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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와 천주교 – 전례 개혁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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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십시오…

안녕하세요? 신부님!! 미국에서 고생이 많으시죠?? ^^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제가 알고 있는 유일한 성공회 신부님이라는 사실에 신부님과의 만남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수도 공동체에 함께 살고 계신 신부님께서 작년 태백에 있는 성공회 신부님께서 활동하시는 공부방에서 형제들과 함께 며칠 계셨다고 하는데 참 좋았다고 하시더군요… ^^

성공회 신부님과 교류를 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던데…저도 신부님과 그런 교류가 가능하겠죠?? ^^

아~~ 주제에서 벗어나는 말을 오랫동안 했군요…

질문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전례개혁을 했습니다. 성 비오 5세 미사 또는 트리덴틴 미사라고 일컫는 미사를 대신해서 자국어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고, 제대위치도 벽을 보는 것이 아닌 회중을 향하게 되었고 미사가 다소 간소화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티칸 공의회를 주도하신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트리덴틴 미사를 아예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전통도 인정하면서 보편적으로 드릴 수 있는 미사를 제정하셨는데요…

성공회와 가톨릭의 미사 형태가 비슷한 시점에서 성공회의 미사는 어떤 변화를 거쳐왔는지요… 어떤 성공회 성당의 제대를 보니 벽쪽에 제대를 붙여 놓은 곳도 있던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성공회 내에서도 미사전례에 대한 변화가 있었는지, 아니면 독자적인 변화를 거쳤는지…

그리고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도 성공회의 미사는 지금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

질문이 많죠?? ^^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일치하는 그대의 벗 이정은(요한 보스코)수사 두 손 모음…

+ 주님의 평화

이정은 수사님 안녕하세요? 근래에 이 공간을 통해서 자주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에큐메니칼 대화와 협력은 서로의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를 향한 공동의 발걸음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양 교회의 공식적인 채널뿐만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대화와 협력일 때에 그 진정성을 굳건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늘 새로운 물음과 열린 대화의 태도로 좋은 물음을 던져 주시는 이수사님은 이런 대화를 이끌어 가시는 분입니다. 이수사님의 손에 끌려 다니다가 덤으로 얻는 배움이 크다고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례(예전)개혁에 관련해서 말씀드립니다. 아시다시피 그리스도교계의 세계적인 전례 개혁은 이른바 “전례 운동”(Liturgical Movement)이라는 이름으로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추동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제는 역시 형식화되고 화석화된 예배가 아니라 신앙인의 “적극적 참여”(active participation)를 기반으로 한 하느님 백성의 일(레이투르기아)로서 예배를 회복하자는 것이었지요. 그 반세기 넘은 결과물로 바티칸 2차 공의회의 그 유명한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전례 헌장)이 나오게 되었고, 그 영향력은 로마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계에 걸쳐 지대한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례개혁은 “하느님 백성”의 전례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라틴어 미사”가 각 지역 언어 미사로 번역될 수 있었고, 기존의 미사와 성사를 대대적으로 개정하여 1969년과 1970년(로마 미사)에 나왔던 것이지요. 즉 전례 개혁의 요지를 바티칸 2차 공의회의 용어로 정리하자면 ‘하느님의 백성이 백성의 일(의무)인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미사와 성사를 개정하고, 미사의 지역어 번역을 허용한다’는 것이겠지요.

