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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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예배 참석 – 성공회와 장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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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셨는지요. 주낙현 신부님.

오랜만에 신부님의 홈페이지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성공회 서울대성당을 나가고 싶은데,적응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전 장로교에서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초대교회의 전통을 갖고 있는
성공회 예배에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성공회 예배와 장로교 예배의 차이점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 궁금한게 하나 더 있습니다.

전 감리교 장로가 운영하는 개신교계 달력회사에서 상호쇄입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다양한 한인 교회들을 만나게 됩니다. 침례교,장로교.오순절교회등 다양한 교파들을 만났지요..

그러다가 미국성공회에 속한 어느 한인 교회에서 상호쇄입을 부탁해서 작업한 적이 있는데, 이상한 점은 그 교회를 목회하는 성직자가 자신을 담임목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약도에 적은 미국교회명에는 Episcopal Church 즉, 미국성공회라고 되어 있고, 성공회에는 목사가 없는데 말이죠..어떻게 된 것일까요..

좀 쓸데없는 질문인지 모르지만,무척 궁금합니다.

+ 주님의 평화

김재홍님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성공회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직접 예배에 참석하시려 한다니 기쁩니다. 예배 참석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시지 말고, 그저 참석해서 그 흐름에 맡겨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점들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발견하고, 어떤 점들이 새롭고 좋은 점들인지, 어떤 점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인지, 그런 궁금점들을 스스로 정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가운데 나오는 문제들을 가지고 함께 이야기하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우선은 공통점에서 출발합시다. 성공회와 장로교 예배는 우선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예배하기 위한 시간이요 공간입니다. 그리고 그 구조면에서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찬양하며, 말씀을 읽고, 말씀의 풀이를 들으며,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성찬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배는 전통적으로 “말씀의 예배”와 “성찬의 예배” 둘로 구성됩니다. 물론 세분하지만 앞 뒤로, “시작 예식”과 “마침 예식”이 들어가겠습니다만… 그러니 다시 설명하자면… 시작예식 – 말씀의 예배 – 성찬의 예배 – 마침(파송) 예식의 구조입니다.

장로교 예배 – 실은 한국 장로교 예배의 한 편향일 뿐입니다만 – 는 이 가운데서 “말씀의 예배”에 집중하고 있다고 봅니다만, 시작예식과 마침예식의 요소도 들어 있습니다. 이런 구조는 어떤 점에서 성공회가 가지고 있는 성무일과의 아침기도 그리고 저녁기도와 비슷한 형태입니다.

그러니 현 상황에서 큰 차이점을 말하라면, 성공회는 매 미사때마다 성찬의 예배를 거행하면서, 말씀의 예배와 성찬의 예배라는 전통적인 예배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성공회 예배는 기도서를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이미 정해진 예전 텍스트를 중심으로 예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성공회와 같은 예전적 교회들은 이러한 텍스트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비예전적 교회와의 차이점입니다만, 근래에는 개신교회들도 이런 예전 텍스트를 새롭게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예전적 교회와 비 예전적 교회의 차이점을 극복하기 위한 중요한 작업이 WCC의 리마 예전을 통해서 나왔습니다. 가능하다면 이 예식서를 구해서 일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전은 텍스트도 아니요, 설교 듣기도 아닙니다. 예전과 예배는 무엇보도 하느님의 백성인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하느님의 구원 행동을 축하하며 감사하고, 그 구원의 행동에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전망에서 말씀도 듣고, 성찬도 함께 나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에 가시면 안내를 하시는 분들이 예배 내내 도와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분을 만나지 못하면, 주위 분들에게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성찬 참여의 문제는 실제로 교회마다 신부님마다 조금씩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영성체에 대해서는 사전에 신부님과 면담을 하시기 바랍니다. 신부님들께서 흔쾌히 상담에 응해 주실 겁니다.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 짧게 답변드립니다. 그 교회가 어느 교회를 지칭하는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알고 있는 정보로 추측하건데… 미국에 있는 한인순복음교회 하나가 목사님과 더불어 미국성공회로 들어온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교회의 습속상, 그리고 한인이미자 70%가 개신교신자인 이민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해서 예전 교회의 관습과 명칭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물론 점차로 이를 바꾸어 나가기를 희망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실제로 영어 표현상은 하등의 문제가 없습니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성직자의 호칭 문제가 교회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인양 보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형제,

주낙현 신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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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khfaq

10월 22, 2005 at 3:5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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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와 천주교 – 전례 개혁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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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십시오…

안녕하세요? 신부님!! 미국에서 고생이 많으시죠?? ^^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제가 알고 있는 유일한 성공회 신부님이라는 사실에 신부님과의 만남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수도 공동체에 함께 살고 계신 신부님께서 작년 태백에 있는 성공회 신부님께서 활동하시는 공부방에서 형제들과 함께 며칠 계셨다고 하는데 참 좋았다고 하시더군요… ^^

성공회 신부님과 교류를 하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던데…저도 신부님과 그런 교류가 가능하겠죠?? ^^

아~~ 주제에서 벗어나는 말을 오랫동안 했군요…

질문의 핵심은 이렇습니다.

