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an Korean Anglican FAQ blog

Posts Tagged ‘종교개혁

교회의 분열과 일치 – 누구를 중심으로?

leave a comment »

[가톨릭님이 쓰신 글]

안녕하세요 .. 저는 가톨릭 신자 입니다

본론만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과연 이렇게 나누어진 교회의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 일까요?

여러가지 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희 교회에 교리에 반대?

한다는 근거야 다의적인 의미가 많이 있는 성경에서 찾아서 신학적으로 정립하면 되

는 것이지 않습니까?

여하튼 주님이 세우신 교회의 본질을 제대로 실천하는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예수님을 직접 체험했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을 조금이나마 더 간직하고 사도들과 여러 성인들의 가르침이 남아있는

있는 교회는 가톨릭(동방가톨릭 포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잘못 속에서도 가톨릭이 구원사업을 행 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성령의 은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분열되었습니다. 피를 흘렸습니다.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모습일까요?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모습일까요?

사도 바오로도 고린토 교회의 분열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두서없이 어설프게 한 말씀 드렸습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 주님의 평화

“가톨릭”님 안녕하세요?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역시 안타깝게 생각하는 그리스도교의 한 신앙인으로서 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생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분열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무엇보다 지난 세기 이후 교회 일치 운동에 가장 헌신적이었던 성공회는 이 아픔을 더욱 크고 깊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분열에 대한 진단의 시각 자체가 서로 다르면, 치유를 위한 처방 역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 속에서 얻는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 교회가 가장 역사적으로 사도적인 교회’이니 ‘이 교단’을 중심으로 일치가 전개되어야 한다든가, ‘이 교회가 가장 성경에 기반한 교회’이니 ‘이 교단’을 중심으로 되어야 한다는 등의 의견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 정교회, 성공회를 비롯한 여러 개신교회들 안에는 이런 자기 주장을 통해서 서로를 설득하려는 움직임이 여전합니다. 그러나 그 전개나 결과는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가톨릭’님께서 주장하시는 대로 로마 “가톨릭 교회(동방 가톨릭 포함)”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의견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오래된 주장입니다만, 정교회(동방교회 및 각 전통의 정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예수님을 직접 체험했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을 조금이나마 더 간직하고 사도들과 여러 성인들의 가르침이 남아 있는 교회”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를 그런 교회로 자신할 지 언정 로마 가톨릭 교회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종교개혁은 크게 보면 중세 서방교회 안에서의 자기 개혁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쉽게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종교개혁이란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어떤 특정한 교단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이 속해있던 서방교회 전체 자체 “안에서” 일어나, 성서의 권위를 새롭게 비추어 보고, 그에 따라 교회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살펴본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다양한 개신교 형성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전혀 분열되지 않은 ‘정통’ 교회라고 자처하는 동방 교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서방 교회 내의 자기 분열일 뿐입니다. 즉 로마 가톨릭 교회도 하나의 분열된 교회의 일원일 뿐인 것이지요.

교회가 분열하여 서로 싸우고 피를 흘렸던 부끄러운 역사는 자신을 중심으로 어떤 일치건 통합이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 속에서 싹텄습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들은 세속 정치 권력을 이용하고 거래를 했으며, 한 분이신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형제들을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도륙했던 것이지요. 즉 어떤 배타적 기준에 의한 일치라는 것이 이미 하나의 환상이거나, 동시에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깨달은 지 오래라는 사실입니다. 서방교회 전통 안에 있는 개신교회가 세월을 거듭해서 분열했던 이유들은 이런 ‘배타적 진리 소유’라는 입장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런 전철을 밟질 않길 바랍니다. 이미 로마 가톨릭 교회는 1960년대 초 바티칸 2차 공의회 이후 이런 배타성의 원리에 대한 반성을 제기하였고, 그 이후 지속적인 교회 일치 대화가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무엇보다도 서로를 통해서 복음의 진리, 교회 신앙의 전통을 풍요롭게 배우는 시기였습니다. 이미 1940년대에 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 측의 교회 일치 운동과 더불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런 포용성의 원칙을 제공한 것은 그리스도교 역사에 큰 축복으로 남아 있습니다.

님 께서 말씀하신 대로, 교회는 잘못을 통해서도 성령의 은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쉬지 않고 전개합니다. 그러나 그 성령의 은총을 로마 가톨릭 교회만이 독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자유롭고 넓으신 성령은 그리스도교회 전체의 분열이라는 아픔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내의 여러 신앙 전통 안에서 그 역사와 그 신앙인들과 그 현장의 삶을 통해서 내내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넓으신 성령님의 활동을 감지하면서, 교회의 분열과 그 아픔을 응시하는 일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해나가는 일은 늘 “내 탓이오” 하는 철저한 자기 반성을 통해서 더욱 깊어짐과 동시에 다른 이들과의 폭넓은 대화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회의 태도에 대해서만 짤막하게 덧붙이면 이렇습니다. 성공회는 교회 일치와 관련하여 “일치를 위해서 스스로 사라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 기꺼이 사라지길 다짐하는 교회”라는 신념을 그 신앙과 실천 속에서 발전시켜왔습니다. 이 때문에 성공회는 어떤 가능성에도 열려 있는 교회가 되기도 하고, 또한 이런 개방성 때문에 그 모호한 정체성에 대한 비판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회는 최소한 이러한 태도가 교회 일치에 진전을 가져오리라는 확신과 경험을 통해서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길도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중요한 하나의 길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 길 속에서 함께 만나서 이야기하고 걷고 어깨동무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길만이 옳다고, 이런 걸음자세만이 옳다고, 이런 여행 복장이 옳다고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종종 이런 자기 주장들은 ‘남을 제어하기 위한 내 신념’이었을 망정 성령님의 은총에 나를 맡기는 ‘투신의 신앙’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길 어느 모퉁이에서 다시 만나기를 희망하며,

주낙현 신부 합장

신부님의 글 정말 잘 읽었고 많이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일치라는 것 말은 쉽지만 서로 양보와 희생을 기본 전제의 바탕으로 삼아야 겠지요.