한편 성공회는 흥미롭게도 이미 종교개혁(16세기) 이래로 이러한 전례 개혁의 원칙들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즉 영어(지역어) 성서 번역과 함께, 성서에 기초하면서 초대 교회와 중세 교회를 아우르고 영국 지역에서 발전된 예전 전통(대체로 사룸 미사)를 종합한 성찬례(미사)를 영어(지역어)로 만들어 냈습니다. 아울러 성직자 혹은 수도자 중심으로 되어 있던 성무일도를 개혁하여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로 이루어진 공동 예배의 틀을 마련하여 사용했습니다. 아울러 방만하게 나뉘어져 있던 여러 예전서들을 취합하여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가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예전과 성사, 그리고 사목 예식들을 간소화하고 이를 한 권의 기도서로 만들어서 접근이 쉽도록 했습니다. 즉 1549년으로부터 1662년에 이르는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의 개정 과정을 통해서, 1) 성서에 근거한 전례, 2) 초대 교회 전통에 부합하는 전례, 3) 교회의 일치를 위한 전례, 그리고 4) 모든 신자들이 쉽게 접근하여 사용할 수 있는 전례라는 전례 개혁의 원칙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회의 공동기도서는 성공회가 어떤 교리적 혹은 신학적 선언에 기초한 교회가 아니라, 기도서의 영성에 기초해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교회 (Church in Prayer)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성공회에는 이런 공동기도서에 기초하면서 여러 신학적 성향과 교회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경향의 예배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로마 가톨릭에서 일어난 전례 운동과 비슷한 전례 운동이 19세기에 “의례주의”(Ritualism) 운동이라는 형태로 영국 성공회 안에서 발전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당시의 신학적 운동 가운데 하나였던 옥스퍼드 운동과 만나면서 세계성공회 내에 교회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전통적 전례에 대한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실제로 당시 영국 성공회의 경우 전례복이나 전례 지침 혹은 행위 등이 매우 간소화되어 있었고 성찬례도 일년에 네 차례, 혹은 한달에 한번 꼴로 이뤄지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주일 예배는 공동 예배 의식으로 마련된 “아침 기도”를 통해서 드리는 것이었기에, 이러한 흐름은 매우 새롭고도 획기적인 운동이었습니다. 이런 움직임에 힘입어 성공회는 초대 교회의 다양한 예배들을 다시 연구하고, 중세의 전례 관습을 비판적으로 복원하면서 현재의 로마 가톨릭과 비슷한 형태의 전례가 급속하게 퍼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공회가 현재와 같은 매우 전례적인 교회의 모습을 일반적으로 회복한 것은 이제 겨우 100여년 된 현대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성공회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자국어 전례와 전례 개혁의 자율성을 전통을 갖고 있었던데다, 세계 성공회의 구조 상 각 관구 교회가 독립된 교회로서 치리의 자율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자국어 전례와 전례 개혁(대체로 기도서 개정)의 자율적 권한을 자연스럽게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58년 람베스 회의(세계성공회 주교회의)에서는 이러한 전례 개혁의 자율성과 전례 토착화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공식화함으로써, 당시 그리스도교 전체에서 일고 있던 전례 운동의 흐름에 협력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세계성공회의 각국 성공회는 대대적인 기도서 개정과 전례 개혁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의 유산, 그리고 다른 개신교 전통 교회들과 깊은 교류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바티칸 2차 공의회의 “하느님 백성의 적극적 참여”라는 개혁의 원칙은 역시 성공회의 원칙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전례 개혁에 관하여 이제는 로마 가톨릭, 성공회, 개신교회들이 모두 함께 연구하고 이 연구의 성과를 각 교단의 전통에 따라 반영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러다 보니 이제는 전례의 구조적 특징(특별히 성찬례)과 관련해서는 거의 일치된 형태를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세계성공회는 영국성공회의 기도서인 1662년의 기도서를 모본으로 삼아서 기도서 개정을 진행하였고, 이후 세계성공회 국제 전례 위원회를 통해서 함께 전례 개혁의 신학적 원칙을 연구하고, 각국 교회에 권고하는 전례 문서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각국의 성공회는 이를 원칙적으로 존중하지만, 그 교회의 전례는 그 교회에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계성공회의 전례는 그 형태 상의 특징이 서로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같은 나라에서 같은 기도서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행하는 다양한 전례 관습을 강제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교구에 따라 혹은 심지어는 같은 교구 안에서도 개별 교회에 따라, 다른 전례 관습이 온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러 다른 조건들이 관여하는 바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는 여전히 벽에 붙은 제대를 사용하는 교회가 있는데, 이는 현존하는 성당의 구조상 그런 것일 뿐인 경우가 많고, 새롭게 지어지는 성당에서는 신자들을 향한 제대 배치가 대부분입니다. 또 기본의 벽에 붙은 제대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보존하고 새로운 제대를 신자를 향해 마련하여 미사를 드립니다.

전례에 대한 에큐메니칼 연구가 확대되는 것이 세계 교회의 현실이지만, 한국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전통적인 전례의 구조와 형태를 강조하다 보면 왜 로마 가톨릭 교회를 따르냐는 핀잔이 개신교 측에서 우세하다면, 좀더 자유롭고 현대적인 예배의 모본을 전례 전통의 교회에 도입하려 하면, 왜 개신교적 ‘악습’을 도입하려 드느냐는 또 다른 핀잔이 다른 쪽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것은 성공회의 전례 개혁 선구자들과 로마 가톨릭의 바티칸 2차 공의회 교부들이 올바르게 밝혔듯이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과 대화하며 호흡하는 “하느님의 일인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야 말로 전례 개혁의 원칙이 되어야 하겠지요.

함께 하느님의 백성인 것을 기뻐하며,

주낙현 신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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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서 성찬례의 다양성과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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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낙현 신부님께

