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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 성서가 나를 이끄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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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가 나를 이끄는 곳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The Rev. Barbara Brown Taylor (미국성공회 사제, 피드몬 대학 및 컬럼비아 신학교 교수)

4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아리안 논쟁이 극에 달했을 때 어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본질에 관한 논쟁을 하지 않고서는 빵 반죽을 사러 가게가 갈 수 없을 정도라고 쓴 적이 있다. 그분은 영원한 성부의 영원한 성자인가? 아니면 그분이 그렇지 않은 특정한 시간이 있었는가? 이 문제로 어떤 주교들이 다른 주교들에게 주먹다짐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황제가 끼어들어 이를 조정해보려는 동안에, 이 논쟁은 도시의 거리에도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논쟁에서 아타나시우스파는 요한복음에서 뽑은 구절을 내세웠고, 아리우스파는 마르코복음에서 나온 구절을 가지고 응대했다.

초대 교회사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그 후대에 살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그런 다음 수업을 준비하고 학생들 페이퍼에 점수를 매기는 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일은 2003년도 미국성공회 총회가 있기 전이었다. 그러니까 미국 전역에서 대표들 과반수가 세계성공회 사상 최초의 공개적인 동성애자 주교로 뽑힌 존 로빈슨 신부의 선출을 인정해 주기 직전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내가 살고 있는 미국 조지아 주 북부는 어떤 점에서 콘스탄티노플의 거리와 비슷해지고 말았다. 성공회 신자들은 동성애 문제에 대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지 않고서는 어디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아직까지는 이 일로 주먹다짐이 있었다는 소식은 보고 되지 않고 있지만, 이 논쟁으로 교회가 갈라지고 재정 문제까지 위협받고 있다. 게다가 이 논쟁은 발끈 달아오른 몇몇 성서의 구절과도 결부되었다. 로빈슨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복음서의 구절들을 선호하고,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울로 서신의 구절들을 들이대고 있다. 이 불꽃 튀는 접전을 보고 있노라면, 4세기의 안토니오 성인이 문명사회를 벗어나 광야로 피신한 까닭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누가 자기편이 되느냐에 따라서 뱀과 하이에나가 멋진 한 조를 이룰 형국이다.

내가 시장에 나가는 데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 내가 동성애에 대한 어떤 “입장”을 갖고 있지 않다는데 있다. 대신에 내가 갖고 있는 것은 그저“삶”에 대한 생각이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은 하나의 역사인데, 그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매우 중대한 부분을 맡아서 움직이고 있다. 사실 동성애“이슈”를 접하게 되면, 나는 일순간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사실 나는 이렇게 큰 이슈를 머리 속에서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비늘 같은 것이 내 눈을 덮고 마는 것이다. 대신에 나는 그저 내가 학교에서 튈지 안 튈지를 걱정해주었던 가정교사를 생각한다. 나는 사제직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내게 가르쳐 주는 사제를 발견하고, 또 월말에 이르러 음식살 돈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을 때 나를 위해서 통닭 한 마리를 구워준 교수님을 눈에 그린다. 또 에이즈(AIDS)로 죽어갔던 젊은이들 열 몇 명의 얼굴들을 떠올리고, 그들이 얼마나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 마지막 삶을 불태웠는지를 생각한다. 나는 16살 먹은 친구의 얼굴을 생각하며, 여전히 진정한 첫사랑을 기다리고 있음을 본다. 그는 혹시라도 자기가 동성애자라고 느껴지면 바로 자살해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친구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들이 내 시선에 그려지는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들을 어떤 하나의 입장으로 환원해버리는 것은 어떤 경우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건 마치 얼굴 없는 몸통만 바라보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한 때 성문제를 가지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길이며, 우리가 가진 양쪽의 진리를 좀더 확장해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태도를 거의 포기한지 오래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적어도 인생의 이야기가 “진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오직 성서만이 진리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동성애자 그리스도인들의 위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이 1950년 전에 쓰인 성서의 다섯 구절 가운데 하나만을 가지고 그 다양한 성서 기자들이 의미한 것이 이것이었네 아니네 하는 일에 달라붙어야 한다고 한다.