이것이 어려워서 지금도 이렇게 갈라진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렇고 신부님도 그렇고 자신의 교회에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신부님 말씀대로 교회가 누구를 중심으로 일치해야 되는가란 문제는 정말 많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동안은 무조건 저희 교회 중심으로 라는 생각만 앞섰던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그럼 신부님에 말씀을 제 주관으로 해석한다면

(게다가 종교개혁은 크게 보면 중세 서방교회 안에서의 자기 개혁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부님의 말씀 중에서

만약에 성공회가 잘못한점이 있어서 누군가 개혁이 필요하다고 교회를 나간다면
그것은 올바른 행동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감리교는 성공회에서 나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공회에서는 감리교를 자기개혁를 잘한 교회로 보시는 지요???

마 지막으로 교황 선출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의 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봅니다. 신부님이 앞서 글에서 성령의 작용이 어느 교회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황님에 대한 비판의 글은 남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결국 신부님의 성공회 중심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됩니다. 이 점에 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또 염치 없이 글을 올립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 되기를 기원하며 -엘리사- (제 본명 입니다.)

+ 주님의 평화

엘리사님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 답변과 다른 글에 대해 의견 주신 것 고맙습니다. 어떤 질문이든 함께 나눠보자는 초대한 것이니 엘리사님이 염치 없을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즐거움이기를 바랍니다.

이 미 많은 이야기를 위에서 했으니, 다시 질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제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교회 일치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종교개혁을 통한 분열이 하나의 자기 개혁 운동이라고 할 때 성공회와 감리교의 분열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는 블로그에 올렸던 새로운 교황에 관한 글이 “성공회 중심의 비판”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제가 답변에서 했던 말과 모순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첫째로, 성공회와 감리교의 분열에 관한 것입니다. 앞서 답변에서 종교개혁에 대한 제 나름의 표현을 다시 언급하자면, 종교개혁이란 세계 그리스도교의 견지에서 보았을 때 “서방 교회 내 자기 개혁 운동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엘리사님이 감리교에 빗대어 말씀하신 “자기 개혁이 잘된 교회”를 뜻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디에서도 종교개혁이 “자기 개혁이 잘된 교회”라는 의미에서 그 분열을 정당화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런 생각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 평가는 잠시 접어두고 그것이 하나의 필연적인 “산물”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회 역사 안에서 일어났던 특정 시기의 어떤 신앙 쇄신 운동이 기존의 전통 안에서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감리교가 독립적인 교단으로 발전해 나간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반성이 필요합니다. 그 하나는 이런 자기 개혁의 동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당시 교회의 폐쇄성에 대한 반성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개혁 운동의 주창자가 끝까지 성공회 안에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의 추종자들이 교단적인 분리를 택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성공회로서는 당시의 폐쇄성에 대해서 반성해야 할 것이고, 감리교로서는 분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느냐는 반성이 필요합니다. 즉 반성은 서로에게 요구하는 것이기 이전에 먼저 자기 안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그 때에 건설적인 대화가 진행될 여지가 마련됩니다. 결국 세계 각국으로 펼쳐진 감리교와는 달리 정작 영국 감리교는 최근 영국 성공회와 실질적인 교단 통합과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그 시점을 두고 “올바름”을 따지고 들었다면 요원한 일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더 욱이 현재의 우리는 과거 분열 시대의 당사자들과는 다릅니다. 그 분열과 분리의 역사적, 신학적 계기가 동기가 어떠했든 간에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전통을 유지하면서 살아왔고 그 전통의 영향권 아래서 자신의 신앙을 발전시켜왔습니다. 다만 그 발전 속에서 복음과 신앙의 전통 속에서 우리 신앙을 재발견하며, 우리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반성하고 새로운 교회와 선교의 비전을 찾아가며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교회의 일치는 우리가 이미 살아가고 있는 이 전통 안에서 복음을 통한 이러한 개혁의 길 가운데 만나야 할 어떤 것이지, 과거 어느 시점을 중심으로 한 환원 운동이 아닙니다.

교회의 분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열에는 건설적인 분열이 있는가 하면, 파괴적인 분열이 있습니다. 건설적인 분열과 분리는 교회의 일치를 위협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다양성과 복음의 보편성을 아우르게 하여, 결국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파괴적인 분열은 서로에 대한 반목과 질시를 낳고 결국 대결과 폭력을 동반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훼손할 것입니다.

둘째로, 최근 교황 선출과 관련된 글에 대해서는 짧게 답변하겠습니다. 우선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시라고 권유하는 수 밖에 없지만, 좀더 덧붙인다면 이렇습니다. 그것은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의 신앙인으로서 바라본 하나의 “상념”이었을 뿐입니다. 다만 그 상념의 근거들을 여러 사람들의 평가 – 제가 공부하고 있는 미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 나오고 있는 – 와 더불어 확인하고, 종국에는 어떤 희망을 가져보려는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많은 미국 가톨릭 신자들의 비판과 실망감을 보면서, 다른 교단의 성직자 한 개인으로서 느끼는 아쉬움의 표출 정도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글 말미에 언급한 것처럼, 그분의 새로운 이름대로 세계와 교회에 “축복”이길 희망할 뿐입니다.

평화를 빌며

주낙현 신부 합장

신부님 이번 글도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인터넷으로 나마 허물없이 대화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교황님에 대한 신부님의 글을 보고 맞는 말씀이지만 제 생각과 다른 부분을 이야기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보수라는 의미의 약간은? 부정적인 어조 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판치는 시대로 옛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의견이 팽배한 세상 입니다. 이 점은 신부님께서도 충분히 동의 하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진리는 지켜져야 합니다. 진리가 무너질때 세상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진리보다 행위가 앞설 때 역사는 말해 줍니다. 그 결과는 바로 마르크스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켜져야 할 것은 지켜야 합니다. 단순히 개방 자유. 인간 존중 이라는 논리 아래 지켜야 할 것을 버리는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이겠습니까?
신부님의 의견이 물론 아니시겠지만 성공회의 동성애자에 대한 주교 서품 같은 것은 자유의 미명아래 해서는 안될 것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반성하고 새로운 교회와 선교의 비전을 찾아가며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라는 신부님의 글은 모순 됩니다.
복음을 강조하면서도 개혁과 진보라는 미명아래 복음 정신에 어긋나는 것들을 주장하는 논리말입니다.

