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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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진성사 – 감리교와 성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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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저는 감리교회의 교역자입니다.

저희 한국감리교회에는 견신례(견진성사)가 없습니다만 – 미연합감리교회에는 견신례가 있습니다 – 저는 개인적으로 견신례에 관한 관심이 많이 있습니다.

성공회에서는 견신례 준비를 어떻게 시키며 어떠한 방식으로 견진성사를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가톨릭과는 어떻게 다른지도 알고 싶습니다.

그럼, 주신부님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를 빌며 이만 줄입니다.

2002. 9. 26

박정훈 올림

+ 주님의 평화

안녕하세요?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이세요? 아니면 전도사님이세요?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가 궁금해서요.

주신 질문은 현재 예전학계에서 논란이 많은 내용 가운데 하나입니다.
초기 예전 문서들의 발견과 그에 따른 초기 예전 연구의 결과를 놓고 보면
현재 세례와 견진례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주장이 많기 때문입니다.

초대 교회의 예전에서는 분명히 세례와 견진례가 결합되어 있었는데,
교회의 성장과 여러 가지 상황의 변화로 견진례가 독립된 성사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초기 예전에 관련된 자료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연합감리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견진성사에 대한 자료가 없으니
이를 비교하거나 차이를 말씀드리지 못하고,
저희 성공회 자료만 올려드리겠습니다.

다만 몇 가지 설명을 덧붙이겠습니다.

견진성사(Confirmation)는 그 이름에서 보는 것처럼, 신앙을 재확인하고 견고하게 하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유아세례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유아가 성장해서 철이 들어 자기의식으로 신앙을 재확인하는 경우에 이런 예식은 매우 필요한 것이었으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로써 성찬례에 참여하여 영성체를 할 수 있는 자격이 되는 하나의 관문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예전에서는 세례와 더불어 있었던 이 예식은 “기름 부음”의 예식이었습니다. 아시다 시피 “기름 부음”은 성령의 내림을 상징합니다. 세례를 받아 새롭게 태어난 신자에게 성령께서 내리셔서 함께 하신다는 확약인 것이지요. 그래서 세례와 견진이 분리된 이후에도 견진성사에서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머리에 안수하여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상징적인 행위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최근 연구 결과를 반영한 세계성공회의 기도서들은 세례와 견진성사를 하나로 다시 결합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른바 세례와 견진이 하나로 결합된 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 입교 예식(Christian Initiation)을 가장 잘 대변한다고 보고, 또 세례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래서 독립된 견진성사를 없애려는 시도가 있기도 했지만, 견진성사는 신앙의 재확인, 그리고 영접과 교회로의 복귀라는 의미를 가지고 여전히 독립된 예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견진성사를 받는 사람은 유아세례를 받고, 철이 들어 자신의 신앙을 의식할 수 있게 된 청소년, 그리고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은 사람, 그리고 다른 교단에서 성공회로 이적했을 때, 성공회 신앙에 대한 안내와 더불어 교회 공동체에 편입되는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입니다. 견진성사 전에는 각 처지에 따른 신앙 교육이 이뤄집니다. 처지와 경우가 다양하니 그에 따른 신앙교육의 내용도 달라지겠지요.

현재 대한성공회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견진성사 예문을 가지고 있고, 교회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1. 대한성공회의 공식기도서인 1965년 공도문에서는 여전히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독립된 것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일반적인 관습은 세례를 받고 나서, 일정 기간의 새로운 훈련 과정을 거쳐서 견진성사를 받습니다. 이때 견진성사를 베푸는 분은 주교님으로 제한됩니다.

2. 대한성공회는 1997년에 새예식서를 제안했으며, 이를 시험 사용하도록 관구의회의 승인을 얻었습니다. 여기서는 견진성사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과감히 수용한 모습이 역력합니다. 그래서 견진성사라는 기존의 명칭과 함께, 영입 및 복귀 예식이라는 이름을 덧붙였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견진예식은 주교님만이 집전하실 수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최근 예전학이 시도하는 것처럼, 세례와 견진성사를 다시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또 예전지침에서도 1965년 공도문과는 달리 “기름을 바르는 상징 행위”가 명시되지 않습니다.

3. 전통적으로 세례를 받고 나서 영성체를 한번 할 수 있고, 그 이후 다시 견진성사를 받아야만 계속해서 영성체를 할 수 있다는 규정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최근의 “세례 신학”(Baptismal Theology)의 영향에 따라 사라지고 있습니다.

논쟁적이고 중요한 내용인데, 설명이 부족합니다. 아울러 첨부한 자료를 통해서 현재 실행되고 있는 대한성공회의 견진성사의 모습을 조금 엿보시지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된 형제

주낙현 신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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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khfaq

9월 27, 2002 at 11:3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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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직에 대한 발칙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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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보다는 이곳이 더 활발한 것 같아 글을 남깁니다.
많은 사람들의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녹아있는 질문과 신부님의 자상하며 명쾌한 답변들이 보는 것 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누구나 일생일대를 고민하지만 함께 고민하기는 참으로 힘든 것이 신앙인것 같습니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우리로서는요.

질문과 답변사이에 묘한 긴장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가 오히려 둘을 엮어주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중의 성사론적 사제론에 관한 글을 잘 읽었습니다. 존재론과 기능론사이라고 하기보다는 보다 인간적이고 해석학적인, 그럼으로 대단히 성공회적인 시각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편 이제는 우리가 존재론적인 사제론을 받아들이기에는 많이 앞으로 나와있다는 생각이 드는 반면 기능주의적사제론은 아직 많이 남아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기능의 차이가 곧 존재론적 우열로 바뀌지만서도…)

성공회에 남아있는 존재론적 구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예를 들어 부제는 성찬례를 집행못한다던가, 주교만이 할 수 있는 성유축복식이라던가, 기타 평신도와 사제라는 틀속에 기득권적 요소들을 배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사제개개인의 노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개개인에게 맡기기에는 완고한 제도가 그리 쉽게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사론적 사제로 살기위해서는 오히려 옷을 벗는 사제들이(사제가 되는 것이 의미없는 것이아닌, 사제가 된 이후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과감히 출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발직한 상상을 해봅니다.