나는 성서를 사랑한다. 나는 내 반생애를 이미 성서를 읽고 성서를 연구하고, 성서를 가르치고 또 성서의 말씀에 따라 설교하면서 살아왔다. 내 주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영감으로 성서의 모든 말씀을 알 수 있다는 것과는 달리 그 말씀 하나 하나를 깨닫진 못하지만, 나는 성서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며, 이 만남을 통해서 내 일상의 삶 속에서 신구약 성서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아가는데 내 자신을 던지고 있다. 그런데 나의 이런 생활 속에서 매우 특이한 일이 일어난다. 내가 성서에서 배운 것을 실행에 옮기려 하면 성서는 내게 등을 돌리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 어떤 의도를 건져낼라 치면, 성서는 그 종이에 찍힌 말에 기대어 집을 지으려는 나의 의도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성서는 내게 살며시 입 맞추며 세상으로 나를 떠민다. 그리고 약속한다. 하느님을 찾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성서의 페이지에도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살덩이에도 있다고. 율법서를 읽든지 복음서를 읽든지, 기록된 말씀은 나를 떠밀어, 이 지상에서 그 어떤 갈등과 투쟁, 그리고 깨달음과 실패가 있다 하더라도 나의 이웃들과 함께 정의와 평화를 살아감으로써 그 말씀을 몸으로 체현하라고 촉구한다.

나는 이 길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 새로운 이해에 다다르게 되었다. 즉 성서에 기록된 말씀뿐만 아니라 육신이 된 말씀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본이 신뢰할 만한 것이므로 그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그 책에 있는 내용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책에 있는 내용을 벗어나 삶에 말씀을 적용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런 다음에 그만 시간이 다됐으니 그만 중지하라는 경고를 무릅쓰고 관행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사랑하는 꺼림직한 결과와도 대면하라는 의미이다.

요즘 나는 모든 것이 하나의 입장으로 들린다고 생각한다. 어떤 고백도 그렇게 들린다. 나는 무엇이 옳은지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내가 누구를 사랑하며,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까지 내가 전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의 말씀이 나와 함께 진행되는 일을 조명해 주리라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 내 인생을 걸겠다.

(주낙현 신부 역)

Copyright 2003 by Barbara Brown Taylor. Translation in Korean by Nak-Hyon Joo with permission

출처: 크리스찬 센츄리 The Christian Century – Oct. 23, 2003

Written by skhfaq

11월 22, 2003 at 1:3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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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읽기, 그리고 축하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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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찾아뵙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객지 나가서 공부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부디 좋은 공부 많이 하셔서 교회에 큰 도움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요즘은 대선이 점점 가까와 오고
아직도 혼미한 나라 상황에 저 역시 혼미스러워집니다.
전처럼 무엇이 바른 길인가가 어렵기보다는
몸이 따라주지 않는 마음의 길이 더 멀게만 느껴집니다.
신부님도 멀리서나마 나라를 위해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요즘 저는 성당에서 성서모임에 나가고 있습니다.
고향 떠나 나가는 모임이라 서먹서먹하기도 하고
나이들어 나가는 모임이라 또래도 없지만
그냥 마음을 비우고 나갑니다.
정말로 그냥요…

그런데 성서모임에 나가면서 느낀 건데
성서를 정독하다보니 참 새로운 것같습니다.
얼마 전에 신부님께서 소개해 주신 책들을 보느라고
진도 맞추면서 성서를 속독하던 때와는 달리
천천히 정독하다보니까 완전히 새로운 맛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거룩한 독서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조만간에 제 친구 아들의 대부가 될 것같습니다.
제 친구의 아내가 저에게 대부를 부탁하더군요.
흔쾌히 수락하긴 했지만
제가 과연? 하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더군요.

신부님 그런데 거기서는 무슨 공부를 하시나요?
전공이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이번에도 교회사 공부하시나요?

그런데 교회사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옥스포드운동이 무엇인지 좀 설명해 주실 수 있으세요?
백과사전 정도로는 정확히 감이 오지 않더군요.
그리고 옥스포드와 캠브리지의 신학 경향에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신부님. 요즘 미국이 제정신이 아닌 것같은데
거기 대학 분위기는 어떤가요?
제 친한 친구가 일리노이에 있는데
그곳 분위기는 아무래도 부시에게 비판적인 경향이 있다고 하던데요.
그곳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하여간 요즘 나라 안팎이 참 비관적인 상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하느님께서는 제 아무리 비관적인 상황도 절대로 헛되이 흘려보내시려고
주시는 것이 아니겠지요?
그리고 모든 것이 다 썩어갈 것같은 바로 그때 꼭 좋은 싹을 내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꼭 그리되겠지요?
신부님. 신부님도 많이 기도해 주십시오.
저도 열심히 기도하고 실천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 주님의 평화

아타나시오 형제님 안녕하세요?