가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전례개혁을 했습니다. 성 비오 5세 미사 또는 트리덴틴 미사라고 일컫는 미사를 대신해서 자국어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고, 제대위치도 벽을 보는 것이 아닌 회중을 향하게 되었고 미사가 다소 간소화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티칸 공의회를 주도하신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트리덴틴 미사를 아예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런 전통도 인정하면서 보편적으로 드릴 수 있는 미사를 제정하셨는데요…

성공회와 가톨릭의 미사 형태가 비슷한 시점에서 성공회의 미사는 어떤 변화를 거쳐왔는지요… 어떤 성공회 성당의 제대를 보니 벽쪽에 제대를 붙여 놓은 곳도 있던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거치면서 성공회 내에서도 미사전례에 대한 변화가 있었는지, 아니면 독자적인 변화를 거쳤는지…

그리고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도 성공회의 미사는 지금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

질문이 많죠?? ^^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일치하는 그대의 벗 이정은(요한 보스코)수사 두 손 모음…

+ 주님의 평화

이정은 수사님 안녕하세요? 근래에 이 공간을 통해서 자주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성공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에큐메니칼 대화와 협력은 서로의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를 향한 공동의 발걸음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양 교회의 공식적인 채널뿐만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대화와 협력일 때에 그 진정성을 굳건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늘 새로운 물음과 열린 대화의 태도로 좋은 물음을 던져 주시는 이수사님은 이런 대화를 이끌어 가시는 분입니다. 이수사님의 손에 끌려 다니다가 덤으로 얻는 배움이 크다고 먼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례(예전)개혁에 관련해서 말씀드립니다. 아시다시피 그리스도교계의 세계적인 전례 개혁은 이른바 “전례 운동”(Liturgical Movement)이라는 이름으로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추동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제는 역시 형식화되고 화석화된 예배가 아니라 신앙인의 “적극적 참여”(active participation)를 기반으로 한 하느님 백성의 일(레이투르기아)로서 예배를 회복하자는 것이었지요. 그 반세기 넘은 결과물로 바티칸 2차 공의회의 그 유명한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전례 헌장)이 나오게 되었고, 그 영향력은 로마 가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계에 걸쳐 지대한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례개혁은 “하느님 백성”의 전례에 대한 “적극적 참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라틴어 미사”가 각 지역 언어 미사로 번역될 수 있었고, 기존의 미사와 성사를 대대적으로 개정하여 1969년과 1970년(로마 미사)에 나왔던 것이지요. 즉 전례 개혁의 요지를 바티칸 2차 공의회의 용어로 정리하자면 ‘하느님의 백성이 백성의 일(의무)인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격려하기 위하여 미사와 성사를 개정하고, 미사의 지역어 번역을 허용한다’는 것이겠지요.

한편 성공회는 흥미롭게도 이미 종교개혁(16세기) 이래로 이러한 전례 개혁의 원칙들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즉 영어(지역어) 성서 번역과 함께, 성서에 기초하면서 초대 교회와 중세 교회를 아우르고 영국 지역에서 발전된 예전 전통(대체로 사룸 미사)를 종합한 성찬례(미사)를 영어(지역어)로 만들어 냈습니다. 아울러 성직자 혹은 수도자 중심으로 되어 있던 성무일도를 개혁하여 “아침기도”와 “저녁기도”로 이루어진 공동 예배의 틀을 마련하여 사용했습니다. 아울러 방만하게 나뉘어져 있던 여러 예전서들을 취합하여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가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예전과 성사, 그리고 사목 예식들을 간소화하고 이를 한 권의 기도서로 만들어서 접근이 쉽도록 했습니다. 즉 1549년으로부터 1662년에 이르는 공동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의 개정 과정을 통해서, 1) 성서에 근거한 전례, 2) 초대 교회 전통에 부합하는 전례, 3) 교회의 일치를 위한 전례, 그리고 4) 모든 신자들이 쉽게 접근하여 사용할 수 있는 전례라는 전례 개혁의 원칙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회의 공동기도서는 성공회가 어떤 교리적 혹은 신학적 선언에 기초한 교회가 아니라, 기도서의 영성에 기초해서 끊임없이 기도하는 교회 (Church in Prayer)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성공회에는 이런 공동기도서에 기초하면서 여러 신학적 성향과 교회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경향의 예배를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로마 가톨릭에서 일어난 전례 운동과 비슷한 전례 운동이 19세기에 “의례주의”(Ritualism) 운동이라는 형태로 영국 성공회 안에서 발전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당시의 신학적 운동 가운데 하나였던 옥스퍼드 운동과 만나면서 세계성공회 내에 교회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전통적 전례에 대한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실제로 당시 영국 성공회의 경우 전례복이나 전례 지침 혹은 행위 등이 매우 간소화되어 있었고 성찬례도 일년에 네 차례, 혹은 한달에 한번 꼴로 이뤄지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주일 예배는 공동 예배 의식으로 마련된 “아침 기도”를 통해서 드리는 것이었기에, 이러한 흐름은 매우 새롭고도 획기적인 운동이었습니다. 이런 움직임에 힘입어 성공회는 초대 교회의 다양한 예배들을 다시 연구하고, 중세의 전례 관습을 비판적으로 복원하면서 현재의 로마 가톨릭과 비슷한 형태의 전례가 급속하게 퍼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성공회가 현재와 같은 매우 전례적인 교회의 모습을 일반적으로 회복한 것은 이제 겨우 100여년 된 현대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성공회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자국어 전례와 전례 개혁의 자율성을 전통을 갖고 있었던데다, 세계 성공회의 구조 상 각 관구 교회가 독립된 교회로서 치리의 자율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자국어 전례와 전례 개혁(대체로 기도서 개정)의 자율적 권한을 자연스럽게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58년 람베스 회의(세계성공회 주교회의)에서는 이러한 전례 개혁의 자율성과 전례 토착화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공식화함으로써, 당시 그리스도교 전체에서 일고 있던 전례 운동의 흐름에 협력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세계성공회의 각국 성공회는 대대적인 기도서 개정과 전례 개혁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의 유산, 그리고 다른 개신교 전통 교회들과 깊은 교류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바티칸 2차 공의회의 “하느님 백성의 적극적 참여”라는 개혁의 원칙은 역시 성공회의 원칙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전례 개혁에 관하여 이제는 로마 가톨릭, 성공회, 개신교회들이 모두 함께 연구하고 이 연구의 성과를 각 교단의 전통에 따라 반영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러다 보니 이제는 전례의 구조적 특징(특별히 성찬례)과 관련해서는 거의 일치된 형태를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세계성공회는 영국성공회의 기도서인 1662년의 기도서를 모본으로 삼아서 기도서 개정을 진행하였고, 이후 세계성공회 국제 전례 위원회를 통해서 함께 전례 개혁의 신학적 원칙을 연구하고, 각국 교회에 권고하는 전례 문서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각국의 성공회는 이를 원칙적으로 존중하지만, 그 교회의 전례는 그 교회에서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세계성공회의 전례는 그 형태 상의 특징이 서로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같은 나라에서 같은 기도서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행하는 다양한 전례 관습을 강제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교구에 따라 혹은 심지어는 같은 교구 안에서도 개별 교회에 따라, 다른 전례 관습이 온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러 다른 조건들이 관여하는 바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는 여전히 벽에 붙은 제대를 사용하는 교회가 있는데, 이는 현존하는 성당의 구조상 그런 것일 뿐인 경우가 많고, 새롭게 지어지는 성당에서는 신자들을 향한 제대 배치가 대부분입니다. 또 기본의 벽에 붙은 제대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보존하고 새로운 제대를 신자를 향해 마련하여 미사를 드립니다.