또 한가지 질문들입니다. 성공회는 성찬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임재설을 교리로 가지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임재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즉 성체를 어떻게 바라보시는 지를 알고 싶습니다. 분명 가톨릭의 성체이해가 왜곡되어 있다고 하시겠지만 성경에 분명히 그리스도에 몸과 피를 나누어 마셨다는 초대교회에 증언이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한 의견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공회는 가톨릭과의 유대성에 따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3단계로 나누어 진다고 하는데 이점에 대해서도 답변 부탁드립니다.
하이 class 로우 class 라는 표현 말입니다.

일치(Unitas)의 출발은 대화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신부님과 대화 할 수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주님의 평화

엘리사님과 이야기가 길어지는군요(^^). 이곳에만 시간을 쓸 수는 없는 처지이니 최선을 다하되 되도록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일 치의 출발을 대화”로 생각하게 되었다니 기쁩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 속에서는 공통점도 발견하게 되지만 극명한 차이점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차이점들을 이미 엘리사님이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선 이러한 차이점은 로마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천양지차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우선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제가 엘리사님께 우선 바라는 게 있다면 이렇습니다. 어떤 분명한 기준을 두고 분명한 견해를 밝히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 분명한 기준에 대한 성찰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성찰이 충분하지 않으면 필요 없는 오해가 줄기차게 생겨나고, 결국 자신을 어느 시점 안에 가두고 다른 것을 보지 않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예를 들어봅니다. 저는 “완고한 보수주의자”라는 제한된 표현 속에서, 그리고 그런 표현의 선택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 속에서 나름의 생각을 펼쳐낸 것이지, 엘리사님께서 지적하는 것처럼 “보수”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지적들은 내내 엘리사님이 가진 선입견 안에서 확대해석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견해나 “진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표현들이 그 예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태도, 그리고 “세상이 무너지는” 증거로 제시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평가 자체가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다양하다는 점을 먼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엘리사님은 제 말을 인용한 “우리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반성하고 새로운 교회와 선교의 비전을 찾아가며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라는 말을 어떤 모순 어법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에는 “복음”과 “진리”를 엘리사님이 마음에 두고 있는 어떤 특정 교리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습니다. 교리는 “복음”과 “진리”를 드러내고 소통하기 위한 제한적인 방법이요 표현에 불과합니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으로 교리는 “복음”과 “진리”를 막는 장애물로 등장하기도 했고, 그것을 훼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오류에서 어떤 교회 전통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또 그런 이유에서 교리는 시대와 상황 속에서 변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리가 변화와 요구와 도전을 용기 있게 받아들일 때 그것은 또한 복음을 드러내는 수단으로서 유용성을 항상 유지하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과 교리의 차이이자, 그 관계이기도 합니다. 이 상관관계의 긴밀한 역동성을 식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이기도 하며, 또한 우리의 기도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런 식별을 통해서 교회는 교리의 변경을 결정하기도 하고, 잘못된 교리에 근거했던 교회의 생활과 실천을 바꾸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자기 개혁입니다. 이것이 또한 맹목적인 세속적 지배 이데올로기와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른 점입니다.

이런 생각 끝에 저는, 엘리사님이 그리스도교 전통, 최소한 로마 가톨릭 전통 자체의 풍부한 자산들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많은 내적인 대화를 열어가길 권유합니다. 그리고 대화가 깊어가는 과정 속에서 다른 여러 동료 신앙인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엘리사님의 교회 성직자와의 대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전통의 신앙인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전통에 대한 이해가 폭넓고 깊어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성찬례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는 이 게시판의 다른 곳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화체설”과 “성찬”과 같은 검색어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질문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성공회 내의 어떤 성향에 대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가톨릭과의 유대성”이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기 어렵고, 예전적인 성향과 신학적인 성향에 따라 “고교회” “광교회” 그리고 “저교회”라는 표현으로 성공회 내의 다양한 흐름을 설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내용 역시 검색어를 통해서 먼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 삶과 죽음과 부활로 보여주신 복음의 길을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만나게 될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그 잡히질 않고 내내 걸어야 할 것을 요구하는 복음의 목소리가 엘리사님을 늘 이끌어 주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넓고 크신 은총이 함께 할 것입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4월 23, 2004 at 3:22 오후

성공회 형성 이야기

leave a comment »

안녕하세요?? 신부님..
저는 천주교에 다니고 있고
이 곳을 찾은 이유는 레포트& 개인적인 궁금증때문입니다
저는 종교를 별로 구분하는 타입이 아니라
성공회도 좋고 천주교도 좋고 불교 .. 그밖의 모든 종교를 다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니 궁금한 점도 많은것 같아요
게다가 종교에 구분두는 친구들과 이야기 하다보면
생각이 서로 달라서인지 의견대립만 심해지고
제가 말이 막힌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천주교와 성공회는 거의 비슷한 것 같아서
본래에는 같은 종교였을 것 같은데
왜 갈라졌는지 알고 싶습니다
메일로 보내 주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부탁 드립니다.

+ 주님의 평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형제 자매를 만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종교 간의 대화는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종교는 “신념 체계”와 긴밀한 관계를 이루어서
한 사람이 자신 생활 원칙을 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쉽게 양보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동감”보다는 “대립”으로 나가가기 일쑤입니다.

성공회와 천주교의 차이점이라면, 이 질문 답변란에서 여러 모양으로 다루었습니다.
밑에 있는 게시물들을 찾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간단히 다음과 같은 정도로 다시 언급할 수 있겠습니다.

우선 성공회나 천주교나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진정한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의 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교파로서 성공회의 태동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타락상과 관련이 깊습니다.

1500년경 로마 교회에 대한 신앙적 그리고 신학적 반성을 통해서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형성된 교회가 루터교회, 개혁교회(장로교회), 성공회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공회 역시 독립적인 교회로 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신학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도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이후 성공회는 다른 개신교파와는 달리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전통을 보존하려 애썼으며, 그 결과 현재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외견상 흡사한 점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회는 로마 가톨릭과는 교리의 내용이나 교회 치리의 방법 등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역시 다른 개신교회의 교파들과도 차이가 있지요.

그렇지만 이러한 차이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자로 고백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의 모든 교단들은 공통점이 더 많다는 점을 늘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이건 대강의 설명이구요… 리포트를 위해서라면 적절한 책을 찾아보시는 것이 좋겠지요?