신부님께 예전학을 전공하신다기에, 또한 감리교와 성공회는 역사적인(예전적인) 유산을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많기에 용기를 내어, 주의 만찬례(성찬예배)의 성찬기도 양식에 대한 저의 견해를 몇 자 적고, 관련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 질문은 미국 성공회 공도문집 (The Book of Common Prayer) 1979년도판 323쪽부터 시작되는 The Holy Eucharist: Rite One (성찬기도/축성경 제1양식?)과 355쪽부터 시작되는 The Holy Eucharist: Rite Two (성찬기도/축성경 제2양식)의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다 아시는 것이겠지만, 제1양식은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님등이 중세의 전통적인 로마미사경본을 성서적인 원칙에 따라 개정하여 공도문 제1판에 실으셨던 최초의 영어 미사/성찬례에 그 역사적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후 여러 차례 공도문집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 정신과 의식문의 표현들은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제1양식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것이 존 웨슬리를 통해 감리교회에도 전해져서 미연합감리교회가 1988년 성가집과 1992년 예배서를 개정할 때까지, 그리고 한국 감리교회도 최근 들어 새 예배서를 내기 전까지, 적어도 의식문(감리교는 “예문”이라고 부릅니다)에 있어서는 근간이 되어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실제로는 그 예문을 전해준 존 웨슬리 목사님의 의도대로 주의 만찬례가 집례/집전되지는 않았습니다. 한국 감리교회의 경우는 1970년대 이후, 더 축약된 (Sursum corda 와 Sanctus 등이 생략된) 예문만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사정은 새 예배서가 나온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최근 널리 사용되고 있는 제2양식은 성공회, 미연합감리교회, 로마 카톨릭을 막론하고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 재발견 이후, 20세기의 Liturgical Movement의 성과를 반영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신부님이 번역해서 올리신 성찬기도도 이 제2양식을 더 발전시킨 것 같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제1양식이 성찬/성체에의 참여를 통해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과 그에 따른 여타의 축복과 은택을 받아 누리는 다소 개인적인 경건/신심에 초점이 맞춰진 것에 비해, 제2양식은 하느님의 창조섭리와 우리 인간의 타락과 배반에도 불구하고 구세주를 보내시어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느님의 화해의 은총 및 성령의 내림을 통한 Sanctification(축성.성화)과 친교에 강조점이 두어진, 한마디로 우주적인 구속사의 vision 안에 공동체적인 일치의 신학을 잘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근에는 환경/생태적인 의향도 더 부각되는 듯합니다). 제2양식이 지닌 이러 저러한 장점 때문인지, 제가 참예해 본 미국 성공회 성찬예배는 거의 100%가 이 제2양식으로 집전되었습니다. 이건 여담인데, 저와 교분이 있던 말레이시아 출신 성공회 신부님은 기숙사 방에서 아침에 혼자서 조도를 드리실 때, 공도문집 1양식도 아닌 로마 카톨릭의 제1양식으로 하신다는 말씀을 들었던 바, 저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고교회 경향의 종착점은 역시 로마인가? Like J. H. Newman?]

이건 질문인데, 성공회에서도 로마 천주교처럼 교중미사가 아닌 사제 혼자 드리는 사적인 미사가 가능한가요?

진짜 궁금한 질문은, 미국 성공회 또는 한국 성공회에서 이 성찬기도 제1양식으로 드려지는 미사가 몇 퍼센트 정도 되나요? 물론 개개 본당의 분위기나 사제들의 선택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그리고 신부님은 개인적으로 성찬기도 제1양식에 대해서 어떤 입장이신가요?
[예컨대, 시대에 뒤진 것이므로 폐지하거나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시는지, 성공회의 독자적인 것이므로 역사적 차원에서 보존하는 것이 좋다고 보시는지, 좀더 그 가치를 살려야 한다고 보시는지?]

솔직히 저는 제1양식의 개인적(?) 영성이 제2양식의 보편적, 공동체적 영성에서 다소 간과되는 듯한 자기 성찰의 겸비함과 참회의 깊이를 잘 표현해 주고 있기에 좋아할뿐더러, 제2양식과 병행하여 더 널리 사용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속한 감리교회의 컨텍스트에서 말입니다.

혹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깨우쳐 주심 감사드리고요, 또 불쑥 던지는 무례한 질문에 널리 해량하심 기대합니다.

루시안 올림

+ 주님의 평화

루 시안님 반갑습니다. 좀 복잡한 일들이 겹쳐 일어나고 있는 통에 빠른 답변을 마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탓에 더 늦기 전에 시도하는 아래의 답변이 충실할 지 모르겠습니다. 매우 심도 깊고 매우 정확한 이해에 바탕한 질문을 주신 것에 우선 감사드리고,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현재 루시안님이 예를 들어 설명하고, 질문하는 내용은 기본적으로 “1979년 미국성공회 기도서”(BCP 1979)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니 한국성공회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먼저 바로잡으면서 하겠습니다(이것은 편의를 위한 것이지 오류에 대한 정정이 아닙니다.)

즉 The Holy Eucharist: Rite One 은 “감사성찬례 형식 1”로 The Holy Eucharist: Rite Two는 “감사성찬례 형식 2”로 표시하는 것이 최근 한국성공회 기도서 개정과 함께 도입된 구분법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성찬례식에 들어 있는 성찬기도(Eucharistic Prayer)의 다양한 형태를 “양식”이라는 말로 구분합니다.

이에 따르면, 1979년 미국성공회 기도서는 감사성찬례 1형식과 2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1형식에 2개 양식의 성찬기도, 2형식에 4개 양식의 성찬기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2. 감사성찬례 1형식:
정 확히 지적하신 대로, 성찬례 1형식은 1549년 크랜머 대주교의 첫 공동기도서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국성공회의 대표적인 기도서인 1662년 기도서와는 사뭇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미국성공회가 이 형식을 사용하게 된 것은 여러 배경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미국성공회와 스코틀랜드 성공회와의 관계라는 특이한 역사 속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미국성공회는 최소한 1789년 공식 기도서 이후 1형식이 1928년 기도서까지 공식적인 성찬례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1979년 현행 기도서가 나오면서 이를 매우 약간 교정해서 1형식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1형식의 성찬기도 1양식은 1549년 기도서의 영향 아래, 미국에서 1789년 이후로 계속 사용된 것으로, 그 주제는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구속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1979년 기도서는 2양식을 만들어 첨부하면서 그 동안 강조되지 않던 “하느님의 창조 사건과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부각시켰습니다.