전례에 대한 에큐메니칼 연구가 확대되는 것이 세계 교회의 현실이지만, 한국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아쉽습니다. 전통적인 전례의 구조와 형태를 강조하다 보면 왜 로마 가톨릭 교회를 따르냐는 핀잔이 개신교 측에서 우세하다면, 좀더 자유롭고 현대적인 예배의 모본을 전례 전통의 교회에 도입하려 하면, 왜 개신교적 ‘악습’을 도입하려 드느냐는 또 다른 핀잔이 다른 쪽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것은 성공회의 전례 개혁 선구자들과 로마 가톨릭의 바티칸 2차 공의회 교부들이 올바르게 밝혔듯이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과 대화하며 호흡하는 “하느님의 일인 전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야 말로 전례 개혁의 원칙이 되어야 하겠지요.

함께 하느님의 백성인 것을 기뻐하며,

주낙현 신부 합장

성공회와 천주교의 상호 미사 참석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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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주신부님… 전 에큐메니컬 운동에 관심이 많은 카톨릭 신자입니다… 성공회, 정교회, 콥트교회등의 형제교회에 관심이 많습니다… “왜 갈라졌어야만 하나” 생각이 계속 머리 속을 떠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누누히 배운 역사적 배경이나 정치적 배경은 떼어 놓고 말입니다.. 전 30대 초반의 청년 신자인 동시에 직장인이라서 카톨릭 교회에서 주관하는 사도직학교에 등록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가끔 미사 후 저희 본당 신부님께 교회의 일치에 관한 질문을 많이 합니다….

카톨릭 신자로서 성공회 미사에 참석할 수 있는지…(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성체를 모셔도 되는지… 또 거꾸로 성공회 신자의 카톨릭 미사 참석은 그러한지…
다른 분들에 의해 저의 질문이 교리적 논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면…답변은 안 해 주셔도 되구요… (예를 들어… 신품성사, 수위권등…)

아울러 여기 방문하시는 카톨릭 신부님, 수사님, 신학생님의 고견도 듣고 싶습니다…

오늘은 카톨릭 교회에서 지정한 농민 주일입니다…
저희의 일용한 양식을 땀과 힘으로 경작하는 이 세상의 모든 농민들께 주님의 축북이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요셉 배상…

+ 주님의 평화

요셉님 안녕하세요? 교회 전통 간의 대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신 분을 만나니 기쁘고 반갑습니다. 교회의 분열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많은 유산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대체로 그것은 서로에 대한 반목과 질시로 이어졌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라는 맥락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신앙의 열매를 가져다 주는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생각에 이르기도 합니다.

역사적 배경과 원인은 그 나름대로 언급하고 논구해야 할 여지가 있다면, 또 그것과 다른 맥락 속에 있는 우리가 서로 함께 이해해야 할 면들이 더욱 크고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요셉님의 고민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나눠야 할 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신 질문은 대체로 천주교 측에서 답변해야 할 것들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만, 그걸 성공회의 처지로 돌려 놓고 답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면 질문의 방향이 조금 달라지는 것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걸 이해해 주시겠지요?

우 선 천주교 신자가 성공회 미사에 참석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요셉님께서 상담하신 천주교 신부님께서는 가능하다고 하셨는데, 그 참여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 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아는 한에서 한국 천주교의 사목지침서에서는 피치 못하게 천주교에서 미사를 드리지 못하는 경우, 혹은 위급한 경우에 한해서 성공회에서 미사를 드리고 영성체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목적 상황에 따른 제한이 있습니다. 성공회는 어떤 경우이든 적법하게 세례를 받은 신자라면 성공회 미사(감사성찬례)에 참여하여 영성체를 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회와는 달리 성공회는 이런 적법한 세례의 범위를 거의 대부분의 건전한 개신교 교단들과 천주교, 정교회의 세례까지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공회 미사에 참석하고 영성체를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찬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열려 있는 식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성찬 이해의 교리적 차이가 여전하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미사에 참석하기 전에 성공회 성직자와의 상담이나 대화를 갖도록 권유합니다.