댓글이 많이 늦었습니다. 차림을 주문하라고 문을 열어놓고서도 손님의 요청에 댓구도 하지 않는 못된 주막이 되어버렸습니다.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성서연구 모임에 참여하신다니 기쁩니다.
역시 경전은 “정독”하는 맛을 길들여야 합니다.
성서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문제는 “경전”에 대한 비판적 시각으로 시작하고
어떤 의구심을 통해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순기능이 있기는 합니다만
한편으로는 그 깊이를 음미하지 못하게 하는 역기능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자락을 다잡아 갈 수 있을까요?
아마 아타나시오 형제님이 그 좋은 출발과 모범을 보여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여기 수업때문에 “프란시스” 성인의 글을 한 학기 동안 읽었습니다만,
수업에 쫓겨 읽는 것이 아니라, 곰곰이 되새겨 거듭 읽는 맛을 이제야 조금씩 알겠습니다.

대부가 되신다니 축하드립니다.
이 편지가 꽤나 늦은 것이니 이미 되셨겠습니다.
그 책임에 항상 부담(?)을 가지시고 신앙 생활하시면 좋겠습니다.
대자녀 때문에 대부모가 신앙적으로 성장하는 면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 전통은 매우 중요한 사목적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미를 떠나서… 많이 기도해주십시오. 대자녀를 위해서….

저는 이곳에서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기존에 공부하던 교회사도 여전히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만,
새롭게 “예전학”(전례학)을 공부하는 것이지요.
이 두 가지에서 “성공회 신학”이라는 것도 기웃거릴 예정입니다.
아무래도 신앙적 실천과 신학적 성찰이 만나서 꽃피우는 곳은
“예전”이 아니겠는가 하는 고민을 좀더 진척시켜보려는 시도인게지요.
어리버리한 첫 학기이지만 나름대로 알차게 보내고 있고,
그런 고민이 잘 제대로 된 것이었다 싶어서 우선은 만족하고 있습니다.
뭐 갈 갈이 머니 안심은 금물이지만.

옥스퍼드 운동은 다음 댓글에….

Written by skhfaq

12월 3, 2002 at 11:4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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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권위 및 성공회에 대한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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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안녕하십니까. 궁금한 것이 있어서 문의를 드립니다.

성공회도 다른 개신교 처럼 ‘성서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나요.

저는 개신교를 6개월 정도 다닌 경험이 있는데, 지금은 성공회나, 로마 카톨릭이나, 러시아 정교회를 다니려고 합니다. 카톨릭은 인터넷이나 서적으로 조금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나, 성공회는 정보를 얻을 길이 별로 없었습니다. 개신교에 다닐 때 죤 스토트의 ‘십자가’와 ‘성령’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죤 스토트가 성공회 신부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성공회가 로마 카톨릭과 결별한 뒤로 종교 개혁이 어떤 식으로 일어났는지도 알고 싶습니다. 다른 개신교가 사제에 의한 종교 개혁이라면, 성공회는 주교에 의한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글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성공회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개종을 신중하게 하고 싶어서, 먼저 책들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성공회에 3번 정도 나간 적이 있는데, 미사가 정말 좋더군요.

제가 개신교에 다닌 경험과, 주변의 개신교도인 친척들과 안면이 있는 분들, 그리고 목사님들과의 가벼운 경험으로 제가 느낀 바로는 ‘성서만으로’라는 교리는 너무 위험하지 않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서의 자의적 해석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난무하는 교리와 부도덕으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서도 전통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하나님)을 성경만으로 가두어 둘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회 신자분들은 스스로 개신교도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그러면 성공회도 ‘성서만으로’ 구원을 얻는 다고 가르치는지 그리고 선행은 구원을 받는데 전혀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 주님의 평화

안녕하세요?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공회의 개신교 정신과 관련된 성서 이해의 문제와 성공회의 신학적 특징에 대한 상당히 광범위한 질문을 주셨군요. 갑자기 “허걱”하는 느낌이 듭니다. ^^

이 광범위한 질문에 조밀하게 답변할 처지가 아직 안되기도 하고 하니까요.

