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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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와 사회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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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신부님! 오랜만에 찾아뵙네요.

전에 신부님께서 소개해 주신 책들을 거의 다 사서 대략 반 정도 봤습니다.

다만 200주년 신약성서의 경우는 너무 커서 좀 시간이 걸리겠습니다.

근데 제가 요즘 읽은 책 가운데 존 도미닉 크로산의 글이 있었는데 그 분의 논지는 대략 어떤 것인지는 알겠는데 저는 상당히 공감했습니다.

언젠가부터 저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으니까요.

저는 예수께서 정치적 혁명가도 아니고 종교적 예언자라고만도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어라고 이름붙여야 할 지 몰랐는데 크로산 선생은 사회적 혁명가라는 라벨을 붙이셨더군요.

어디서도 쉽사리 유형화되기 어려운 예수의 삶에 대한 크로산의 견해가 제 생각으로는 비교적 예수 자신의 의도에 근접한 견해가 아닌가 생각해 봤습니다.

신부님의 의견이 어떠신 지 궁금합니다.

특히 이 문제는 교회가 견지해야 할 정체성의 방향을 시사한다는 점에서도 가벼이 지나칠 문제는 아닐 것같습니다. 크로산 교수가 어제 오늘 나타난 사람도 아니고 널리 알려진 주장이다보니 교회의 입장이라는 것도 있을 것 같구요…

신부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주님의 평화

아타나시오 형제님 안녕하세요?

열독의 사나이께서 멋진 책을 하나 잡으셨군요. ^^

지금쯤이면 지난 번에 소개해드린 책을 거의 다 읽으셨겠군요.
대단하십니다. 저라면 한 두어달이 걸릴 양인데요(워낙 제가 게으르거든요).

신약성서주해는 통째로 읽는 책이 아니니, 무리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매우 유명한 책이 하나있는데요, 영국 학자인 제임스 던의 [신약성서의 통일성과 다양성]이라는 책입니다. 말 그대로 신약성서는 통일성이 있지만 무엇보다 다양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 책 하나 하나의 독립성과 함께 전체적인 상을 다시 그려야 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니 필요할 때만 책별로 읽으시면 좋겠어요.

여기까지는 질문하신 도미닉 크로산의 책을 제가 아직 읽지 못했다는 변명을 앞에 두기에 쑥스러워서 해본 잡설입니다.

정말이지 안타깝게도 도미닉 크로산의 책을 읽지 못했습니다. 제 게으른 독서가 여기서 다시 한번 들통나는 순간입니다. 이미 그분의 많은 저작이 번역된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서 서점에서 몇 번이나 부분적으로 읽어보면서 만지작 거렸지만, 결국에는 다 읽지 못하고, 또 내 손에 넣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허를 찔릴 줄이야 생각을 못했던 거지요. ^^

그러니 그 책의 문제를 떠나서, 제가 알고 있는 몇가지 역사적 예수 연구의 경향과 이를 바로 바는 시각이랄까? 이런 정도에서만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이른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오랫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그리스도교가 기본적으로 역사적 예수에 근거한 역사적 교회라는 이유때문이라도, 또 지난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교 역사의 예수를 망각하거나, ‘고의적으로’(조심해야 할 말이지만) 덮어버렸던 사실에 대한 반성에서라도, 그리고 현재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자기 성찰과 복음적 가치의 회복을 위해서라도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수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지속되고 있습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는 지난 19세기 계몽주의와 함께 강력하게 대두되고 시작했고 이것이 자칫 상상력에 의한 무리한 재구성이 되리라는 비판과 성찰로 주춤하다가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발견되기 시작한 엄청난 사본들과 그 연구를 통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최근까지는 언급하신 도미닉 크로산과 같은 미국의 “예수 세미나”의 학자들에 의해서 지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안에서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접근이 또 독일 학자들과 미대륙의 학자들, 그리고 영국 쪽이 조금씩 다른 모양새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들의 관심은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여과 과정을 통해 확정된 현재의 정경만으로는 예수의 실체에 접근하기 어렵거나,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정경의 근본이 되었던 다양한 자료 연구와 사본 연구 등을 통해서 한 시대를 살았던 예수의 실제 모습에 근접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연구들은 이른바 교리적으로 “구성”되었던 전통적인 예수상에 대해서 “해체-구성”(destruction)하는 작업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해체-구성”은 기존의 전통적인 교리에 대한 상당한 도전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한편 이런 역사적 예수 연구가 그 가능성과 유효성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실체를 드러내는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신약성서의 정경들뿐만 아니라, 사본 자체도 역사적 예수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갖기보다는, 그 예수님을 따랐고, 신앙했던 그룹들, 혹은 공동체들에 의해서 다시 신앙적으로 해석되며 채색되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그 채색을 완전히 벗겨내서 재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기보다는 그 공동체들의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그 공동체가 어떻게 신앙을 가꾸어갔는지, 어떻게 유지되어 갔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더 현실적으로 오늘을 향한 메시지 구성에도 더욱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주장들이 역사적 예수 연구 자체를 거부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성과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리스도교의 예수 이해는 교리화되고 형해화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역사적 예수 연구는 신약성서 연구와 교리 연구를 위한 중요한 밑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교리는 이러한 연구들 통해서 재해석되고 변화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연구 성과들을 교리에도 반영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한국교회인데, 한국교회는 교리적인 예수상이 너무나 강고하고 두터워서 이런 연구들이 하나의 힘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이단시되거나, 위협적인 것으로 치부되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나 이런 반성이 없으면 교회는 점점 세상과 사회에 대해서 문을 닫고 게토화되겠지요.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교의 핵심교리인 “성육신 교리”를 위배됩니다. 제풀에 제가 넘어지는 꼴입니다.