두 번째 질문은 성공회 신자가 천주교 미사에 참여해서 영성체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주교 측이 답변해야 할 것이지만, 제가 이해하고 있는 내용을 밝히면 이렇습니다. 천주교가 성공회의 세례를 적법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으나, 일정한 교리 교육과 “일치 예식”을 통해서 천주교 신자가 된 이후에 영성체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이해라면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이 와 관련해서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특수한 처지에서 제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이곳은 지역과 교회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성공회 신자가 천주교 안에서 조건 없이 영성체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공회의 경우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성체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정교회는 서방교회(천주교, 성공회 및 기타 개신교단) 신자들을 영성체로 초대하지 않습니다.

아 울러 성공회 일각에서 논의되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영성체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영성체 개방”(Open Communion)에 관련된 논쟁이 그것인데, 예수님의 식탁 공동체 혹은 밥상 공동체가 어떤 차별의 벽도 철폐하는 매우 급진적인 환대(radical hospitality)였다는 점에서 그 뜻을 새롭게 하고 실천하자는 취지입니다. 이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어쨌든 도대체 성찬례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새롭게 생각하고, 그리스도인됨이 무엇인지를 되새기는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제 짧은 답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좋은 대화의 계기를 열어주신 요셉님께 감사 드립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7월 21, 2005 at 3:5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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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고해성사 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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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안녕하세요! 전에 변호사와 성공회 사제에 관한 질문 올렸던 법대 다니는 학생입니다.

근데 여기 게시판 닫으신다니 너무 아쉬워요
전 사실 생각보다 꽤 자주왔었는데…막 아무글이나 올리며 질문하기 좀 쑥쓰(?)러워서 계속 눈팅만 했습니다…안닫으시면 안되나요 ㅠ

질문 게시판 활성화에 조그마한 도움이 되고자 저도 질문을..^^;;

저는 고해성사를 참 좋아하는데 (사람이 가장 겸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참되게 고백하고 그럼으로써 용서받고 사랑받는 순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공회의 고해성사 양식을 알고 싶습니다!

+ 주님의 평화

“작디작은이”님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뭐 조회수를 봐서는 별로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꾸준히 오시는 분이 계셨군요. 실효가 다한 것이 아닌가 해서 이제 접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었는데, 좀 시간을 두고 시켜 보겠습니다.

흠.. 엄살을 부렸더니, 여러분들이 성화시로군요 ^^;

성공회 고해성사 예식 전문을 아래에 옮겨 놓습니다. 이것은 한국성공회가 2004년 개정한 새로운 기도서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고해 예식

  • 고해예식은 모든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유익하므로 적극적으로 권장된다.
  • 사제는 고해내용을 어떤 경우에도 발설할 수 없다.
  • 고해소가 없을 경우 교회 안에 사제와 고해자가 얼굴을 마주하지 않도록 칸막이가 설치된 적당한 장소를 준비해야한다.
  • 사제는 소백의와 자색 영대를 한다.
  • 고해자는 먼저 자신이 지은 죄를 자세히 생각하고 진정으로 뉘우치며 다시는 반복하여 죄를 짓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고 나온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아멘

○ 주님 앞에 나아와 모든 죄를 고백하오니 용서와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 주께서 그대의 마음과 입에 계시어 모든 죄를 진심으로 겸손히 고백하게 하소서.

○ 아멘.

○ 전능하신 하느님과 거룩한 교회와 사제 앞에 고백합니다. 나는 생각과 말과 행실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 의무를 소홀히 했습니다. 특별히…. (여기에서 분명하고 간결하게 고백할 죄를 말한다.) 이러한 나의 죄와, 이 외에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오니,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사제는 간결하게 권면의 말과 보속을 주면, 고해자는 다음 기도를 바친다.)

○ 주 하느님, 내가 죄를 지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사오니, 악을 저지르고 선을 소홀히 한 모든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나이다. 또한 주님의 은총으로 속죄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며 죄의 유혹을 피하기로 굳게 다짐하오니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아멘.

✛ 진실로 죄를 뉘우치며 주님을 믿는 사람을 용서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교회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으니, 나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그대의 모든 죄를 사합니다.

◯ 아멘.

✛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그대에게 강복하시고 항상 지켜주소서.

◯ 아멘.

✛ 주께서 그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 평안히 가십시오.

◯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Written by skhfaq

5월 22, 2005 at 3:4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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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궁금증 –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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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신부님. 저는 25된 기독 청년입니다.

전 하나님의 사랑과 감사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보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체감하고 있어요.

저는 궁금증이 많은 청년입니다. 그래서 알고 싶은게 참 많지요. 그러다가 품고 있던 많은 생각 중에 요즘 다시 구체화된 궁금증을 풀고싶어서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질문 한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아, 저는 기독교장로회의 소속의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수많은 교단이 있음을 알고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구나 했습니다. 성향이 보수니 진보니 이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안 하겠습니다.ㅋ
그러다가 천주교는 무엇이 다를까..라고 생각하며 전도용 팜플릿도 보고 자세히 알아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성공회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공회는 다소 다르 다고 알려져 있는데 말인데요.

서론이 길었습니다. 죄송.꾸벅. 질문인데요. 천주교와 성공회, 그리고 성공회와 개신교(예를들면 기독교 교회들)간의 핵심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해서요. 음, 교리의 차이랄까 그런 것이 있겠지요? 너무 궁금해서 이렇게 물어봅니다. 답변해 주시면 너무 감사할 것 같아요. 헤헤. 요즘들어 성공회에 관한 관심이 지대해져서 그렇습니다.