간단하게 추천하는 2권의 책을 추천합니다.

종교개혁사 / 유스토 L.곤잘레스 지음, 서영일 옮김 / 은성
종교개혁사 / 오언 채드윅 /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위의 책을 살피시면, 좀더 객관적이고 정확한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3월 23, 2002 at 10:47 오전

Uncategorized에 게시됨

Tagged with , ,

교부 전통과 종교개혁자

leave a comment »

예.. 연일 좋으신 말씀을 많이 듣게 되고 그 은혜 속에 지적으로 비록 매우 작게나마 성장하는 저 자신을 느끼게 되어 매우 감사합니다..

음, 쩝~ 제가 들으니 가톨릭교회에서 성직자등의 정치참여를 명확하게 법으로 정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고 하더군요..1982년이던가..교회법전을 정비하면서…관습상으로만 전해오던 성직자정치참여 금지를 법제화했다고 하던데..아마 전에 말씀하신 쿠바신부의 경우 그래서 그때는 가능했는지 잘 모르겠군요…

음, 오늘은 이것을 하나 여쭈어 보고 싶군요..

제가 들으니 개신교 주류교단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프란시스코 등은 신앙의 선배로서 존경한다던데요, 사실 이들을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회의 기틀을 다지고 찬란한 금자탑을 쌓은 가히 기념비적인 인물들로 추앙받고 있어요..
교회의 영속성 측면에서 볼 때.. 말에요.. 루터나 칼빈, 헨리 8세등이 이들의 후계자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제가 이것을 어느 장로교인에게 문의하였더니 他개신교에서는 딱히 아우구스티누스 등을 계승한다는 의식은 없고 단지 신학적인 지평이 그들과 같다고 이해되므로 존경할 뿐이다고 하더군요..

개신교 중에서는 가장 가톨릭적인 요소가 강한 성공회에서는 아마도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프란시스코등을 공경하는 신심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마는,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성공회가 문자 그래로 ‘성스럽고 공번된 교회’로서 이들의 후계자로서 이들의 정통신앙을 계승하기 때문인지요..? 또한 그것은 성공회에서는 헨리 8세등의 성공회 종교개혁자들이 이들의 신학을 승계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으로 저희가 보아도 무방하겠는지요?

아니면, 단지 성공회에서도 기본적으로는 프로테스턴트 계열이니 루터, 칼뱅, 헨리 8세등의 종교개혁정신에 대한 계승의식이 강하고 단지 신학적인 지평을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이분들을 가톨릭에서는 敎父라고 존칭합니다만, 성공회에서도 그말을 쓰는지..) 등과 함께 할 수 있으니 이 분들의 신학을 연구하여 재해석하는 것인지요..? 또한 베네딕도와 프란시스코등과 같은 중세시대의 성인들에 대하여 단지 신앙의 훌륭한 선배로서만 이해하는지…궁금하군요..
사실 가톨릭에서는 베네딕도와 프란시스코 성인등 중세시대의 성인의 靈性을 계승한다고 자부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질문이 다소 산만한 경향이 있지만, 영민한 신부님께서는 질문의 핵심을 잘 파악해내시리라 믿습니다,..^^*
다만 신부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문제와 생각에서 차이가 있을수 있으나 그것은 단지 저의 소견이 좁은 탓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답변을 기대해봅니다..

+ 주님의 평화,

안녕하세요? 게파님.

답변이 너무 늦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때쯤부터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일들로 겹치게 출연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차분히 앉아있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여러 가지 심적인 분란이 있었던지라 ^^

연일 좋은 질문 주신 것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 수준 높은 숱한 의문과 질문에 제 답변이 신통할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시도해보지요.

질문을 요약하자면…

게파님은 천주교가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프란시스 성인들을 계승하는 교회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고, 종교개혁은 실제로 천주교와의 분리이니, 종교개혁자들은 이들을 계승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가지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성공회가 종교개혁자들과 갖는 친연성과 더불어 교부들의 성과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이 덧붙여져 있군요. 그밖에도 여러 의미가 있는 의문들이 중첩되어 있구요.

답변을 시도하자면…

1. 교부들의 신앙은 모든 그리스도교회가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선 말씀하신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프란시스(프란치스꼬) 성인의 행적과 신앙적 결과물들은 천주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여러 번 언급했던 것처럼, 서방교회 전통에 있는 천주교나 개신교는 모두 이분들의 신앙적 유산을 공유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제게 가르침을 주신 신학교수님은 개신교 목사님이고, 또 종교개혁을 전공하셨던 터라, 그리스도교 신학의 삼총사는 바로 ‘어거스틴, 루터, 칼빈’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이 대단히 옳다는 것을 늘 인정하고, 이들의 신학적 연구 성과가 그리스도교회 전체에 차지하는 의미를 늘 생각해왔습니다.

2. 교회는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

천주교는 기본적으로 개신교 종교개혁이 교회의 계승과 전통을 단절시킨 것으로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문제의식과 입장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처음의 교회로 되돌아가자, 복음의 교회를 새롭게 건설하자”는 것이었지, 교회의 분열이나 단절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프란시스 성인은 복음의 정신 앞에서 함께 평가받고 다시 존경받아야 할 것이지만, 그들의 성과가 곧 복음과 대치될 수는 없다는 주장을 했던 셈이지요. 그런 점에서 전통교회의 신학을 복음을 연구하면서 새롭게 해석하고 비판하기도 하고 긍정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서방교회라는 같은 전통 안에 있는 천주교와 개신교는 교부 신학의 완성과 기틀을 어거스틴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니 종교개혁의 출중한 신학자인 루터나 칼빈은 어거스틴의 직접적인 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또 교회는 중요한 신학자들의 주장과, 깨지지 않는 교회 제도를 통해서 계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 천주교는 이견이 있을 줄 압니다만, 영속성을 가시적인 교회 제도를 통해 판단하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천주교 내부에서도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3. 개신교는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승계하는 것인가?

개신교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얽매인다면 종교개혁의 주장이었던 “복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무색해지겠지요. 역사적으로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복음서가 증언하는 하느님이요, 구원자로 오신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이요,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시는 성령님이지, 루터나 칼빈이 아님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또 루터나 칼빈은 그 역사적인 조건 속에서 복음을 해석하고 한줄기 빛을 주었던 것이지 그것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종교개혁의 거장이라고 해서 이분들의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겠지요. 사정이 그렇다면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 대한 평가도 그럴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신학을 승계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통해 표현되었던 신앙적인 성과를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요.