3. 감사성찬례 2형식:
1979년 기도서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각각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A 양식은 전통적인 성공회 성찬기도의 신학을 이어 받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B 양식은 히뽈리투스(사도전승)의 성찬기도를 현대화한 것으로 “하느님의 창조 사건과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C 양식은 미국성공회 예전학자의 작품으로 지속되는 하느님의 창조 사건에 깃든 하느님의 현현(계시)에 초점을 둡니다. 마지막으로 D 양식은 4세기 성 바실 전례에 기초한 것으로 동방정교회를 비롯해서 로마 가톨릭, 그리고 감리교와 루터교 등과 대화 속에서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공인된 양식입니다.

4. 성찬례 형식의 선택:
성찬례의 각 형식과 양식에 깃든 의미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고, 교회 공동체는 교회력(교회절기)의 주제에 따라 다양하게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 1형식은 여전히 고어체 영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2형식은 현대 영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블로그에 번역해서 올려두었던 90년 말의 새로운 성찬례는 이런 구분을 따른다면 아예 3형식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포용적 언어”의 사용과 창조로부터 이어오는 구속사의 전개, 동방 전례의 요소를 도입한 것들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인의 성향과, 교회의 시간(교회력/절기)의 주제, 그리고 신앙 훈련의 계획과 더불어 선택할 수 있는 융통성이 있습니다. 물론 개인의 차이에 따라서 좀더 좋아하고 깊은 영성을 느끼는 성찬기도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성찬기도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1형식이 현대 신학적으로도 큰 문제를 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2형식의 성찬기도들이 늘 적절한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다면야 다른 성찬기도가 나올 이유가 없었겠지요.

미국성공회에서는 여전히 1양식을 사용합니다만, 2양식이 더욱 보편적입니다. 그러나 주일에 성찬례가 여러번 있는 경우 꼭 1양식을 아침 일찍 배정해두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리고 특정한 절기에 사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몇 퍼센트라고까지는 정확히 말씀드릴 수가 없겠군요.

5.
한국성공회의 경우는 조금 다르니 별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1965년 기도서의 경우는 위에서 말한 1549년 기도서의 성찬례와 매우 비슷한 성찬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82년 새로운 성찬례가 나오면서, 처음으로 다양한 성찬기도 양식이 마련되었는데, 여기서는 성찬기도 2양식이 바로 1549년 전통의 1965년 기도서의 성찬기도를 현대말로 고친 것이었습니다.

6.
한국성공회의 공식기도서인 2004년 기도서는, 미국성공회와 비슷하게 2 형식의 감사성찬례를 가지고 있는데, 2형식이 짧은 성찬례인 반면에 1형식은 4개 양식을 갖고 있습니다. 1양식은 1549년/1965년 성찬기도를 따르며, 2양식은 2000년 영국기도서에서 따왔고, 3양식은 성 크리소스톰 기도문을 따랐다는 1982년 미사 예문의 3양식을 좀더 손질한 것이며, 4양식은 미국성공회의 경우와 같이 에큐메니칼 감사기도로 인정받고 있는 성 바실 전례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우리 신학의 반성에서 나온 것이 없군요. “우리 기도서에 우리 신학의 전통이 없다.” 저로서는 매우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7.
성공회 사제 혹은 신자들 가운데 로마 가톨릭 미사에 대한 동경심을 갖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제가 알고 느끼기로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상당히 편협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저는 어느 교단의 전통의 성찬례이건 서로에게서 배우며 자기 전통을 풍요롭게 하기를 격려하고 실천할 지언정, 교회 공동체가 함께 합의하여 교회의 전례의 근간으로 세운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신심 행위나 기도를 위해서 다른 교단의 기도나 성찬기도를 사용하는 것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8.
성공회는 원칙적으로 성찬례를 공동체를 통한 하느님 예배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사제가 혼자서 드리는 이른바 “개인 미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성찬례는 은총의 나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굳이 사제 자신의 신심 행위로서 개인 미사를 드리겠다는 것을 강제로 막을 방도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성공회에 그런 분들이 얼마나 될 지 모르겠습니다만.

9.
개인의 기도를 위해서는 성공회는 훌륭한 “시간 전례”(Liturgy of Hour 성무일도) 전통을 발전시켰습니다. 크랜머 대주교는 이를 수도원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신자들이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그 형식 또한 공동체 예배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전례-성무일도의 전통은 이른바 일반 신자들의 공동체 전례인 “캐시드럴 전통”과 소규모 혹은 개인적 기도인 “수도원 전통”의 시간전례로 나뉘어 발전했으니 서로 보완하며 사용할 수가 있겠지요.

10. 뭐 이리저리 세면서 답변이 장황해졌습니다. 아무쪼록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드높이, 주님을 향하여 (Sursum corda. Habemus ad Dominum)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5월 22, 2005 at 3:42 오후

호주 성공회 시드니 교구 – 평신도 미사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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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뉴스 스크랩핑을 하다 흥미로운 기사를 하나 발견했는데요
호주 성공회가 99년 부터 5년간 한시적으로 평신도와
부제의 성찬 집례를 허용했다고 하는데 이후 경과를 좀 알 수 있을까요?

