이 무너지는” 증거로 제시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평가 자체가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다양하다는 점을 먼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엘리사님은 제 말을 인용한 “우리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반성하고 새로운 교회와 선교의 비전을 찾아가며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라는 말을 어떤 모순 어법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에는 “복음”과 “진리”를 엘리사님이 마음에 두고 있는 어떤 특정 교리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습니다. 교리는 “복음”과 “진리”를 드러내고 소통하기 위한 제한적인 방법이요 표현에 불과합니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으로 교리는 “복음”과 “진리”를 막는 장애물로 등장하기도 했고, 그것을 훼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오류에서 어떤 교회 전통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또 그런 이유에서 교리는 시대와 상황 속에서 변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리가 변화와 요구와 도전을 용기 있게 받아들일 때 그것은 또한 복음을 드러내는 수단으로서 유용성을 항상 유지하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과 교리의 차이이자, 그 관계이기도 합니다. 이 상관관계의 긴밀한 역동성을 식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이기도 하며, 또한 우리의 기도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런 식별을 통해서 교회는 교리의 변경을 결정하기도 하고, 잘못된 교리에 근거했던 교회의 생활과 실천을 바꾸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자기 개혁입니다. 이것이 또한 맹목적인 세속적 지배 이데올로기와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른 점입니다.

이런 생각 끝에 저는, 엘리사님이 그리스도교 전통, 최소한 로마 가톨릭 전통 자체의 풍부한 자산들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많은 내적인 대화를 열어가길 권유합니다. 그리고 대화가 깊어가는 과정 속에서 다른 여러 동료 신앙인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엘리사님의 교회 성직자와의 대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전통의 신앙인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전통에 대한 이해가 폭넓고 깊어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성찬례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는 이 게시판의 다른 곳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화체설”과 “성찬”과 같은 검색어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질문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성공회 내의 어떤 성향에 대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가톨릭과의 유대성”이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기 어렵고, 예전적인 성향과 신학적인 성향에 따라 “고교회” “광교회” 그리고 “저교회”라는 표현으로 성공회 내의 다양한 흐름을 설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내용 역시 검색어를 통해서 먼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 삶과 죽음과 부활로 보여주신 복음의 길을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만나게 될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그 잡히질 않고 내내 걸어야 할 것을 요구하는 복음의 목소리가 엘리사님을 늘 이끌어 주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넓고 크신 은총이 함께 할 것입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4월 23, 2004 at 3:22 오후

천주교에서 성공회로 옮긴 뒤 천주교 영성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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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로 옮기게 되면…
가톨릭 교회에서 영성체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 주님의 평화

좋은 질문 주셨습니다. 질문의 내용을 다시 짐작하자면 천주교 신자가 성공회로 교단을 이적한 후에는 천주교 안에서 다시 영성체를 할 수 없는 것이냐는 물음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물음은 한국 천주교에 문의하시면 분명한 해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제가 알기로는 “영성체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답변일 것입니다. 천주교 교회법은 “근본적으로” 정교회와 성공회 안에서 천주교 신자가 되는 영성체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천주교의 교회법은 부득이한 경우에 천주교 신자가 성공회나 정교회에서 영성체를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경우의 상존 범위를 매우 제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의식적으로 교단을 이적한 상태에서 두 교회 안에서 동시에 영성체를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공회의 입장은 다릅니다. 성공회는 적법하게 세례받은 모든 신자들에게 영성체를 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서 교구마다, 그리고 성직자마다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제 의견은 최소한 세례받은 모든 신자들에게 영성체를 개방하는 것이 교회 일치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성공회의 태도이고,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은 천주교 신자, 성공회 신자, 개신교 신자인 것을 넘어서서, 모두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외국에 나와서 경험하는 것은 천주교의 교회법이 실행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공부하는 미국의 가톨릭 신학교들이나 몇몇 교회는 이런 교회법을 공공연히 무시하고 그리스도교 신자이면 모두 영성체에 환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법적인 문제와 현대 신학적인 비판과 사목적인 현실이 혼재한 상황인 것이지요.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복된 사순절기에,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3월 13, 2004 at 2:32 오후

천주교와 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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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이 천주교인을 욕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물론 천주교도 그렇고 개신교목사에게 물어보면 천주교나 성공회나 다 마리아만을 믿는종교라고하고 거기에는 구원이 없다는 싸가지(?)없는 말을 합니다.