그리고 성공회는 헨리 8세의 성과를 그렇게 큰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신학적인 성과라고 보면 더욱 보잘 것 없습니다. 또 성공회의 신학은 여느 다른 개신교처럼 어떤 거장들(루터,칼빈)을 통해 마련되지 않고, 다양한 신학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논쟁과 혼란 속에서 정리되었고, 현재도 정리되며 그런 신학적인 삶이 실험되고 있습니다. 다른 개신교들이 루터라니즘(Lutheranism)과 칼빈이즘(Cavinism)과 같이 그 거장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것과는 달리 성공회는 앵글리카니즘(Anglicanism), 즉 영국 전역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삶의 총체성을 이름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극명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쉽게 말해서 문제는 학파의 문제가 아니라, 삶 전체의 문제이겠지요.

4.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미 로마 가톨릭 교회와 성공회, 정교회, 기타 개신교는 일치를 위한 대화의 역사를 깊이 쌓아 오고 있습니다. 이런 대화는 서로에게 배움을 주고 받는 형태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천주교의 분도출판사에서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의 강론집을 번역해서 내 놓은 것도 그런 예입니다. 한국은 이상하게도 교파 간의 벽이 높아서 서로를 경원시하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뜻도 아닐뿐더러, 현재 세계 교회의 추세도 아닙니다. 이런 벽들은 결국 서로를 더욱 모르게 하고, 결국 오해하게 만들지요. 서로 겸손하게 배우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교파 간의 담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답변이랍시고 시도했지만, 제 자신도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것 같아 아쉽고 미안합니다. 하지만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과정 속에서 정말로 “진리의 답변”을 주시는 분께서 미진한 부분을 채워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부족한대로 실어 보냅니다. 더 혼란을 부추기지 않을지 염려스럽지만.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된 형제 주낙현 신부 합장 ^^

Written by skhfaq

9월 29, 2001 at 3:04 오후

Uncategorized에 게시됨

Tagged with , , ,

고해 성사 2

leave a comment »

+ 주님의 평화

게파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 시도가 이어집니다.
지난 번에 답변 드린 고해성사에 대한 추가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입니다.
내용이 조금 길더라도 용서바라며…

질문 2
고해성사에 대하여서 그것은 하느님 은총의 표징으로 보신다면,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 20-23) 라는 성서말씀에도 불구하고 사제의 赦罪權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신지요? 달리 생각해보면,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는 신자들과 고해성사를 통하지 않고서 죄를 용서받는 신자들과의 형평성 문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답변 2
하느님의 은총의 표징은 어떤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의 신비는 우리가 어떤 표징으로도 담을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에 대한 이해도 폭넓게 해야하며, 어떤 교리적인 태도나 입장으로 제한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통상 말하는 “사제의 사죄권”이라는 표현은 오랫동안 오해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구분 혹은 명확한 해명이 필요합니다. 궁극적인 죄의 용서는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사제의 사죄권”이라는 말은 “사제가 용서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이름으로 용서를 선포하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성서에서 고해성사를 위한 근거는 명확합니다(마태 16:19, 18:18, 요한 20:23). 그러나 그 이해는 역사적인 것으로 제한되거나 왜곡되었으니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이런 고백과 용서의 참회 예식은 초대교회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체로 공개적인 성격이었지요. 예를 들어 세례를 받기 위해서 자신의 지난 잘못을 모두 밝히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례 이후에 저지른 일상적인 잘못에 대해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참회 예식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예식은 애초에 교회 예배 안에서 함께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참회 예식은 초대 교회와 같이 작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매우 중대한 죄(살인이나 성적인 부정, 파괴 행동)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세 초기부터 이러한 개인적인 참회 예식이 일반 신자들의 일상적인 죄의 문제에까지 확대되어 개인적인 고백에 따른 참회 제도로 정착하게 됩니다. 부작용도 많았지요. 중죄자의 경우에는 너무나 가혹한 보속을 주었기 때문에 이를 아예 참회 예식을 회피하는 것이 많았으니 말입니다. 이런 일로 참회 예식의 의미가 상실되는 것을 막으려고 로마 가톨릭은 1215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신자들의 의무 사항으로 규정했습니다. 공개적인 참회 예식은 오히려 형식적인 것이 되고, 개인 참회 예식 이른바 개인적인 고해성사가 정착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살펴볼까요? 성공회 성찬례에서나 로마 가톨릭의 미사에서는 “죄의 고백과 용서의 선언”이 포함된 참회 예식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는 초대교회의 예전적인 유산이지요. 즉 우리는 매 성찬례(미사)때마다 고해성사를 치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제가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선포하는 고해(고백과 용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또 이것은 기본적으로 “죄”란 한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상기시키시고 결국 참회란 공동체 화해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공개적인 죄의 고백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이 양심을 가리면서 하는 것이라는 판단이 있다면 이를 사제에게 가서 개인적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용기입니다. 그래서 성공회 역시 개인적인 고해성사를 권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찬례의 참회예식(죄의 고백과 용서 선언)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연장선입니다. 이 개인적인 성사를 통해서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고, 이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더욱 가깝게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또 사제는 단순한 보속을 지정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이 영혼의 성장을 위한 사목적인 돌봄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고해성사를 통해서 얻는 기쁨은 대단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런 점들 때문에 개혁초기에 주님께서 세우신 성사로 세례와 성찬례, 그리고 고해성사를 꼽았습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의 고해성사에 대한 오용 때문에 아예 이를 버리고 말지요. 당시 유행하던 말대로 “아기를 씻긴 욕조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게 되었다”는 빈축을 살만한 일이지만, 그처럼 고해성사의 오용의 문제 또한 심각했다는 증거지요.

현재 고해성사는 여러모로 조명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교리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심리적인 문제와 영혼의 치유, 공동체와의 화해를 위한 훈련과 조건 그리고 사목적인 상담 등 다양하게 접근할 문제이지요.