+ 주님의 평화

답변이 좀 늦었군요. 말씀하신 뉴스에 대해서 제 자신이 지난 99년에 성공회 신문에 기사화한 바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의 소식들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시 교구 의회를 통과했으나 당시 교구장 주교님을 그 실행에 찬성하지 않으셨으며, 그 이후에는 여러가지 논란 끝에 교착 상태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드니 교구는 호주 내에서도 매우 보수적인 복음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으며, 흥미롭게도 여성 사제도 인정하지 않는 근본주의적 입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드니 교구와 관련된 소식은 이미 성공회 신문에 몇번에 걸쳐 기사화했으나, 몇년 전부터 이를 제 홈페이지 세계성공회 소식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조만간에 세계성공회 소식란을 재정비할 계획입니다.

아래에 당시의 기사를 덧붙입니다.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복된 대림절기 맞길 바랍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

기사 : 호주 시드니교구의회, 평신도 성찬례 집전 허용 논란 (성공회신문 1999.11.21)

호주성공회 시드니 교구의회는 지난 10월 평신도의 성찬례 집전을 허용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세계성공회 초유의 일로 기록될 이 일은 아직 시드니 교구장 해리 굿휴 대주교의 최종 승인을 기다리고 있으나, 굿휴의 은퇴가 얼마 남지 않아 시간 문제일 뿐이라는 관측과 함께, 굿휴 대주교 자신도 자신의 기존 입장을 철회하고, 이를 인정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한편 호주성공회 관구정 키스 레이너 대주교는 이에 대해 곧바로 논평을 발표했다.

“시드니 교구의회의 평신도 성찬례 집전 허용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명한 레이너 대주교는 “성공회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에게서 연유한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적인 교회의 일원으로 자부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헌장에도 명백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시드니 교구의회의 결정은 공교회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깨뜨리는 행위이다”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성공회 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교회를 만들어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했다. 성공회 종교개혁자들은 주교와 사제와 부제직과 그 고유한 기능을 재확인했다. 그러므로 시드니 교구의회의 결정은 이러한 성공회 종교개혁자들의 원칙들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최종 교회 법정기구인 교회사법재판소는 이미 이러한 문제를 일개 교구 의회에서 결정할 권한이 아니라는 의견을 내놓은 바 있으며, 이런 점에서 이 결정은 호주 성공회의 헌장과 법규에 큰 도전이 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를 피력하면서 이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Anglican News 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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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5, 2003 at 1: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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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조배, 그리고 성체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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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주신부님.

얼마전부터 신부님의 홈페이지를 열심히 방문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의 글들이 저의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장로교인인데, 요즘 부쩍 성공회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성체강복”과 “성체조배”가 무었인지요?

성공회나 루터교회는 장로교등의 일반 개신교와는 달리 성체성사를 중시하고, 주님의 실제임재를 믿는건 알겠지만, 성체조배와 성체강복은 무엇인지요? 또 그걸 언제 어떻게 하는지요? 성공회의 저교회파에서도 그걸 하나요?

성공회에서는 모든 교회가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감실에 보존하나요?

한국 성공회는 상당히 강한 고교회파인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교회파의 경향을 가진 성공회교회나 성직자들도 있는지요?

학업으로 바쁘신줄은 알지만, 상세한 답변을 부탁 드립니다. 신부님의 글이 제게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됩니다.

모쪼록 학업과 사목활동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원하며, 답변 기답립니다. 감사 합니다.

+ 주님의 평화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전에 성공회의 성체 이해에 관련된 답변에서 지나치듯 언급한 내용을 용케 기억하셔서 새로운 질문을 던져 주신 것 같습니다.

사실 성체조배와 성체강복은 성서적인 기원을 갖는다기 보다는 역사적인 기원을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그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원래 성찬례의 원형이 된 “감사의 식사”(유카리스티아)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의 일상적인 공동체 식사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발전과, 그 안에서의 여러가지 갈등 등으로 인해서, 좀더 “예식적인 식사”로 변화되었지요. 그런 가운데서도 공동식사에 참여하지 못했던 사람을 기억하고 먹이기 위해서(교회 성립 초기의 상황), 혹은 주님의 한 몸을 나누는 거룩한 빵과 포도주를 함께 나누지 못한 사람들, 즉 박해로 인해서 감옥에 있거나, 몸이 불편해서 식사에 함께 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그 공동체의 일치와 연대를 기억하는 의미로(이것은 좀더 후대의 상황이 되겠습니다) 이를 보존해서 나중에 전달하기 위해서 함께 기념한 성체, 혹은 축성한 성체를 보존하는 관습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공동 식사로서의 성찬례가 점차 그 성격을 잃게 되었고, 특별히 이단 논쟁과 더불어서 그리스도의 신성이 더욱 강조되는 마당에,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고백했던 축성된 빵(성체)의 위치도 그만큼 격상되는 과정을 겪습니다. 그리고 9세기부터는 실제로 평신도들은 “감히” 영성체를 하지 못하고 그저 눈으로만 보는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지요. 라틴어로 드리는 미사여서 일반 사람들로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미사에 다만 성체 거양(축성된 빵을 들어올리는 일)을 통해서 보이는 성체에 대한 신심이 더욱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공동체의 예배인 성찬례가 끝나고서, 축성된 성체를 일정한 곳에 모셔두고 그 앞에서 경배하 도하는 행위인 성체조배는 이러한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합니다. 성체조배는 그러므로 빠르게는 8세기부터 시작해서 13세기 이른바 대중적인 신심 운동이 강력하게 대두되는 시기에 그 힘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의 사정으로보면 성찬례를 통해서 거양되는 성체를 바라는 보는 것보다는, “축성하여 보존된 성체” 앞에 나가서, 이것을 주님의 실제 몸으로서 생각하며 가까이 대면하고, 그 앞에서 기도하는 행위가 평신도들에게는 더욱 친밀한 것이 되었던 것이지요. 이것은 공동식사, 즉 공동체의 나눔으로서의 성찬례가 퇴색되면서 나타난 하나의 탈출구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성체강복은 바로 이러한 대중적인 성체에 대한 신심이 확대되면서 나타난 부가적인 현상이라고할 수 있습니다. 성체 강복은 말 그대로, 축성하여 보존하고 있는 성체를 가지고(대체로 아주 화려한 성체틀이나 성합에 보관한 상태로 – 이 모양을 아시려면 영화 “미션”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모인 사람들에게 축복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아마 이것은 14세기 초반에 교회 안에서 본격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미사가 있건 없건 간에 이 성체를 담은 성체틀을 가지고서 순행을 한 다음, 이것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축복을 하는 것이지요.