이미 신앙의 권위로서 성서를 바라보는 시각과
신앙에 의한 구원과 인간의 선행의 문제,
그리고 성공회의 신학적 태도 등에서는

이 게시판에서 조금씩 다룬 적이 있으니,
시간을 내셔서 잠시 살펴 보시겠습니까?

아울러 예전에 써둔 성공회에 대한 소개의 글과 그에 관련된 짧은 논문을 첨부하니
이 글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위에 첨부된 화일 : 성공회 신앙의 역사적 이해의 문제들
그리고, 첨부가 되지 않아 링크합니다.

세계 성공회 소개 문서 다운로드

그리고 필요하시다면 제가 일하는 성공회 선교교육원에서 펴낸
[성공회 신앙의 이해]라는 작은 책자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필요하시다면 보내드리겠습니다. 연락처를 알려 주세요.

다시 질문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주낙현 신부 합장 ^^

Written by skhfaq

7월 19, 2002 at 11:1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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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원문 및 번역 그리고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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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젓번 질문에 친절하고 상세한 답변을 주셔서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소개해 주신 책들은 주문했으니 곧 도착할 것입니다.
꼭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궁금한 점이 있어서 한가지 더 여쭙고 싶은데요.

요즘 국내에서나 미국에서 성서 번역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듯합니다.
최근 표준새번역에 대해서도 말들이 많은 것같고
미국에서도 리빙성경이라든지 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쏟아지고 있는 것같은데요.
성서 번역본들의 종류와 성격에 대해 한말씀 해주시기 바랍니다.
검색해보니 말씀보존학회 사람들이 쓴 글들만 잔뜩 나와서
그냥 덮어버리고 말았는데
기껏해야 논란이 많다는 얘기밖에는 찾을 수가 없군요.

한글 성서 번역본들의 종류와 성격, 영어 번역본들의 종류와 성격에 대해 궁금합니다.

저는 대개 의역과 직역을 양끝으로 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려니 하는
생각 정도 외에는 별다른 지식이 없습니다.
텍스트의 종류라든가 번역상의 원칙, 오역 유무 등에 대해
학계에서 평가되는 부분이 있을 듯 싶은데요…
제가 뭐 번역본을 비교해가며 읽을 만한 실력이 되는 것도 아니고
다만 번역의 차이가 어떤 인식의 차이에서 나오며 어떤 결과를 낳는 것이기에
그처럼 번역을 놓고 많은 논란이 오가는지 궁금합니다.

균형잡힌 신부님의 의견을 꼭 듣고 싶습니다.
(저는 원래 좀 시건방진 데가 있어서 종교에 관한 한 남의 말을 잘 신뢰하지 않습니다. 신부님께서 대단히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고 계신 분 같아서 이런 질문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주님의 평화

안녕하세요? 제 볼품 없는(?) 답변이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

벌써 책 주문을 하셨다니, 성서연구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신 것 같습니다.
성직자인 저로서는 오히려 많은 책들에 먼저만 쌓아두고 있는데,
깊이 반성할 일입니다. 반성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머리를 이렇게 시작한 것은 사실, 성서 번역과 같은 난해한 문제(?)에 대해서
제 자신이 별로 자신이 없다는 변명을 가려보자는 수작이지요.
성서 번역에 대한 논란은 기본적으로 교회 역사 전체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질문은 상당히 광범위한 질문이이서 답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지난번에 간단히 덧붙여 쓴 대로 성서 번역의 성격 등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참고 도서와 성서 개론서 등을 살피시면
성서 번역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올 겁니다.
오히려 그 분들이 전문가이시니, 먼저 그 책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지 않겠어요?
그 다음에 이야기를 좀 더 진척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질문 내용은 상당히 광범위하거든요. ^^