그러나 성서에 대한 예수 연구는 또한 역사 속에서 이해한 예수 연구로까지 확대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역사 속에서 예수는 또한 단일한 어떤 모습으로만 이해되지 않았고, 그 시대적 상황과 문화 속에서 새롭게 이해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각 시대와 문화에 따른 예수 이해는 또 천양지차이기 때문입니다. 이 분야에 대한 권위있는 책을 한권 더 소개해드립니다. 미국의 루터교 출신 교회사학자인 야로슬로브 펠리칸의 저작입니다. [예수의 역사 2000년 – 문화사속의 그리스도의 위치] 김승철 옮김, 동연.

이런 처지에서 “오늘 나에게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실존적인 질문이 다시 남겨집니다. 이 점은 지난 세기의 실존신학이 계속해서 역사적인 예수를 가볍게 보았던 것과는 다릅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와 그 밖의 다른 연구의 성과에 대해서 “정직하게” 대면하고 그런 다음에 다시 오늘 그분이 나에게, 우리에게, 우리 사회에 누구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저도 크로산처럼 예수가 정치 혁명가나, 종교적 예언자가 아니라, 사회 혁명가였다는데 동의합니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회-문화-영성의 혁명가”가에 더욱 가까운 분이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다고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다시” 그분은 우리의 한 손에 잡힐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 신앙의 샘물이 되는 것이지요.

변명은 항상 길게 마련인지라, 여기서도 그 우를 다시 범하고 맙니다.
부족하나마 제 의견 정도로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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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khfaq

7월 19, 2002 at 11:13 오전

구원에서 신앙과 선행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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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평화

세번째 질문과 답변입니다.

질문 3.

잘 아시겠지만 가톨릭의 구원관은 신앙 + 선행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 개신교는 오로지 신앙만으로 족하다고 하지요.. 이 부분은 종교개혁시부터 굉장히 중요한 논점중의 하나로 부각되었었고요. 아직도 좀 그렇지만 그렇다면 개신교 중 가장 가톨릭 색채가 강한 성공회는 이 부분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요.? 구원이 신앙만으로 족하다고 보시는지 아님, 선행이 덧 붙여져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답변 3.

여기서 가톨릭이라면 로마 가톨릭 즉 천주교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되묻는 것은 “가톨릭”에 대한 오해와 선입견 때문입니다. “가톨릭”이란 한 그리스도교 전통 교단의 명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그리고 구원자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교의 대명사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톨릭 신앙”이란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 쯤으로 이해해야 할텐데, 그런 용법이 늘 문제가 되는 것 같군요.

본론에 들어서서,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신앙과 선행의 문제는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 논란을 여기서 재현할 필요는 없지만, 이런 논란에 대한 한가지 불만은 신앙의 원리를 너무 쉽게 단정하려는 듯한 태도입니다. 그러니까 천주교에서 믿음과 선행을 병렬로 놓은 것도 문제지만, 이를 굳이 선후의 문제 혹은 종속의 문제, 아니면 배제 용법을 써서 “믿음만”이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앙”은 이러한 인간적인 손쉬운 용법 너머에 있습니다. 신앙과 선행의 문제는 하나의 문제이지 선후의 문제 혹은 병렬의 문제가 아니지요.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신앙인에게 선행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할 생활의 덕목이라면, 그것은 이후에 무엇이 덧붙여져야 구원이 가능하다는 조건법과 상당히 다르지요. 그리고 신앙은 그것을 가진 사람의 총체를 드러낼텐데 “신앙”이라는 하나의 이념적인 아집만 있고 “이에 따른 삶”이 보이지 않는 것 또한 가톨릭 신앙에서 벗어납니다. 이는 모두 신앙의 경지에 들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신앙+선행”이라는 등식이나 “신앙만”이라는 조건도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참 인간이요 참 하느님으로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보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분에게 신앙과 선행이라는 것은 구별되어 있지 않습니다.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한 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드림 ^^

Written by skhfaq

8월 15, 2001 at 2:3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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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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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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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셨을까요?
어떤 성경귀절에도…
“예수님이 미소를 지으시며 말씀하시길…” ,
“예수께서 크게 웃으시곤” …

이런 구절은 없고…

정말..웃으셨을까요? ㅡ..ㅡ?
그림으로는 많이 봤었는데, 성서에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던거 같아요.