모두가 어찌보면 방법의 차이일 뿐 하나님 안에서 신앙하여 천국을 소원하기는 매한가지지만 말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과 감사가 신부님과 함께 있길 진심으로 바라면서 질문 마칩니다. AMen.^^*

+ 주님의 평화

WANI 님의 궁금증에 제대로 답변을 남기지 못하고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었군요. “기독 청년”의 궁금증은 좀 급할 것이 분명한데, 그런 마음 급한 사정을 헤아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

WANI 님의 궁금증은 전체적으로 성공회가 어떻게 다른 개신교들, 그리고 천주교와 다르냐는 매우 넓은 질문에 해당해서, 답변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떤 시각의 문제에 대해서 답변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그 리스도교 신앙의 다양한 전통을 알아보고 체험하면, 자신의 신앙적인 지평을 넓혀지리라 생각합니다. 성공회 역시 그리스도교의 아름다운 전통 가운데 하나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으로 체험하고 이해하고 실천하려고 애쓰는 교단입니다.

성 공회는 그 태생과 초기 발전 과정에서 얻은 경험때문에,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이면서, 역시 초대교회로부터 발전되어왔던 충실한 가톨릭 전통을 함께 보존하고 축하하려고 애쓰는 교단입니다. 한국에 전래된 그리스도교의 상황은 천주교와 개신교로 극명하게 나뉘고, 다양한 전통의 개신교마저도 역시 “미국식 복음주의 장로교”의 인상으로만 남아 있어서 자칫 다른 풍부한 개신교 전통에 눈감아버릴 염려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공회에 대해서 흔히들 묘사하는 말은, 교리적으로는 분명히 종교개혁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교회의 삶의 방식(즉 예전과 제도 등)에서는 초대교회 이후로부터 발전된 형식을 존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공회를 매우 간단하게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간단한 만큼이나 헛점도 많습니다. 실제로 개신교의 교리라는 것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큰 물줄기 안에서보면 서로 겹치거나 부분적인 것일 뿐이고, 그 또한 이전의 신앙 전통에 그 물을 대어 나르기 때문입니다. 소위 “가톨릭 전통”이라는 것도 로마 가톨릭 교회, 특히나 중세의 가톨릭 교회라는 각인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판단력으로 보게 되면, 개신교 자체 내에 있는 이른바 교회 전통의 유산에 대해서 설명할 힘을 잃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 러므로, 우리는 어떤 신앙 전통을 가름하거나 비교할 때, 먼저 공통점을 함께 기뻐하고, 그 공통점을 기반으로 하느님과의 저만의 독특한 체험과 전통을 바탕으로 해서 발전시켜 나간 서로 다른 특징을 살펴보는 생각의 순서를 갖춰야 하리라고 봅니다.

예.. 이제 성공회와 개신교, 천주교의 차이점들이 많이 있지요. 그런 세세한 문제들은 많은 분들이 이 게시판을 이용해서 질문하셨고, 저 또한 제 한계 안에서 답변해보려고 시도했습니다. 찬찬히 아래 게시판의 내용을 살펴보시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서 다른 질문들이 생겨나면 언제든지 게시판에 질문을 던져 주세요.