하여튼 성서 자체가 고대 문서이기 때문에
언어 자체의 문제, 그리고 문화와 역사에 따른 의미 변화의 문제,
그리고 그것을 다른 문화권과 역사적 경험 속에서 번역해내는 일과
해석의 문제 등이 복잡하게 엉켜 있습니다.
게다가 성서는 기본적으로 원문이 없고 모두 ‘사본’의 결집이라고 해야 하니
이런 혼란은 원초적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여튼 제 답변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니,
참고할 만한 성서본문 및 번역 연구 전문 사이트를 소개하지요.
http://www.bskorea.or.kr/appendage/appendage.htm
여기서는 우리말 성서 번역의 계보와 성서 원문과 번역 등에 대한 논문 등
자세한 참고 자료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나치듯 언급하신 “말씀보존학회”는 요즘 성서 번역 문제를 두고
맹위(!)를 떨치는 위협적이고 위험한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미 이 질문과 답변란에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말씀보존학회”를 검색어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위의 문제에 관해서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성서 원문 지상주의”랄까, 뭐 이런 것들은 근본주의적인 “문자주의”의
반대 면일 가능성이 높거나, 그럴 위험이 많습니다.
성서에 대한 번역과 해석은 늘 인간의 조건이라는 한계 내의 작업이므로
이에 대한 겸손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성서 번역을 비교해 보는 것과 더불어서,
주석과 같은 딱딱한 저서가 아니라, 좀더 느슨한(?) 서적을
함께 읽을 것을 권해 드립니다.

한 권 추천한다면, 성공회 주교님이 쓰신 요한복음서 묵상집인데요,

스테프 버니 [놀라운 변화] 박태식 옮김 (생활성서사)

역시 볼품 없는 답변입니다. 그래서 ? 가 많군요 ^^
도움이 될까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

Written by skhfaq

6월 25, 2002 at 11:02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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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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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저는 예전에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은 적이 있으나
지금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 냉담자입니다.
물론 신앙인이라기보다는 무신론자에 가까운 사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동양고전에 관심이 많고
예수에 대한 관심 또한 많아 성서를 즐겨읽고 있습니다.
몇차례 여기 들어와 글들을 읽어보면서
부제님이 참 균형잡힌 시각을 가진 성직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궁금한 점 몇가지를 여쭤 보려고 합니다.

저는 성서를 문자그대로 믿지 않습니다.
다만 성서나 기타 비정경문서들이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예수의 모습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기독교를 반대하거나 의미없는 종교로 치부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교단들의 성서 해석은 지극히 문자중심적이고 비현실적이며
예수의 가르침보다는 예수의 이름에 집착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그리 좋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국내 교단 사정 때문인지 성서의 주석서를 찾아 읽어 보려 해도
별로 개방적이고 현실적인 해석은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최근엔 영어권 문헌을 찾아보려고 하는데
부제님께서 영어권 문헌들 가운데 성서번역본들의 차이와 장단점, 추천할 만한
주석성서를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직장인이며 개인적인 취향때문에
공부를 하는 사람입니다.
부제님의 추천이 제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 주님의 평화

아타나시오 형제님, 안녕하세요?

아타나시오라는 세례명이 주는 인상은 매우 강력하지요.
그리스도 교회의 형성기에 교리적인 혼란을 매듭지었던
학구적이며 강인한 신앙의 소유자가 머리 속에 그려집니다.

신앙에 “냉담‘이라는 말씀에 마음이 조금 아픕니다.
게다가 개인적으로 “냉담”이라는 말이 적절한 말인가에 대해서
의문도 가지고 있고 있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교회의 입장을 대변할 뿐
신앙인 자신의 고민과 기도를 반영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여튼 자칭 천주교의 “냉담자”이신 아타나시오 형제님의 질문에 감사드리고
제 나름대로 조언을 드리겠습니다.

성서에 대한 이른바 “문자주의적 해석”은 이미 신학계에서 배격된지 오래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한국 교회의 그 태생적인 근본주의적 경향 때문에
이를 반성하지 못하기 일쑤이고, 사실상 따져보면, 그것은 문자주의적 해석이라기 보다는
“교리주의적 해석”을 성서 구절에 덧 입혀 근거를 내세우려는 태도로 밖에 안보입니다.
이 때문에 오히려 교회는 깊은 신앙의 탐구자를 잃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답변을 원하시는 것이 성서연구를 위한 주석서나 참고문헌이니
그에 대한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아타나시오 형제님께서는
한국교회의 성서 해석에 대한 비관적인 견해를 밝히셨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한국의 신학 수준, 특히 성서 신학의 수준은
세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주장이 교권에 묻혀 있을 뿐이지요.
그래서 우선 다음과 같은 우리말 서적들을 소개해드립니다.

우선 성서 읽기의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한 소개서입니다.
이는 문자주의적 성서해석을 탈피하기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지요.

  • 김재성 외 [성서를 읽는 11가지 방법] (생활성서사)

이 책은 한국의 개신교와 천주교 학자들이 함께 모여서
성서에 대한 다양한 읽기 방식을 전문가는 물론 일반인들도 읽기 쉽게 소개하고 있지요.