그러고 보면 개인적인 고해성사 참여 여부로 인한 형평성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보기에 그런 것이지 하느님께서는 고해성사에 참여한 사람의 마음도 보시고, 성찬례를 통한 참회 속에서 고백하는 사람의 마음도 읽으시기 때문입니다. 참 신앙인이라면 성찬례를 통한 고백이든 개인적인 고해성사이든 하느님 앞에서 정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정직한가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고해성사가 우리 삶에 던지는 질문입니다.

좋은 질문에 감사하며, 항상 주님의 놀라운 은총이 형제님에게 깃들길 빕니다.
주낙현 신부 ^^

Written by skhfaq

8월 18, 2001 at 2:43 오후

십계명 – 천주교와 개신교가 달라요?

leave a comment »

[윤호님께서 남긴 내용]

저는 지난번에 천주교의 십계명을 본적이 있는데 좀 이상하더군요

천주교의 십계명(천주십계)에는 제 2 계명 “우상을 섬기지 마라”라는 구절이 없고 대신 제 10 계명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라는 구절을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로 만들어(2개로 나누었지요) 빠진 제 2 계명의 자리를 매꾸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윤호님 안녕하세요?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천주교에서 쓰는 십계명을 볼까요?

일.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사.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오. 사람을 죽이지 마라.
육. 간음하지 마라.
칠. 도둑질을 하지 마라.
팔.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구.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십.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역시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십계명과는 다르지요? 여기에는 몇가지 성서 해석과 역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십계명은 구약성서 출애굽기 20:1-17과 신명기 5:6-21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내용은 같습니다만 약간의 차이가 있지요. 그리고 그 차이에 다라 천주교와 정교회, 루터교와 다른 개신교들이 조금씩 달리 보고 있습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이 개신교식의 분류인 10번째 계명, “너는 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는 대목입니다. 출애굽기와 신명기를 유심히 살펴보면 아시겠지만, “남의 아내”에 대한 언급 순서가 바뀌었지요. 출애굽기는 이른바 소유물에 “아내”(여성)을 포함시키고 있지만, 신명기는 독자적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소유물을 언급하지요. 이 점에서 학자들은 사회적인 정의를 강조하는 신명기 기자의 관심에 따른 배려라고 보고 있습니다. 천주교는 이 부분에서 신명기적인 분류를 따르고 있습니다.

두번째, 제 1계명과 제 2계명의 연관 문제인데요. 천주교는 기본적으로 “하느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부속적인 설명이 “모습을 본떠 새긴 우상을 모시지 못한다”는 말이라고 봅니다. 유일신 사상을 그토록 강조했던 유대교의 한 면모를 보는 것이지요. 이른바 상이 없는 종교를 하느님의 절대성을 통해 확인한다고나 할까요. 그러니 제 1계명과 제 2계명을 하나로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이것이 천주교가 채택하고 있는 십계명 분류법(?)입니다.

그렇다면 개신교는?

우선 루터교는 전통적으로 천주교와 같은 “십계명” 배열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회와 장로교(칼빈과 쯔빙글리)의 경우는 현재 개신교에서 통요되는 출애굽기에 좀더 근거를 둔 십계명 배열을 따르지요. 최근 성서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원래의 십계명”은 다음과 같이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 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 너는 나를 본따 새기거나 비슷한 것을 만들지 말라.
삼. 너는 너의 하느님 야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사.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심하라.
오. 네 아버지와 네 어머니를 공경하라.
육. 너는 살인하지 말라.
칠. 너는 간음하지 말라.
구. 너는 너의 이웃에게 거짓증언을 하지 말라.
십. 너는 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

James Muilenburg, “The Hostory of the Religion of Israel,” [Interpreter’s Bible] Vol. 1. p.303.

현재 개신교가 사용하는 십계명과 다를 바가 없지요? 원래의 십계명을 보자면야 출애굽기가 좀더 신빙성이 있으리라 생각한 탓이지요.

사족이요, 괜한 노파심입니다만 이런 연유에도 불구하고, 굳이 천주교가 “우상” 내용을 빼서 자신들의 성상 제작을 합리화했으니 성서적이지 않고, 성서를 재멋대로 본다라고 다그치지는 말 일입니다. 개신교에서도 역시 존경해 마지 않는 어거스틴도 사실은 현재 천주교 식의 배열을 따랐습니다. 다만 성서학계의 최근 연구로 봐서 개신교측(성공회와 장로교)의 새로운 입장(종교개혁 당시로서는)이 원 뜻에 가깝다 것이 확인되고 있으니 거기에 만족해도 되지 않을까요? 십계명의 말씀대로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된 자녀이기 때문이지요.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주낙현 부제 ^^

Written by skhfaq

1월 23, 2001 at 12:39 오후

성공회와 복음주의

leave a comment »

[미카엘님께서 남긴 내용]

복음주의 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부제님께서는 성공회가 과연 복음주의를 따르고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요 그리고 성공회는 2가지 종류가 있다고 존 스토트 목사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신은 복음주의 계열의 성공회 성직자요, 다른 종류는 영국국교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요. 한국에 전파된 성공회는 어느 계열인지 궁금합니다.

+ 그리스도 예수님 찬미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몇가지 개념을 찬찬히 살피고 생각해 봅시다.

“복음주의”(evangelicalism)란 무엇일까요? 복음주의란 말그대로로만 신앙에서 그 어떤 것보다 복음의 말씀에 충실하자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교회가 복음에 충실하지 않다면 그건 교회로 보기가 어렵겠네요. 그런 점에서 모든 교회는 기본적으로 복음에 바탕으로 한 복음주의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잘못 사용되고 있는 복음주의의 부정적인 혹은 긍정적인 함의들을 탈피하고자, 저는 굳이 “복음적”이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 성공회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에 기초한 “복음적” 교회이지요.

그런데 성서에 대한 해석과 성서의 권위와 위치에 대한 견해가 분분해지면 그런 견해를 가르는 용어가 나타나기 시작했지요. 복음주의네, 자유주의네, 정통주의네 하는 것들이 그런 예이겠지요.