“25세 기독 청년”의 젊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신앙적 열정을 그리워하는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7월 31, 2004 at 3:0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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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 중도인가? 잡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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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공회 서울교구청에 전화하여 도봉교회를 소개받았습니다.
신부님과 약속까지 잡았다가 교회 홈페이지 들어가보고 멈칫했습니다.
십일조…부터 시작해서 우리나라에 일반화된 개신교회의 분위기가 강하게 풍겨서…
좀 거부감이 들더군요.
제 생각에는 성공회의 개방성과 Via Media 제3의 길과는 서로 배치되는 게 아닌가
하는 …
아래 게시판글에도 보면 여의도 순복음교회 출신이 사제가 된 경우도 있던데
나이, 성별, 교파, 사상 등 성직에 대한 자격조건으로 어떠한 것도 내걸지 않는
불편부당함과 공평성 내지는 복음주의적 가치가
성공회 안에, 좋게 말하면 스펙트럼의 다양화, 나쁘게 말하면
정체성의 모호함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사실 근본주의를 혐오하는 사람입니다.
저 자신 한때 저 자신도 모르게 근본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사람입니다.
(가톨릭에 와서야 비로소 저 자신의 질병을 확인하였지만 말입니다.)
아래 어느 전도사님이 지적하셨듯이 대한민국 대부분 개신교회가
이런 근본주의에 오염되어 있다고 봅니다.
전방위에 걸친 미국문화의 영향이 낳은 결과이겠죠.
그런데도 이에 대한 신학적인 반성을 통해 여과됨이 없이
교회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사제직을
무차별적으로 개방한다는 것은…
자칫 via media가 아닌 via dilemma로 빠질 위험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의 생각이 논리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을 줄 압니다만,
신부님의 그 겸허하신 성품에 기대어
감히 이런 말씀을 드려봅니다.
신부님의 답변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우선 지난 답변이 도움이 되어 교회까지 알아보게 되었다는 소식에 기쁩니다. 교단을 옮기는 일은 또 다른 신앙적 결단의 부분이기 때문에 주저할 일들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좋은 문제제기를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씀하신 내용은 저 역시 고민하고 있고, 그 고민의 흔적을 다른 분들과 나눠서 좀더 깊은 알음알이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이런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고민스럽지만 즐거운 대화가 지속되리라 생각하고 님의 문제제기에 대한 제 생각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님께서 제기하는 문제는 실제로 하나이지만, 좀더 큰 범위에서 성공회(신학)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과 그 구체적인 신앙 생활 형태에 관련된 것으로 억지로 나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먼저 님을 주저하게 한 구체적인 교회의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지요. 성공회가 개신교적인 분위기를 많이 “풍기고” 있다는 말은 부분적으로 사실입니다. 교회생활과 관련해서 한국개신교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관습이나 사목 형태가 공공연하고, 일례로 지적하신 “십일조” 같이 일견 개신교의 특허품처럼 보이는 헌금 생활도 분명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개신교적인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한국 개신교의 교회 행태 전체가 잘못된 것이 아닌 탓이고, 비판 받는 개신교의 어떤 요소를 성공회가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해서 그대로 적용해서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일부 개신교가 싫다고, 같은 예수를 믿는 다른 개신교단이나 성공회, 정교회, 천주교 모두 한 통 속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하신 십일조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십일조는 성서적으로도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고, 교회의 선교를 위해서 매우 필수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성서적인 맥락에서 이해된 봉헌이 아니라, 교회 자체를 위한, 즉 종교 집단 그 자체를 위한 모금 행위에 지나지 않을 때 비판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 문제를 한국의 많은 개신교가 보여주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만, 그것이 십일조와 같은 봉헌 행위와 그 용어를 폐지할 이유는 안됩니다. 제 경우에 제 자신이 십일조 생활을 하고, 교인들에게 십일조 생활을 하도록 신앙적으로 권고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성서에서 말하는 대로 교회가 부름 받은 선교를 위해서 사용되어야 하는 지를 함께 나눕니다. 그것은 강요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 생활 속에서 비롯되는 선교 행위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좀더 넒은 의미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개신교와 성공회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성공회가 개신교 종교개혁의 중요한 역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에, 그에 대한 부정은 성공회 자체에 대한 부정입니다. 한국의 상황 속에서 역시 한국의 그리스도교라는 전체 상황 속에서 성공회가 자리잡고 있기에, 개신교로서의 성공회가, 그리고 가톨릭적 전통을 지키려는 성공회가 그 사이에서 함께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재미있는 일은 천주교에서 오시는 성공회로 오시는 분들은 성공회가 너무 개신교적이라고 비판하지만, 다른 개신교에서 오시는 분들은 성공회가 너무 천주교적인 것 같다고 “멈칫”거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공회의 정체성에 대한 우려는 성공회 자체 내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특정한 시각으로 성공회 전통을 보려는 입장 자체의 혼란스러움의 반영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한 교단을 이적한다는 것은 신앙적 전통의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것인데 – 물론 여기에는 자신의 신앙적 체질이랄까, 어떤 선호도가 작용하지만 – 어떤 분들은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어떤 고정관념을 다른 공간에서 펼쳐 보이겠다는 ‘의지’를 강조하지요. 종교 혹은 믿음이란 무릇 ‘자신의 변화’를 중심으로 움직여 나가는데 이렇다면 교단의 이적이 무슨 의미일까 갸우뚱거리게 만들지요. 하기야 이런 일들은 성공회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 단체에서 공통적입니다. 천주교에도 양상이 다르지만 가만 보면 비슷한 갈등이 있고, 개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다만 이런 갈등의 여지 속에서도 어떻게 복음적인 가치에 내 자신을 맡기고, 그 길을 가느냐는 것이지요. 신앙의 길은 ‘나’ 자신의 선호도가 점점 묽어지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말이 한참 돌았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성소자의 출신 배경과 관련하여 언급하신 것에 대해서도 이런 신앙적인 변화의 길과 관련해서 생각하자면 문제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여부는 모르겠지만, 순복음교회 출신이라도 성공회 사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제 자신이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의 아지트라고 할 수 있는 예수교 장로회 합동 측 교회를 통해서 신앙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다양한 신앙적 체험의 경로로 이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출발지가 아니라, 신앙이라는 긴 여정을 어떻게 걸어가느냐, 그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그 길에서 만나는 예수님의 체험을 성공회라는 신앙 전통 안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제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켜 가느냐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직 훈련의 과정은 바로 이런 과정의 농밀한 축소판이지요, 그러니 “신학적 반성 없는” 투과가 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

성공회는 그런 신앙의 순례와 여정에 대한 남다른 고민을 하고 있는 교단입니다. 거기에서는 수많은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갈등하기도 하도 때로는 싸우기도 합니다. 말씀 하신대로 그 길은 이름만 반반한 “중도”이기 보다는 “혼란과 딜레마”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교리적인 확신이나 지침이 아니라, 여정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그 혼란과 딜레마를 솔직히 인정하고 이와 분투하며 걸어가자는 길이 성공회의 길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성공회 안에서는 어떤 근본주의도 어떤 교조주의도 발을 붙일 수 없는 것이지요. 어떤 주도적인 획일성이 없기에 성공회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가능하고 – 물론 그 역도 가능하지요 – 그 공간 안에서 서로 부대끼며 서로 변화할 수 있는 여지가 열리는 것이지요.

어처구니없이 길어져 버린 이 답변이 지루하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그 사이에 도움이 될만한 것이라고 건질 수 있으면 다행이겠습니다만…

다시 한번 좋은 생각의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된 형제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6월 18, 2004 at 2:54 오후

교회의 분열과 일치 – 누구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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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님이 쓰신 글]

안녕하세요 .. 저는 가톨릭 신자 입니다

본론만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과연 이렇게 나누어진 교회의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 일까요?

여러가지 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희 교회에 교리에 반대?

한다는 근거야 다의적인 의미가 많이 있는 성경에서 찾아서 신학적으로 정립하면 되

는 것이지 않습니까?