그리고 저는 성서 전체에 대한 개론서를 꼭 소개하고 싶습니다.

  • B.W.앤더슨 [구약성서의 이해] (성바오로 출판사)
  • H.C.키 [신약성서의 이해] (한국신학연구소)

이 두 책은 성서 전반에 개요와 더불어, 그 역사적인 배경까지 설명하고 있는
가장 훌륭한 개론서 가운데 하나입니다. 두 책 모두 미국 개신교 신학자들이 작품입니다.
원래 두 책이 함께 기획된 것이라 제목이 비슷하지요.

그리고 성서 주석서로 들어가면,
아주 좋은 책들이 이미 번역되어 나와 있기 때문에
굳이 영어권 서적까지 섭렵하실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 [200주년 신약성서 주해] (분도출판사)

이 책은 한국천주교 성서 신학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가장 최근의 성서 신학의 결과를 반영하고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그리고 최초의
“단권 성서 주석”입니다.

특히 이 주석서 편찬을 위해 노력하신 정양모 신부님의 복음서 주해를
눈여겨 보시기 바라고, 그분의 다른 책들도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 밖에 동양 경전 읽기를 즐기신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동양 경전 읽기의 좋은 모본을 보여주고 계시는
이현주 목사님을 소개합니다.
최근 펴내신 [금강경 읽기]에 이르기까지, 불교와 노장 사상까지 섭렵하는 분이시지요.

성서 읽기를 위해서 성서를 추천한다면…

우선 한글 성서…

  • 대한성서공회 [한글판 개역성서]
  • 대한성서공회 [공동번역성서] – 세계 최초의 신구교 공동번역
  • 대한성서공회 [표준 새번역] – 가장 최신의 성서 번역 결정판입니다.

영서성서는….

  • 미국성서공회 RSV (Revised Standard Version) 학교에서 많이 쓰는 번역
  • 미국성서공회 NRSV (New Revised Standard Version) 가장 최근 번역
  • 국제성서공회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복음주의 진영에 많이 읽는 번역
  • 미국성서공회 TEV(Today’s Englis Version) 가장 쉬운 영어 번역

그리고 프랑스의 성과인 Jerusalem Bible 과
영국의 성과인 Anointed Bible 이 있습니다.

또한 아주 전통적인 영어 공인 성서인 KJV (King James Version)도 있지요.

이 성서들을 몇 권씩 가지고 함께 읽으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도움이 되었나요? 질문 있으시면 다시 언제든지 찾아주세요.

어느 누구도 잊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

Written by skhfaq

6월 22, 2002 at 10:5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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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만병 통치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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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님 다음 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

제 의견에 관한 간사님들과 빚진자 님의 견해를 잘 들었습니다.

의도는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몇가지 측면에서 제 견해에 대한 변호와 이견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번째는 성경이 세상 학문의 총론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총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이 특별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학문은 성경의 각론이 아닙니다. 각론이라면 그 안에 성경이 가지고있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요구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히 자연계시만으로 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인 대안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연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릴 뿐이지 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인 답변에 도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각론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세상의 학문 만으로는 구원에 이르는 지식에 도달할 수 없음을 명확하게 지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총론이나 각론식의 결론은 부당합니다.

두번째로, 제가 주장하고 있는 견해에 대한 해석상의 오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1) 성경의 이적이 현대 과학의 한계내에서 해석되지 않는 다는 초 자연적 측면에서 까지 만족을 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고,

2) 세상의 견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성경이 진리를 포기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답변을 하려면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쓰라는 것입니다.

세상과의 대화를 위해서 이교의 교리를 주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대화를 거부했기 때문에 잘못된 교리를 택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개혁은 세상과의 대화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시작되었음을 다시 고려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교의 비판에서 우리의 편협성이 문제라면 간략하게 나마 제 입장을 밝히려고 합니다.