현재 로마 가톨릭 교회에는 이러한 성체조배와 성체강복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성공회에서도 일부에서는 이러한 전통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한국성공회의 경우는 일상적인 성체조배와 성체강복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제정하신 날을 기념하는 성목요일의 기념 성찬례에서 성찬례가 없는 금요일 예식을 위해서 성찬례를 보관하고, 그 앞에서 밤을 세워가며 성체조배(성체수직)를 하고, 그 직전에 성체강복식을 하는 관습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성목요일의 성체조배와 성체강복식은 매우 의미 깊은 예식으로 성공회에는 남아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성체조배와 성체강복식이 천주교에서는 매우 빈번한 것인데 비교한다면, 성공회에서는 매우 축소된 전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개신교와 같이 서방기독교의 중세적인 전통이라면 무조건 거부하는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매우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것이 성찬례라는 맥락을 떠나서 축성된 빵, 즉 성체 자체에 대한 신심으로 이해된다면, 그리고 강복식이 축성된 성체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는 이것은 신학적으로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성찬례의 연장 선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 여전히 현존하시며, 우리의 삶 속에 함께하신다는 의미로서 이해되고, 또 그런 신비를 좀더 깊이 명상하기 위한 것이라면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이것이 공동체의 예식인 성찬례의 의미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두번째 질문하신 축성된 성체의 감실 보전 관습은 성공회에서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일차적인 목적은 성체조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찬례에 함께 참여하지 못했던 사람들과 나누기 위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가운데서 축성한 성체를, 여러가지 사정으로 함께 참여하지 못했던 사람이 나눔으로써, 한 몸을 나누는 공동체 의식,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와 연대를 경험하기 위한 것이지요.

세번째 질문은 한국성공회가 고교회파 전통에 서 있는데 과연 저교회파는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국성공회가 물론 고교회파 전통의 선교사들의 영향 속에서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두부 자르듯 반듯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이것은 하나의 경향이라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한국성공회는 세계성공회의 다양성 속에서 함께 교류하고 있고, 또 한국의 다른 그리스도교 형제 교단들과 교류하고 있으므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저교회파라고 하는 것도 굳이 이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다양한 경향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가운데 어떤 경향이 좀 두드러지는 것이라고 하겠지요. 역시 한국성공회에도 저교회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들이 매우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답변 시도가 용두사미가 되지 않았는지 걱정스럽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된 형제

주낙현 신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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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6, 2003 at 1:5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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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의 성찬례 이해, 성체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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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찬미받으소서

안녕하세요? 신부님
저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예전에도 질문을 드린 적도 있었고, 몇 번 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았던
천주교 신학생 이정은(요한 보스코)라고 합니다.
올해 수도회에서 첫서원을 하고 신학교에 복학을 하게 됩니다.

그건 그렇고 질문이 있습니다.
성체에 관한 문제인데요…
천주교에서는 미사 중에 거양성체를 통해
예수님께서 빵의 형태로 실제로 임하신다고 믿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믿고 있지요.
그런데 성공회에서는 성체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있습니까?
개신교회처럼 그저 상징적인 의미로 쓰이나요.
아니면 성공회에서도 미사 중에 제병이 예수님의 몸으로 변화됨을 실제로 믿고 있나요? 언젠가 도서관에서 성공회 미사통상문을 본 적이 있는데(옛날 것 같더군요) 가톨릭 미사와 흡사함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가톨릭은 감실에 성체를 모셔두고 기도도 하고
특별한 날에는 성체강복도 하는데
성공회에서는 어떻게 성체를 가르치는지 답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성공회 미사에 참례해 보고 싶은데
혹시 동영상으로 볼 수는 없는지, 아니면 어디어디에 성공회 성당이 있는지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 주님의 평화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는군요.
지난 첫 서원식 소식을 듣고는 서로 내통이 없었지요?
그간 잘 지내시고, 학교에도 복학하신다니 잘 지내고 계신 것이 확실하군요. ^^

질문하신 내용에 대해 간단히 답변 드립니다.
우선 이 게시판 여러 곳에 로마 가톨릭 교회와 성공회의 성찬례 이해에 대한 차이를 설명한 단편들이 있습니다. 검색어로 한번 찾아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시 간단히 언급한다면 이렇게 되겠군요.