여하튼 주님이 세우신 교회의 본질을 제대로 실천하는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예수님을 직접 체험했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을 조금이나마 더 간직하고 사도들과 여러 성인들의 가르침이 남아있는

있는 교회는 가톨릭(동방가톨릭 포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잘못 속에서도 가톨릭이 구원사업을 행 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성령의 은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분열되었습니다. 피를 흘렸습니다.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모습일까요?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모습일까요?

사도 바오로도 고린토 교회의 분열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두서없이 어설프게 한 말씀 드렸습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 주님의 평화

“가톨릭”님 안녕하세요?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역시 안타깝게 생각하는 그리스도교의 한 신앙인으로서 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생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분열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무엇보다 지난 세기 이후 교회 일치 운동에 가장 헌신적이었던 성공회는 이 아픔을 더욱 크고 깊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분열에 대한 진단의 시각 자체가 서로 다르면, 치유를 위한 처방 역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 속에서 얻는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 교회가 가장 역사적으로 사도적인 교회’이니 ‘이 교단’을 중심으로 일치가 전개되어야 한다든가, ‘이 교회가 가장 성경에 기반한 교회’이니 ‘이 교단’을 중심으로 되어야 한다는 등의 의견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 정교회, 성공회를 비롯한 여러 개신교회들 안에는 이런 자기 주장을 통해서 서로를 설득하려는 움직임이 여전합니다. 그러나 그 전개나 결과는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가톨릭’님께서 주장하시는 대로 로마 “가톨릭 교회(동방 가톨릭 포함)”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의견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오래된 주장입니다만, 정교회(동방교회 및 각 전통의 정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예수님을 직접 체험했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을 조금이나마 더 간직하고 사도들과 여러 성인들의 가르침이 남아 있는 교회”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를 그런 교회로 자신할 지 언정 로마 가톨릭 교회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종교개혁은 크게 보면 중세 서방교회 안에서의 자기 개혁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쉽게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종교개혁이란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어떤 특정한 교단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이 속해있던 서방교회 전체 자체 “안에서” 일어나, 성서의 권위를 새롭게 비추어 보고, 그에 따라 교회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살펴본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다양한 개신교 형성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전혀 분열되지 않은 ‘정통’ 교회라고 자처하는 동방 교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서방 교회 내의 자기 분열일 뿐입니다. 즉 로마 가톨릭 교회도 하나의 분열된 교회의 일원일 뿐인 것이지요.

교회가 분열하여 서로 싸우고 피를 흘렸던 부끄러운 역사는 자신을 중심으로 어떤 일치건 통합이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 속에서 싹텄습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들은 세속 정치 권력을 이용하고 거래를 했으며, 한 분이신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형제들을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도륙했던 것이지요. 즉 어떤 배타적 기준에 의한 일치라는 것이 이미 하나의 환상이거나, 동시에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깨달은 지 오래라는 사실입니다. 서방교회 전통 안에 있는 개신교회가 세월을 거듭해서 분열했던 이유들은 이런 ‘배타적 진리 소유’라는 입장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런 전철을 밟질 않길 바랍니다. 이미 로마 가톨릭 교회는 1960년대 초 바티칸 2차 공의회 이후 이런 배타성의 원리에 대한 반성을 제기하였고, 그 이후 지속적인 교회 일치 대화가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무엇보다도 서로를 통해서 복음의 진리, 교회 신앙의 전통을 풍요롭게 배우는 시기였습니다. 이미 1940년대에 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 측의 교회 일치 운동과 더불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런 포용성의 원칙을 제공한 것은 그리스도교 역사에 큰 축복으로 남아 있습니다.

님 께서 말씀하신 대로, 교회는 잘못을 통해서도 성령의 은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쉬지 않고 전개합니다. 그러나 그 성령의 은총을 로마 가톨릭 교회만이 독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자유롭고 넓으신 성령은 그리스도교회 전체의 분열이라는 아픔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내의 여러 신앙 전통 안에서 그 역사와 그 신앙인들과 그 현장의 삶을 통해서 내내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넓으신 성령님의 활동을 감지하면서, 교회의 분열과 그 아픔을 응시하는 일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해나가는 일은 늘 “내 탓이오” 하는 철저한 자기 반성을 통해서 더욱 깊어짐과 동시에 다른 이들과의 폭넓은 대화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회의 태도에 대해서만 짤막하게 덧붙이면 이렇습니다. 성공회는 교회 일치와 관련하여 “일치를 위해서 스스로 사라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 기꺼이 사라지길 다짐하는 교회”라는 신념을 그 신앙과 실천 속에서 발전시켜왔습니다. 이 때문에 성공회는 어떤 가능성에도 열려 있는 교회가 되기도 하고, 또한 이런 개방성 때문에 그 모호한 정체성에 대한 비판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회는 최소한 이러한 태도가 교회 일치에 진전을 가져오리라는 확신과 경험을 통해서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길도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중요한 하나의 길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 길 속에서 함께 만나서 이야기하고 걷고 어깨동무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길만이 옳다고, 이런 걸음자세만이 옳다고, 이런 여행 복장이 옳다고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종종 이런 자기 주장들은 ‘남을 제어하기 위한 내 신념’이었을 망정 성령님의 은총에 나를 맡기는 ‘투신의 신앙’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길 어느 모퉁이에서 다시 만나기를 희망하며,

주낙현 신부 합장

신부님의 글 정말 잘 읽었고 많이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일치라는 것 말은 쉽지만 서로 양보와 희생을 기본 전제의 바탕으로 삼아야 겠지요.