우리가 편협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 극단적인 대처 방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단군상에 도끼질을 해 댄다든지 하는 식의 대처 방안, 이미 말씀하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식의 방법론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태도를 가지는 이유는 원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야말로 담아내는 그릇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교의 비판은 우리의 원론에 대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를 죄의 근원과 결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단혼한 하나님의 공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의가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에 이루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공의와 사랑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셨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토론자들이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네번째, 토론의 과정에서 섯불리 이교의 비판만을 올리는 것은 위험한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성경도 죄에 대하여 단호하지만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 줍니다. 다시말해 박광제 형제의 말에 공감되는 부분이면서 이견을 보이는 부분인데 정복의 대상으로 보아 자기의에 빠져 강압적인 형태를 보이는 부분이 공감되는 부분이고, 너무 사랑만 강조한 나머지 정복 대상이 사람이 아닌 것 처럼 이야기 하는 것이 이견의 부분입니다. 영혼은 복음의 정복 대상입니다. 물론 박광제 형제가 이야기 해려 했던 부분은 역시 원론이 아닌 태도의 오류임을 지적한 것이라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한쪽의 태도를 강조하기 위하여 다른 반대편의 의견을 적적해 보이는 간격을 두고 이야기 하지 않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여섯째, 세상의 질문에 대해 해답을 주려는 적극적인 태도에 대해 동감하지만 앞서 밝힌대로,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성경을 포기할 이유도 없다는 점입니다. 성경이 총론이라서 모든 대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구원이란는 진리에 이르기 위한 모든 대답을 가지고 있고, 그 삶을 이루어 가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기에 답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빚진자님의 글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적 근거를 든 논리가 한가지도 제시되어 있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무조건적으로 성경의 구절 몇장 몇절 식으로 인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세상과의 대화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찾아보시라는 것입니다.
단지 나타난 문제가 기독교 전체의 편협함인 것처럼 이야기 되고 있기 때문에 다시 한번 강조 하건대 유일신 신앙에 의해서 이교의 잘못된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추앙을 받고 있는 카톨릭의 세상과의 대화나 자유주의자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우리가 견재해야 할 태도는 분명히 그들의 종교적 관용이 아닌 복음의 전도 대상임을 명백히 하는 바 입니다. 그들은 구원 받아야 할, 사랑의 대상이므로 대화를 시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론의 견해의 근거가 성경의 진리에 대한 거부일 때는 결단코 거부해야 합니다.

P.S. “종교적 관용”은 유럽의 신학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전문적인 용어임을 밝혀 드립니다. 현재 유럽 대륙과 전세계가 알고 있는 프랑스 혁명에서도 천명된 내용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의 교리 조차 독단적인 것으로 거부 되었습니다.

관용이라는 휴머니즘에 대하여 저는 진리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바 입니다. 일반적인 사고가 세상과 신앙을 얼마나 미묘하고 밀접하게 연결시켜 주는 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 입니다.

분명히 언급하건대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부적절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우리의 동지는 그들이지 승려 현진이 아니라는 점이 명백한 것처럼 말입니다. 현진 이라는 승려가 주님을 구주와 주로 받아들인다면 몰라도……

———–

부제님 이 토론의 주제는 성경은 세상의 학문과는 동떨어진 것이므로 세상의 학문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줄수 없다는 간사님의 견해였습니다. 부제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 궁금합니다. 참고로 이 토론을 발췌한 곳은 http://www.jdm.or.kr의 토론방에서의 논쟁이었습니다. 부제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 아기 예수님의 평화

참 재미있는 내용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이런 토론에는 한편으로는 문외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관심이 없는지라 적절한 답변을 드릴 수 있을 지 겁이 나는군요. 다만 위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들은 논리성을 갖춘 것 같지만 실은 지극히 주관적인 신념을 기초로 해서 자신의 울타리를 치는 변론이지요. 신앙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주관성에 기초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옳다 그르다 쉽게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 주관적인 신념이 고집이 되어서 다른 사람의 주관성 즉 다른 사람의 또다른 신념 체계를 거부하려고 하거나 이를 ‘정복’하려고 하면, 그것은 횡포가 되지요. 한국의 교회가 갖고 있는 전반적인 모습은 이런 횡포의 모습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대화가 별로 없지요. 그리고 대화를 하자면 자신도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겠다는 자기 포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질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복음을 포기하라는 말인가 하면서 들떠 따지겠지요. 그렇다면 복음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떤 인간적인 논리 체계로 만들어 놓은 신념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서 다른 사람을 쉽사리 지옥에도 보내고 천당에도 보내겠다는 전능자의 오른팔처럼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회의가 들기 마련입니다. 저는 이런 회의가 무척 중요하다고 봅니다. 복음이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불려 올라갈 때까지 묻고 실천하고 다시 물으며 살아야 할 주제입니다. 그것은 몇가지 제자훈련 교재에 나와있는 단기 속성 코스의 훈련이 아닙니다. 흔히들 운운하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같은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복음의 주체요, 복음의 내용이요 핵심으로서 그 복음을 사셨던 예수님을 끝없이 바라보면서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봅니다. 종교적 관용이라는 것은 어떤 학술적인 용어가 아니라 누구보다도 엄격하셨으면서도 관대하셨던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기 시작한 징후일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시시비비는 제가 내릴 것도, 또다른 누가 내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은 형제님의 고유한 권한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복음에 대한 깊은 묵상과 주님에 대한 깊은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지요. 논리와 강압에 눌리지는 말 일입니다.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연약한 아기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Written by skhfaq