보수적이고 배타적인것은 오늘날 한국가톨릭교회가 고쳐야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유독 개신교인들은 그것이 훨씬심한것 같습니다.
원인이 뭘까요??

[강형석님의 답변]

제가 짦은 지식으로 이야기 하면 교회교육이 문제가 아닐까?….생각합니다. 천주교가 마리아를 믿는다라고 하는대 그런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공경한다고 할까나요….그리고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린다고 생각하는대…

마리아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거지요.. 왜 우리도 살아있는 사람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하듯이요… – 성공회도 이런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 죽은사람과의 통공이라고 표현하든가….문제는 교인의 초점이 그리스도 보다는 마리아에게 맞추어서 기도를 한다는 점이 문제가 되는 거지요…-성인공경도 이런식이죠-

성공회는 뭐 수녀님 빼고는 묵주기도를 거의 안하고 마리아에게 그런 기도 하는 삶도 없다 보니…..거의 있는둥 마는둥…부활절에나 좀 하나….

그리고 마리아를 경배한다고들 하는대…공경한다는 표현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천주교가 드리는 훔숭하는 것은 그리스도 이지요…

좀…교회가 오래되어서 미신화되어서 천주교 신자들 중 많은수가 “예수의 어머니께 기도하면 더 잘들어 주지 않겠느냐?”면서 마리아 열풍이 불었다고 보면 될까요….

그러다보니 천주교 교회중 어느교회는 십자가 보다. 마리아상이 성당 제대에 크게 올려지기도 하는 사태가 벌어지더군요…
이런 일을 보고 개신교가 가만히 안있는 거지요..어처구니가 없는것은…개신교는 이런 불쌍한 이단을 구재한답시고 천주교인을 교회로 끌어오는 법에 대한 책자까지 나와있다는 사실이지요.

종교계혁을 단행한 루터나 칼뱅이 교회의 분리를 주장한것이 아니라 개혁을 요구했다는 점을 이저 먹은 것이지요..비록 해어지기는 했으나 모든 교회는 하느님은 몸된교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주님의 평화

천주교와 개신교의 갈등은 여러 원인이 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요.

어쨌든 이에 관해서는 이 게시판 아래에
“유진”님께서 올리신 질문과 그에 대한 제 답변을 참조하셨으면 합니다.

또 검색 명령어를 이용해서,
“마리아”에 관한 교회 간의 논란 등에 대해서도 알아보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

[김가브리엘님의 댓글]

+샬롬!

이해가 갑니다. 그것이 바로 교단이기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주교의 이단성은 이미 알다시피 1.교황무오설 2. 마리아숭배설등으로 요약할 수 있고 이에 항거해 개혁한 개신교단은 1. 돈 2. 섹스 3.권력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그러면서 너는 뭐를 믿어 이단이네 너는 뭐를 잘못해 이단이네라고 상대를 비방할 뿐입니다. 그곳에 내 탓이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상대방 잘못만 늘어 놓습니다.

이게 한국 교회 교인(천주교+개신교)들이 교회에서 잘못 배운데서 나온 이기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이기주의로 그리고 국가이기주의로 빠져가고 있습니다. 종말은 얼마 남지않았다는 것을 이 현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느 교단을 믿던 예수를 믿어 죄를 자백하고 성령을 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어 가는 사람은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평안하십시요.

[형제님의 댓글]

+찬미예수님!

이 문제에 대해서 오래간 생각해온 사람으로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천주교에도 잘못이 있다면 개신교에도 있고
천주교가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교회라면 개신교도 그러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쩌면 상호보완적이기까지 합니다.

전혀 무관해보이고 서로 싸우기도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느냐구요?
우리는 티격태격 하지만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누가 특별히 더 옳으냐 누가 덜 옳으냐 하는 문제는
그야말로 도토리 키재기 같아 보일 것 같습니다.