그러니 미카엘님이 말하는 “복음주의”란 그런 몇가지 신학적 혹은 신앙적 경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른바 “복음주의”계열도 그 성격이 너무 다양해서 딱 어떤 것이 복음주의다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의 예전과 전통을 매우 중시하는 어떤 교회는 “예전적이며 복음주의적”인 교회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굳이 성공회 안의 신학적 신앙적 경향을 거칠게 가르자면 복음주의적(저교회파 low church), 자유주의적(광교회파 broad church , 전통주의적(고교회파 high church) 경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영국성공회의 존 스토트 신부는 세계적인 복음주의자로 알려져 있지요. 성공회 저교회파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분이지요. 또 알리스터 맥그래스라는 성공회 신부이자 신학자도 성공회 복음주의의 대표적인 분입니다.

자유주의(이 용어는 참으로 오해가 많은데요, 각설하고)적인 성격을 가진 분들이 성공회에는 많이 있지요. 성서에 대한 문학적 비평을 폭넓게 받아들이려는 신앙 형태이지요. 특히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 “상황윤리”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견해들로 인해 교회 일치 운동과 교회의 사회 윤리 및 종교 간의 대화가 많이 진척되기도 하지요.

그리고 고교회주의 혹은 전통주의라고 할 만한 경향이 있습니다. 글쎄요 미카엘님이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성공회는 복음주의와 영국국교가 있다? – 이건 좀 억지이고 명백한 오해이네요. “영국국교”라는 말은 Ch of England 영국성공회에 대한 잘못된 명칭인데 – 세계성공회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마 교회의 예전 전통과 교리적 전통을 중요시하는 고교회적 경향을 가리키는 듯 합니다.

한국성공회는 이들 세가지 부류 가운데 고교회적인 성격을 많이 가진 선교사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선교초기이지요. 하지만 이분들은 스스로를 복음적이며, 인간의 학문의 성과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게다가 한국성공회 안에서는 성령운동과 더불어 민중신학적인 입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앙적 성격과 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성공회는 어떤 경향이다하고 딱하니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적인 경향과 형태도 딱부러지게 “당신은 복음주의요” “당신은 고교회파요”라고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사실 고교회적인 경향이 이해한 깊은 영성과 복음주의가 있기 마련이요, 복음주의적인 경향에서 체험하고 있는 전통적인 예전과 예배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있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아쉬움이 있다면, 한국의 교회(개신교며 천주교를 막론하고)는 너무 내편 네편을 분명히 가르려는 것 같고, 쉽게 “딱지붙이기”(labeling)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면 신앙에 녹아든 그 깊은 맛과 의미를 알지 못하게 될 우려가 있지요. 저는 복음주의자를 신앙적 확신에 찬 신앙인으로 보고 존경합니다. 저는 자유주의자를 세상에 대한 깊은 신앙적 고민과 결단으로 살아가는 용기있는 신앙인으로 보고 감탄합니다. 저는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과 교리를 붙들과 그 깊은 의미를 숙고하며 체험하는 신앙인들을 사랑합니다.

저는 어느 편에 서있나요? 모르지요.

주님의 그 넓은 사랑 안에서 주낙현 부제 드림 ^^

Written by skhfaq

1월 21, 2001 at 12:19 오후

성공회에 대해 여러가지 궁금증

leave a comment »

안녕하세요?

저는 부산에 살고 있는 김성호라고 합니다.

천주교 신자인데요, 성공회 홈페이지와 성공회에 관련된 글을 읽으며 참으로 좋은 교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는군요.

특히, 제도교회가 쉽게 빠질 수 있는 교파절대주의에 벗어난 그 넉넉한 믿음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저는 지금 개신교(성결교)에 나가는 자매와 교제중인데요, 그래서 개신교에 관련한 글이나 사이트를 찾아다니며 그 자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려 노력 중 이랍니다.

그런데 대부분 개신교는 천주교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믿음이며 그로인해 순교자적 환상에 쌓여있는 환자(?)들이 많더군요.

그래서 쉽게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적대적 감정만 가지고 돌아선 경우가 숱하지요.

하느님 보시기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전 진정으로 대화하길 원했었는데…

뿌리가 튼튼하다면 가지가 뻗어나가는 것을 괴로워해야 할 이유가 없겠지요.

하느님이 주신 다양한 은사를 서로 나누고 더 풍요로운 신앙의 날들을 가꿀 수 있는 방법도 많은 데…

부제님과 많은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성공회 전반에 관한 것들 그리고 믿음과 신앙 생활에 관한 것들요.

대천덕 신부님의 글을 읽으면서 충분히 가능하리라는 확신도 생깁니다.

부제님께서 가까운 성공회 성당을 소개해 주시면 한 번 다녀볼 생각도 있습니다.

그것이 성공회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먼저 궁금한 점 하나, 성공회가 로마가톨릭에서 분리된 것이 영국 국왕의 이혼문제인걸로 알고 있는데(세계사 시간에 배웠음) 그렇다면 이것은 성공회의 종교 개혁이라는 것이 인간적인 문제 해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런 것이 아니라면 로마가톨릭의 어떤 부분에 대한 개혁의 요구 였는지 알고 싶습니다.

성서 이해의 차이나 신학적 쟁점들로 인한 것이라면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둘째, 현재 로마가톨릭에서는 교황을 가톨릭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교황의 영적 판단에 대해서 순명할 것을 가르칩니다. 성공회에서는 켄터베리 대주교의 위상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성공회 교리를 영국의회에서 판단한다고 하던데요, 이것이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이는 어떠한 근거에서 인정되고 있는지 알고 싶군요. 또 성공회를 영국국교회라고도 하는 데 대한성공회는 영국국교회의 하위관구로서의 위치인지 아니면 하나의 독립적인 관구로서 활동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셋째, 천주교의 성상 숭배에 대해서 많은 개신교에서 우상숭배로 몰아부치는데 이에 대한 성공회의 가르침은 어떠한지, 그리고 성인 공경의 문제에 대해서도 알고 싶고요,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가장 큰 성인으로 모시고 있는데 성공회는 어떤지도 알고 싶습니다.

궁금한게 정말 많지요? 앞으로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처음이라 조금만 쓸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이해해주시길…

그럼 부제님의 답변 애타게(?) 기다립니다.

성공회를 보면서 성공회 신자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는 선교의 방법에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교단의 믿음을 구원의 절대적 조건이라 주장하지 않는 겸손함, 형제들을 이해하는 너그러움, 누구와도 대화하는 열려진 마음 등.