저도 궁금해요…!!!

저는요 예수님이
분명히 웃음이 많은 분이셨을 것이라 믿습니다.(또한 눈물도 많으셨을듯~)

예수님께서는 재치있는 이야기들로 하느님의 나라를 설명하셨으니까요…^-^

+ 주님의 평화,

재미있는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제야 답변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바삐 답변을 썼는데 게시판 버그인지 뭔지로 날라가는 바람에
다시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음… 재미있는 질문입니다만, 제가 알기로도 성서에는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이 없는 것 같군요. 슬피 우신 일은 있었는데…

다만 예수님의 여러 모습을 보아서 안웃으셨을리 없지요.
루가복음 6:21에서 보면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분명 우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시고 격려하시는 분이었고, 주님의 격려와 위로를 받은 사람들은 웃었을 터이니, 그 모습을 보고 주님도 빙긋이, 방긋이 혹은 너털 웃음으로 함께 웃으셨을 것입니다.

게다가 주님은 유대의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경건하지 못하게 “먹고 마시기를 즐겨하는” 사람이라는 핀잔을 받지 않나요? 그 먹고 마시는 일은 즐거운 일이고, 항상 웃음이 넘치는 일이겠지요? 예수님과 어울렸던 사람들이 늘 천대받고 비난받아서 이른바 불가촉천민처럼 취급받던 처지에서, 이 사람들과 온통 한바탕 축제를 여니 모두들 기뻐했겠지요.

다만 성서를 기록한 여러 성서기자들이 엄숙한 것을 좋아했거나, 아니면 수난과 부활을 통해 승천하셔서 우리의 구원자로서 나타나신 주님의 그 고귀함에 감탄하여 예수님의 그 인간적인 모습을 감히 그려내지 못하겠노라고 겸손해 했기에 그런 웃음의 기록이 없는지도 모르지요.

200805192155.jpg

영화 자체는 그렇게 좋지 않았지만, “가든 오브 에덴”이라는 영화가 있는데요.
이 영화 포스터 표지(아니면 비디오 자켓)에는 예수님의 너털 웃음이 멋진 배우 얼굴에서 피우나고 있더군요. 옆그림을 보면서 예수님의 웃음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님과 함께 항상 웃으며 걷는 바우로 형제가 되길 바라며

주낙현 드림 ^^

Written by skhfaq

6월 13, 2001 at 1:5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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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로 교단을 옮기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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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본래 모태신앙으로 장로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별 의미 없이 다니던 중 천주교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엇으나 천주교의 교리 중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아 고민하던 중에 성공회를 알게 되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정말 처음 나간것이지만 좋았습니다 한데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아시고 나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2000.9.21)

+ 주님의 평화

답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래 질문에 대한 답변처럼 여간 고민스러운 일이 아니군요. 게다가 이 일을 직접 겪고 있는 처지로서는 상당한 고민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 그리스도교 안에 여러 다른 교파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는 어떤 메시지가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한 성서 안에 여러 책들이 존재하고, 하나의 복음인데도 4가지의 복음서가 있어서 우리의 주인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다채롭게 조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 그리스도교 안에 있는 다양한 교파는 그러한 성서의 다채로움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질문주신 형제(자매)님께 지금 중요한 것은 성공회의 어떤 점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하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대한 자신의 대답과 확신입니다. 교파라는 것은 하나의 창(window)이라고 할텐데, 형제(자매)님께서 그 창을 통해서 받아 느끼고 있는 바람의 성격과 햇살의 기운 등이 무엇인가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며 기도하시면 어떨까요? 이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식별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과 나눌 대화는 그 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통한 식별의 과정을 거친 후에 자신의 생각을 부모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어떨까요? 사실 성공회와 장로교의 교리적 차이는 장로교와 감리교 혹은 침례교의 교리적 차이보다 크지 않다 볼 수도 있습니다. 몇가지 외형적 특징에 따른 거부감과 우려를 보이시는 것일 수도 있으니 차근차근 말씀드리다 보면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이후에 신부님과도 상담하며 이런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도 있구요.

도움이 되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제 경우를 말씀드립니다. 저 역시 장로교 안에서 훌륭한 신앙 교육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감사하고 있는 일이지요.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나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휩싸였지요. 조심스레 알고보니 그것은 장로교에서 가르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하마터면 그리스도 신앙과 장로교라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제한된 가르침을 혼동해서 신앙을 저버릴 뻔했지요. 이 위기를 넘게 해준 새로운 창이 제게는 “성공회”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또 장로교에 대한 오해(장로교의 주장도 다양하니까)도 있었다고 알게 됐지만 성공회을 통해서 접하고 있는 새로운 기운과 햇살이 저를 또한 이만큼 키워준 것에 깊은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저 나름대로 “좋은 몫”을 택한 것이지요. 형제(자매)님께서 깊은 기도와 식별 속에서 좋은 몫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 어느 곳에나 계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부제 드림 ^ ^

Written by skhfaq

10월 3, 2000 at 12:30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