1. 성공회는 기본적으로 “실재론”(Real Presence)을 따르는 경향이 짙습니다.

우선 “경향이 짙다”는 말에는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신앙적 태도도 있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즉 주류는 대체로 “실질적 임재”를 믿고 따르지만, 신학적 배경에 따라서 그 이해가 조금 엇갈리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공회가 말하는 “실질적 임재”(Real Presence)는 로마 가톨릭의 이해와는 조금 다른 면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임재는 축성된 빵과 포도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성찬기도를 드리고 있는 예배 공동체 전체에 함께 머무신다는 의미에서 “실질적인 임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말하고 있는 “성체 변화의 순간”과 같은 것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게다가 로마 가톨릭 교회도 이른바 기존의 “화체설”에 대한 주장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는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의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쉴레벡스나 칼 라너와 같은 신학자들은 어떤 “물질”의 변화라기 보다는 “의미 변화” “목적 변화”라는 것으로 “화체설”을 재해석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제가 수업을 듣고 있는 로마 가톨릭 프란시스칸 신학교에서는 이런 변화된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변화 속에서 그리스도교가 에큐메니칼 대화를 진척시키는 기회가 되어서 기쁘기도 합니다. 특별히 이번에는 “성사신학”을 듣고 있으니 이런 대화의 근거를 성찰하는 중요한 기회라고 생각해서 마음이 설레기도 하는군요.

하여튼 이런 변화된 사고 방식은 성공회의 이해와 흡사합니다.

그러나 성공회는 개신교에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상징설”과는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물론 그 “상징”이라는 말에 대한 정의 자체로부터 많은 논란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성찬례는 단순한 “기념”이나 “상징”만은 아니요, 성찬례를 거행하는 예배 공동체 자체 안에 “확실하게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신다”는 신앙을 갖고 있는 것이지요.

2. 성공회도 축성한 성체를 감실(성막)에 모셔둡니다.

그러나 그 목적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같은 점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우선 같은 점을 말하자면…

축성한 성체를 “남겨 두는” 것은 그 성찬례에 참석하지 못했던 사람, 즉 병자들이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위해서, 나중에 직접 이를 가져다가 성체를 영하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이로써 이 성체를 축성했던 신앙 공동체의 예배 안에서 우리 모두가 신앙적으로 일치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체 조배의 문제에서는 좀 다릅니다.

성공회에도 일부 교회에서는 성체 강복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여기에 신학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성체조배와 관련해서, “모셔둔 성체”(Reserved Sacrament) – 여기에다가 영문 표기한 것은 많은 개신교 예배학자들이 이 영어를 번역하면서 ‘남겨진 성례전’이라는 희한한 번역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그 뜻을 알 수 없거니와, 예전에 대한 기초 지식이 있는지 궁금할 정도지요 -를 향한 신심 행위가 타당하냐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공회는 기본적으로 성찬례에 참여하는 신앙 공동체의 예배 행위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친교와 교류를 가장 우선시하기 때문에, 축성된 성체 자체를 물질적인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는 경향은 드뭅니다. 그래서인지 성공회에서는 성체조배는 거의 없습니다. 다만 성체 강복식은 남아 있는데, 이는 대체로 성찬례를 거행하고 성체를 모셔두는 과정에서 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서, 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대목에서 제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인다면, 저는 이런 이해에도 불구하고 성체조배를 격려하고 싶습니다. 여기야 말로 좀더 깊은 의미의 “상징설”이 적용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셔둔 성체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교회에 나오지 못한 사람에게 나눠주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교회 공동체의 일치에 대한 강력한 상징이고, 또 그 축성된 성체는 신앙 공동체가 예배하면서 그리스도를 경험한 바로 산 “증거”이기 때문에 그 경험에 대한 강력한 “상징”입니다. 그러나 성체조배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함께 만나고 축하했던 자신의 삶과 신앙, 그리고 그 안에 머물러 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낀다는 것은 신앙의 근거를 다시한번 성찰하고 묵상하기에 더 없이 좋은 “매개물”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성체조배를 개인적으로 찬성하고, 이것은 기존 성공회의 신학적 입장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성찬례 자체와 병립하거나 이를 능가하는 것이어서는 절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3. 성공회 성찬례에 참석하시려면….

아마 광주 신학교에 다니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지방에서는 성공회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군요.

언제 서울에 올라오실 기회가 있으시면, 시청역에서 가까운 성공회 서울 주교좌 성당을 찾으시면 좋겠습니다.

너절한 답변이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안에서 이런 사귐을 갖게 된 것에 감사드리며,
주님의 사랑 가운데 “수도정진” 하십시오.

주낙현 신부 합장 ^^

Written by skhfaq

2월 14, 2003 at 12:45 오후

성찬례에 대한 생각 – 실재설과 공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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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신부님. 저는 캐나다 밴쿠버의 캐나다 성공회교회를 다니는 한 형제입니다. 원래 개신교를 다녔지만, 성공회의 liturgy가 너무 좋아서 성공회로 입교하였습니다. 궁금한 것이 몇가지 있어서 여쭙니다. 조속한 답변 부탁 드리겠습니다..
….