세상의 성공과 주님의 성공은 어차피 같은 영광이 아니지요.

좁은 길이지만 그 길의 아름다움을 알고, 그러므로 그 길을 벗어나지 않는 대한성공회에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런 대화의 장을 열어주신 주낙현 부제님을 위해서도 기도할께요.

김성호 드림

+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찬미합니다.

김성호 wrote :

>저는 주교 신자인데요, 성공회 홈페이지와 성공회에 관련된 글을 읽으며 참으로 좋은 교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는군요.특히, 제도교회가 쉽게 빠질 수 있는 교파절대주의에 벗어난 그 넉넉한 믿음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 성공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좋은 평가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궁금한 점 하나, 성공회가 로마가톨릭에서 분리된 것이 영국 국왕의 이혼문제인걸로 알고 있는데(세계사 시간에 배웠음) 그렇다면 이것은 성공회의 종교 개혁이라는 것이 인간적인 문제 해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런 것이 아니라면 로마가톨릭의 어떤 부분에 대한 개혁의 요구 였는지 알고 싶습니다. 서 이해의 차이나 신학적 쟁점들로 인한 것이라면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 영국성공회가 성립되던 당시는 이른바 종교개혁의 시대였습니다. 서방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가 중세를 넘어 16세기에 들어서는 그 타락이 심각했습니다. 그 타락은 복음을 위협할 정도였다는것이 당시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새롭게 출발시킨 교회는 단순히 “분열”이나 “분리”가 아니라 올바른 교회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분열과 분리라는 표현은 로마 가톨릭에서 말하는 용법이 되는 것이지요.

: 개신교 종교개혁은 종교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이 맞물리면서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진행된 종교개혁은 첫 시작에서는 정치적인 면이 강했습니다. 그것이 국왕 헨리 8세의 혼인무효문제(이혼 문제가 아님)가 발단이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정치적이라는 면도 사실 국왕 개인의 욕심과 욕정(많은 천주교인들이 비방하듯이)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과 연계한 스페인이라는 정치 권력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성공회의 성립과정은 정치적인 독립과 함께 교리 신학적으로도 로마 가톨릭의 오류들에 대한 반성과 비판으로 길을 잡아갔습니다. 그 내용은 로마 교황의 지배권에 대한 저항, 그리고 중세 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행태들(구원론과 관련된 교리들과 교회 정치, 성찬례에 대한 이해, 성직자들의 타락, 교인들의 무지 등)에 대한 수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현재 로마가톨릭에서는 교황을 가톨릭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교황의 영적 판단에 대해서 순명할 것을 가르칩니다. 성공회에서는 켄터베리 대주교의 위상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성공회 교리를 영국의회에서 판단한다고 하던데요, 이것이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이는 어떠한 근거에서 인정되고 있는지 알고 싶군요.

: 우선 각국 성공회의 위치와 세계성공회(The Anglican Communion)의 차이를 알아야 할 것 같군요. 영국 성공회(The Church of England)가 전 세계성공회를 대표하지 않습니다. 각국 성공회는 저마다 독립적인 형태돌 유지됩니다. 영국에서는 성공회가 국교이기 때문에 국왕이 영국교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수장이라는 말은 헨리 8세때에 사용되다 그 이후에는 사라졌음). 그리고 국왕은 항상 의회를 통해서 모든 일을 결정하고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의회의 결정에 따라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회에는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는 국가와 종교가 “하나”로 이해되고 있는 국교 채택 국가에서만 이뤄지는 독특한 전통입니다. 미국성공회나 한국 성공회 등은 이런 일이 없지요. 한국이나 미국 등지에서는 주교와 성직자, 평신도로 이뤄지는 관구의회, 혹은 교구 의회를 통해서 모든 일이 결정됩니다. 캔터베리대주교는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관구를 대표하는 동시에 전세계성공회를 대표합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 성공회에 대해 어 행정적 교리적 권한도 없습니다. 참고로 영국내 성공회를 대표하는 사람은 요크의 대주교입니다.

>또 성공회를 영국국교회라고도 하는 데 대한성공회는 영국국교회의 하위관구로서의 위치인지 아니면 하나의 독립적인 관구로서 활동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 좀더 명확하게 말한다면 성공회가 영국에서는 국교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가 스코틀랜드에서는 국교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교 한국에 있는 장로교를 스코틀랜드국교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 있는 성공회를 두고 영국국교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세계성공회는 각 관구의 독립성이 완전히 보장되어 어느 나라도 다른 나라 성공회에 대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셋째, 천주교의 성상 숭배에 대해서 많은 개신교에서 우상숭배로 몰아부치는데 이에 대한 성공회의 가르침은 어떠한지, 그리고 성인 공경의 문제에 대해서도 알고 싶고요,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가장 큰 성인으로 모시고 있는데 성공회는 어떤지도 알고 싶습니다.

: 제가 아는 한 천주교는 성상 숭배를 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상을 만들어 놓고 이를 이용하는 것이지요. 성공회도 이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만 천주교만큼 성상을 비치하거나 많이 이용하지는 않습니다. 성인 공경은 그리스도인의 책무입니다. 하지만 숭배는 하지 않습니다. 성공회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를 위대한 신앙의 모본으로 보며 그분의 신앙을 본받아 예수님을 따르려 하지만, 그분 자체를 기도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이런 점은 천주교와 차이가 있지요.

>성공회를 보면서 성공회 신자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는 선교의 방법에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교단의 믿음을 구원의 절대적 조건이라 주장하지 않는 겸손함, 형제들을 이해하는 너그러움, 누구와도 대화하는 열려진 마음 등. 세상의 성공과 주님의 성공은 어차피 같은 영광이 아니지요. 좁은 길이지만 그 길의 아름다움을 알고, 그러므로 그 길을 벗어나지 않는 대한성공회에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 한국에서 작은 교회로 존재하고 있는 성공회에 대해 이런 호의적인 말슴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넓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우리 손 안에 움켜 잡으려는 오만을 부리지요.

>그리고 이런 대화의 장을 열어주신 주낙현 부제님을 위해서도 기도할께요.

: 저도 개신교의 자매님과 대화하려고 노력하는 성호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형제,

주낙현 요셉 부제 드림 ^^;

Written by skhfaq

1월 21, 2001 at 12:09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