질문은 아니고 고민입니다.

+ 주님의 평화,

이 질문 답변란이 종민 형제님께 도움이 되었다니, 저로서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제직에 대한 제 견해는 사실 독창적인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이것이 성공회의 이해 전체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요,
그저 갓 서품받은 성공회 사제로서 느끼는 고민과
이를 신학적인 고민을 발전시켜 보려고 진척시켜본 “용어” 작업에 머문 것입니다.

거기에 형제님께서 “인간적이고 해석학적”이라는 좀더 고민할 여지와 영역을 부가한 것은
제게는 검토할 좋은 고민거리를 주신 것이니 더욱 감사합니다.

다만 형제님께서 걱정하고 우려하는 것이 있다면,
사제직의 실제 상황이라고 할텐데요.
글쎄, 그건 여전히 교회 전체에, 그리고 성직자 전체에게 화두로 남습니다.
사실 그것은 제 나름대로 구분해본 존재론적, 기능론적, 성사론적 이해에 근거하기보다는
하느님 앞에 선 한 인간의 “정직함”과 결부되는 것인데다,
이러한 이해에 맞추어 얼마나 자신을 쇄신해 나가느냐는 문제와 관련이 깊다고 봅니다.

만인사제론이 그리스도교 전체에서 인정되는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성직에 대한 구분을 두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직은 기본적으로 “섬김”(디아코니아)에 기초한 것으로,
성직은 그 섬김과 봉사를 위한 직책이지 특권과 권위주의의 근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평신도의 “성찬식 집전” 허용이나, 예전 상의 권한 나눔은
얼핏 만인사제론의 실현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자칫 현실에서는 또다른 권위주의의 확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에는 여기서 다 말하기 어려운 행간의 복잡성,
삶의 우연성이 가져다 주는 위험들이 있습니다.

이 처지 속에서 사제직에 대한 성사론적 이해(전혀 정리되지 않았지만)를 통해서
“경계에서 살아가는 사제직”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좀더 자세하게 표명하자면
아마도 종민 형제님께서 말하는 “발칙한 사제직에 대한 구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다만 “구상”이 아니라 내 몸도 그렇게 따라 주기를,
그런 용기와 희망을 키워나기를 바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함께 기도해 주시겠습니까?

주낙현 ^^

Written by skhfaq

1월 21, 2002 at 3:1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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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 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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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평화

두번째 답변입니다.

질문 2.

성공회에서도 고해성사가 있으나 강제는 하지 않고 있는다고 하던데요 (가톨릭은 반드시 1년에 1번씩 고해성사를 보아야 하며, 우리나라 신자들은 1년에 2번씩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최소한의 규정이며 교회는 될 수 있는대로 자주 고해성사를 보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고해성사가 강제가 아니라면 고해성사를 통하지 않고서도 죄의 사함이 가능하다는 말씀이신지, 그 방법이 궁금하구요. 또 그렇다면 굳이 고해성사를 뭣 때문에 존치시키는지 알고 싶군요. 글구 말에요. 성공회 신부님들도 고해성사의 비밀을 가톨릭의 그것과 같이 엄수하는지요.?

답변 2.

성공회에서는 주님께서 그리고 복음서를 통하여 정하신 성사를 세례와 성찬례(성체성사)라고 봅니다. 그밖의 다섯가지는 교회 전통 속에서 형성되어 온 것들로 성사라 인정합니다. 굳이 구분지어 이름한다면, 세례와 성찬례를 대성사(혹은 성사), 그밖의 다섯가지를 소성사(혹는 준성사)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런 용법은 천주교와는 많이 다르지요.

고해성사는 성공회에서 강제 사항이 아닙니다. 흔히들 오해하듯이 사람인 사제가 죄를 용서하는 일은 없ㅅ브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하느님이며, 그 죄의 용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그러니 “고해성사를 통하지 않고도 죄의 사함이 가능하냐?”는 질문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문제에서 벗어난 감이 듭니다. 다만 고해성사는 성사가 그렇듯이 죄를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사랑(보이지 않은 은총)이 밖으로 드러나는 표지이지요. 그러니 이러한 은총의 기회를 많이 갖는 것은 신앙 생활에 매우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공회는 고해성사를 적극 권장합니다.

또 미국성공회의 경우는 전통적인 고해성사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화해의 성사”라고 이름하여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죄의 고백과 이로써 하느님과 이웃을 향해 화해의 첫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합니다. 게다가 고해성사는 자신의 죄를 입 밖으로 공언하며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받음으로써 깊은 신앙적 치유의 능력을 가집니다. 자신의 죄를 천상의 하느님께 말씀드렸다고 하며 현실의 삶 속에서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위선을 방지하는 중요한 신앙적인 덕목이 되지요. 이런 점에서 고해성사는 신앙 상담의 측면과 영적인 치유의 측면에서 중요합니다.

고해성사의 비밀 엄수는 성직자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의무입니다. 이는 성직 수행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양의 비밀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사목자로서 배임에 다름 아닙니다.

우려하는 것은 고해성사에 대한 강제로 인해서 거룩한 성사가 습관화되고 의미가 기울어지는 일은 없는 것일까요? 옛 신앙 전통의 지혜를 되돌아볼 때입니다.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한 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드림 ^^

Written by skhfaq

8월 15, 2001 at 2: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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