질문2) 성공회에서 받아들이는 성찬신학은 루터교회와 같은 공존설인가요?
….

너무 궁금도하고, 조금 혼란스럽기도해서 질문 드립니다. 신부님의 글이 멀리 캐나다에서도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조속한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안에서 유진

답변 이어집니다. ^^

2. 성찬례에 대한 생각 : 실재설과 공존설

성찬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은 오랜 신학적 논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도 판가름 나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빵과 포도주 안에 들어 있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성공회는 성찬례 전반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애매한 입장을 취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더 솔직한 말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성찬례를, 특히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사실을 고백하면서도 그 신비 전체를 아우르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 안에 들어있는지, 물질이 변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성찬례 전체를 통해서 우리 안에 우리 곁에 우리 앞에 계신다는 것이 애매하지만 좀더 옳은 접근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루터교의 공존설도 다른 어떤 교단의 성찬례 교리도 실은 하느님의 현존, 그리스도의 현존을 깊이 느껴보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나온 하나의 해설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그런 해설을 두부자르듯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지요.

다음 답볍은 아래에

Written by skhfaq

8월 28, 2002 at 11:2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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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례는 희생제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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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신부님. 저는 캐나다 밴쿠버의 캐나다 성공회교회를 다니는 한 형제입니다. 원래 개신교를 다녔지만, 성공회의 liturgy가 너무 좋아서 성공회로 입교하였습니다. 궁금한 것이 몇가지 있어서 여쭙니다. 조속한 답변 부탁 드리겠습니다..

질문1) 성경 (히10:12,14) 에 보면 예수님의 희생제사는 단한번 (one sacrifice)으로 드려졌다는것이 명백한데, 왜 천주교회와 성공회(일부인지?)는 성찬례를 십자가 희생제사의 반복으로 보는지요? 과연 초대교회에서도 성찬례를 계속되어지는 희생제사의 반복으로 보았을까요? 아무리 책을 봐도 아닌것 같은데… 성찬례를 희생제사의 반복으로 보는것은 초대교회 이후 몇세기가 지난후 교권강화의 차원에서 확립된 신학은 아닌지요? 복음서에 나와있는 예수님의 성찬제정사를 보면, 아무리 봐도 희생제사의 반복의 개념은 없는데, 왜 이런개념을 주장할까요? 이에대한 성공회의 정확한 입장은요? 성공회에서도 성찬례를 제사로 보기에, 성직자를 “사제”라고 하지는 않나요? 신약성경에 나타난 성직자의 개념에서 사제는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성직자를 사제라고 하는지요? 사제에 해당하는 영어 “priest”는 헬라어 “presbyteros”에서 왔으니 오히려 장로라고 번역해야 되는게 아닌지요?

….

너무 궁금도하고, 조금 혼란스럽기도해서 질문 드립니다. 신부님의 글이 멀리 캐나다에서도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조속한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주안에서 유진

+ 주님의 평화

유진님 안녕하세요? 캐나다 밴쿠버시라구요?
얼마전까지만 해도 상당히 먼 거리에 있었는데 제가 지금 미국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근처에 와 있으니 상당히 가까워졌나요?

같은 교회 안에서 만나게 돼서 대단히 반갑습니다.

그리고 좋은 질문에 감사드립니다. 제 나름대로 답변을 간략히 시도하겠습니다.

1. 성찬례는 희생제사인가?

성찬례는 희생제사가 아닙니다. 물론 천주교에서 반복되는 희생제사로 주장하고 그 여지가 지금도 남아 있지만, 이미 성공회와 천주교는 성찬례에 대한 교리적 합의 문서에서 희생제사의 반복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것이 교회 현장에서까지 적용되고 가르쳐지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듯합니다. 물론 천주교의 많은 교회들, 그리고 성공회의 극히 일부분의 교회들이 아직 희생제사의 관념을 가지고 있지만 이미 신학적인 성찰로는 판가름이 난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성찬례를 예수님을 통해 이뤄졌던 구원의 희생제사가 반복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원의 희생 제사를 축하하며, 그에 감사하여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봉헌례라 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찬의 전례 때에 우리 봉헌물과 함께 성찬 봉헌물(빵과 포도주)를 함께 들어 바치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봉헌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신자들은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사제라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잘 지적하셨듯이 그 말이 근원이 “장로”를 뜻하는 “presbyteros”에서 나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던 것이 3세기쯤에 제사를 드리는 ”사제“라는 의미의 ”sacerdotes”로 번역되었지요. 그러나 그것이 꼭 교권 강화만을 위한 것이었다고는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저 이렇게 이해하면 어떨까요? 아까 성찬례를 우리 자신을 드리는 봉헌례로 했듯이, 이 봉헌의 제사를 집전하는 분으로서 사제라고 말입니다. 즉 사제란, 어떤 예를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니, 그렇게 생각해도 무리가 없겠지요? 이는 것은 개신교에서 말하는 목사(pastor)와는 조금 다르지요. 목사라는 말에는 양떼를 돌본다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이러한 봉헌의 의미는 찾아볼 수 없거든요. 그러니 성찬례를 중요시하는 성공회에서는 사제라는 용어가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음 답변은 아래에…

Written by skhfaq

8월 28, 2002 at 11: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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