두 교회가 상호충돌하는 부분들은 광범위한데
사실 그런 논쟁들의 정확한 답을 다 아시는 분은 하느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개신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 이전까지의 구원 사역이
로마가톨릭교회를 통해 이루어져왔음을 인정하고
초대교회 이후로부터 16세기에 이르르기 까지 그리스도교회가
소멸되거나 붕괴하지 않고 나름의 적응과정을 통해
전 유럽의 ‘국교’가 되었갔다는 사실, 그런 과정에서
인간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오류도 있을 수 있고
부정부패나 일부 교리의 변천도 있을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개신교회도, 특히 한국개신교회도 한국선교100주년을 넘기면서
얼마나 다르게 변화되어 왔는가를 생각해본다면
AD33년 이후로 AD1517년에 이르기까지 로마가톨릭교회가 성립하고
세계종교가 되기까지 변화된 역사와 전통을 충분히 이해해야 합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교황을 정점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교황이나 교황청은 이제 중세처럼 부패하거나 타락하지도 않았고
교회의 분열을 중재하고 교회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며
그 부분에 있어서는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한국개신교회가
잘 음미해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교황제도 자체가 꼭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교황제도의 성립에 대해서는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인 한스 큉이 쓴 ‘가톨릭교회'(을유)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종교간 대화’ 및 교회일치 차원에서
개신교와 여러 노력을 하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 교황 요한바오로2세의 강경한 태도로
그 방향성이 표류하고 있습니다.

아마 로마가톨릭교회의 근본입장은 여전히
개신교회는 ‘돌아와야할 형제교회’라는 입장인 것 같습니다.
즉 개신교회를 통해 주님이 역사하신 부분들은 거의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로마가톨릭교회는 제가 쓰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교’의 한 부분으로서 로마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회이고
그 외에도 그리스(러시아)정교회가 있고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을 주축으로 하는
개신교회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로마가톨릭교회’만’이 그리스도교회의 전체라고 생각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파문하고 갈라져 나갔던 동방그리스도교회에는
로마교회가 초대교회의 4대 교회 중 단 하나일 뿐이었으며
그 나머지 3대 교회와 사도들이 열심히 일군 소아시아의 여러교회들도
모두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역사적으로 로마교회는 스스로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동방교회가 이슬람세력과 중앙집권화되지 못한 국가들 사이에서
표류한 관계로 그 교세가 무너진 것임을 기억해야 하고
로마교회는 애초에 초대교회의 원산인 예루살렘과 소아시아 지역에서도
꽤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시작하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로마교회는 많은 위기 속에서도
교황제도의 수립을 통해 중세에는 교황국가까지 이룩하면서
많은 노력을 다해왔음을, 정신적인 세계교회의 지주이며
식민제국 시대를 거치면서 전세계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데에도
많은 선교사들과 순교자들을 내었음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
높아지기보다 낮아지시려 했고 결국 십자가를 택하신 주님에 비해
강대한 권력, 넓은 영토, 전쟁과 살육도 마다않았던 방법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로마교회가 반성해야 할 부분인 것입니다.

한국천주교회는
한국개신교회 제 교단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종교간 대화’라는 이름으로 불교계와 보조를 맞추었다면
그에 비해 ‘폐쇄적, 배타적’이다 비난받는 형제교회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천주교회의 훌륭한 장점들을 함께 하여 사회의 빛을 더욱 크게 비추고자
노력해야 했을 것입니다. 물론 개신교회가 워낙 교단이 많아
‘하나의 교회’에 익숙한 천주교로서는 대화하거나 연합사역을 이루기가
영 힘들다 할지라도 서로 배워야 할 점들을 먼저 보려고 한다면
‘일치’는 어려워도 ‘연합’은 좀더 쉬우리라 믿습니다.

특히 악명높았던 마녀사냥이나 종교재판,
신앙의 이름으로 행했던 ‘성바르톨로뮤 대학살’등, 역사가 긴 만큼
지었던 실수도 많았음을 주님 앞에 통회하며 가슴 아파한다면
모든 것이 좀더 쉬워지지 않을까요.

이러한 우리의 구구절절한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당신의 몸된 교회들을 사랑하셔서
오늘도 우리를 용서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를 사랑하시고 칭찬하실 부분들도 살펴보면 많을 겁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천년의 머리에 들어선 우리는
주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의 싸움을 마무리 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일에 또 다시 천년이 걸린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서로 다른 것을 찾아내려 하기보다 서로 비교하기보다
서로 같은 모습을 찾는다면, 천주교와 개신교 간에 찾을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더구나 한국교회는 유럽에서와 달리
서로 전쟁까지 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세계교회의 모범이 될 만한 선한 것이 충분히 나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은 세상,
같이 노력해 봅시다…

평화를 기다리는 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Written by skhfaq

9월 11, 2003 at 12:57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