1월 23, 2001 at 1:4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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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대하여 – 정경, 외경, 제 2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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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성서에 관한 것입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성서 수가 다른데요, 성공회에서도 제2경전(외경)을 제외한 66권만을 정경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성공회에서는 이것(제2경전)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지 알고 싶습니다.

성서의 정경화 작업에는 조금 복잡한 역사가 있습니다. 먼저 그걸 간단히 정리해보죠..

– 정경이란?

정경(canon)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qaneh(카네, 막대기)에서 나온 말로 희랍어로는 kanon(측량자, 기준, 표준)에서 파생했습니다.

– 정경화 순서

질문하신 성서의 수 문제는 구약성서에 한정된 것인데, 유대교의 여러 종교 문헌들이 경전화된 순서를 보면..
먼저 5경(B.C. 450년경0, 그리고 예언서(B.C.2세기 경), 그리고 마지막으로 A.D. 90년경에서 팔레스틴에서 열렸던 얌니야 회의에서 나머지 책들을 확정하여 성문서가 정경에 포함되었습니다.

– 정경본의 차이

이렇게 유대교에서 정한 정경은 히브리어로 된 문헌들만 포함된 것으로 39권이었습니다. 이를 팔레스틴 정경이라고 합니다.

한편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나라를 잃고 흩어짐)로 인해 희랍어를 쓰는 유대인들이 많아 성서를 희랍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어 번역이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70인역 성서입니다. 이 번역은 당시 희랍 문화의 중심지라할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되어 알렉산드리아 정경이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위에서 말한 39권 외에도 다른 희랍어 종교문헌 15권이 포함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성서에 대한 정경은 두가지 전통을 따르게 된 것이지요.

– 교회는 어떻게 이 전통을 따랐는가?

우선 초대교회는 알렉산드리아 정경 전통을 따랐고, 이후 천주교와 그리이스정교회도 이 전통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구약 정경이 많을 수 밖에요. 그러다가 1545-1563년에 있었던 트렌트 종교회의에서 천주교는 알렉산드리아 전통을 재확인하고 15권에서 3권을 제외하여 현재 12권의 제 2경전을 인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희랍정교회는 1672년 예루살렘회의에서 2권(바룩 예레미야의 편지)를 제외하여 13권을 경전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한편 개신교는 종교개혁 이후 중세 교회의 잘못된 교리들 가운데 몇가지가 이른바 제 2경전에서 나왔다고 보고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히브리어로만 된 정경 전통을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외경이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므로 읽기를 권한다고 말했습니다. 성공회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랐으며, 제 2경전을 외경으로 보고 있지만, 역시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는 책으로 읽기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현재의 성서 순서의 배열은 천주교나 개신교나 모두 알렉산드리아 전통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 우리나라의 경우

그동안 개신교는 외경을 아예 경원시했습니다만, 공동번역(1977)을 통해 외경의 가치를 조금 알게 되었고, 성서역사를 알기위해서는 외경을 아는 것이 필수적인지라, 신학교에서는 이에 대한 안내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 성서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가톨릭용(제 2경전 포함)과 외경포함(성공회를 위한 것인듯?), 그리고 외경이 없는 공동번역 성서입니다.

최근, 대한성서공회 공동번역원회에서는 천주교의 요청을 받아들여, 불가타 성서(천주교의 공인된 라틴 성서)의 배열에 따른 개정판 공동번역을 출간했습니다. 여기에는 제 2경전의 위치가 그전의 공동번역과는 달리 성서 곳곳에 배열되어 있습니다.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된 형제 주낙현 부제 드림 ^^

Written by skhfaq

1월 23, 2001 at 12:4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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