이것이 어려워서 지금도 이렇게 갈라진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렇고 신부님도 그렇고 자신의 교회에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신부님 말씀대로 교회가 누구를 중심으로 일치해야 되는가란 문제는 정말 많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동안은 무조건 저희 교회 중심으로 라는 생각만 앞섰던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그럼 신부님에 말씀을 제 주관으로 해석한다면

(게다가 종교개혁은 크게 보면 중세 서방교회 안에서의 자기 개혁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부님의 말씀 중에서

만약에 성공회가 잘못한점이 있어서 누군가 개혁이 필요하다고 교회를 나간다면
그것은 올바른 행동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감리교는 성공회에서 나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공회에서는 감리교를 자기개혁를 잘한 교회로 보시는 지요???

마 지막으로 교황 선출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의 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봅니다. 신부님이 앞서 글에서 성령의 작용이 어느 교회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황님에 대한 비판의 글은 남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결국 신부님의 성공회 중심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됩니다. 이 점에 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또 염치 없이 글을 올립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 되기를 기원하며 -엘리사- (제 본명 입니다.)

+ 주님의 평화

엘리사님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 답변과 다른 글에 대해 의견 주신 것 고맙습니다. 어떤 질문이든 함께 나눠보자는 초대한 것이니 엘리사님이 염치 없을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즐거움이기를 바랍니다.

이 미 많은 이야기를 위에서 했으니, 다시 질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제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교회 일치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종교개혁을 통한 분열이 하나의 자기 개혁 운동이라고 할 때 성공회와 감리교의 분열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는 블로그에 올렸던 새로운 교황에 관한 글이 “성공회 중심의 비판”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제가 답변에서 했던 말과 모순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첫째로, 성공회와 감리교의 분열에 관한 것입니다. 앞서 답변에서 종교개혁에 대한 제 나름의 표현을 다시 언급하자면, 종교개혁이란 세계 그리스도교의 견지에서 보았을 때 “서방 교회 내 자기 개혁 운동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엘리사님이 감리교에 빗대어 말씀하신 “자기 개혁이 잘된 교회”를 뜻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디에서도 종교개혁이 “자기 개혁이 잘된 교회”라는 의미에서 그 분열을 정당화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런 생각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 평가는 잠시 접어두고 그것이 하나의 필연적인 “산물”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회 역사 안에서 일어났던 특정 시기의 어떤 신앙 쇄신 운동이 기존의 전통 안에서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감리교가 독립적인 교단으로 발전해 나간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반성이 필요합니다. 그 하나는 이런 자기 개혁의 동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당시 교회의 폐쇄성에 대한 반성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개혁 운동의 주창자가 끝까지 성공회 안에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의 추종자들이 교단적인 분리를 택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성공회로서는 당시의 폐쇄성에 대해서 반성해야 할 것이고, 감리교로서는 분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느냐는 반성이 필요합니다. 즉 반성은 서로에게 요구하는 것이기 이전에 먼저 자기 안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그 때에 건설적인 대화가 진행될 여지가 마련됩니다. 결국 세계 각국으로 펼쳐진 감리교와는 달리 정작 영국 감리교는 최근 영국 성공회와 실질적인 교단 통합과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그 시점을 두고 “올바름”을 따지고 들었다면 요원한 일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더 욱이 현재의 우리는 과거 분열 시대의 당사자들과는 다릅니다. 그 분열과 분리의 역사적, 신학적 계기가 동기가 어떠했든 간에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전통을 유지하면서 살아왔고 그 전통의 영향권 아래서 자신의 신앙을 발전시켜왔습니다. 다만 그 발전 속에서 복음과 신앙의 전통 속에서 우리 신앙을 재발견하며, 우리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반성하고 새로운 교회와 선교의 비전을 찾아가며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교회의 일치는 우리가 이미 살아가고 있는 이 전통 안에서 복음을 통한 이러한 개혁의 길 가운데 만나야 할 어떤 것이지, 과거 어느 시점을 중심으로 한 환원 운동이 아닙니다.

교회의 분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열에는 건설적인 분열이 있는가 하면, 파괴적인 분열이 있습니다. 건설적인 분열과 분리는 교회의 일치를 위협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다양성과 복음의 보편성을 아우르게 하여, 결국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파괴적인 분열은 서로에 대한 반목과 질시를 낳고 결국 대결과 폭력을 동반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훼손할 것입니다.

둘째로, 최근 교황 선출과 관련된 글에 대해서는 짧게 답변하겠습니다. 우선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시라고 권유하는 수 밖에 없지만, 좀더 덧붙인다면 이렇습니다. 그것은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의 신앙인으로서 바라본 하나의 “상념”이었을 뿐입니다. 다만 그 상념의 근거들을 여러 사람들의 평가 – 제가 공부하고 있는 미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 나오고 있는 – 와 더불어 확인하고, 종국에는 어떤 희망을 가져보려는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많은 미국 가톨릭 신자들의 비판과 실망감을 보면서, 다른 교단의 성직자 한 개인으로서 느끼는 아쉬움의 표출 정도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글 말미에 언급한 것처럼, 그분의 새로운 이름대로 세계와 교회에 “축복”이길 희망할 뿐입니다.

평화를 빌며

주낙현 신부 합장

신부님 이번 글도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인터넷으로 나마 허물없이 대화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교황님에 대한 신부님의 글을 보고 맞는 말씀이지만 제 생각과 다른 부분을 이야기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보수라는 의미의 약간은? 부정적인 어조 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판치는 시대로 옛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의견이 팽배한 세상 입니다. 이 점은 신부님께서도 충분히 동의 하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진리는 지켜져야 합니다. 진리가 무너질때 세상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진리보다 행위가 앞설 때 역사는 말해 줍니다. 그 결과는 바로 마르크스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켜져야 할 것은 지켜야 합니다. 단순히 개방 자유. 인간 존중 이라는 논리 아래 지켜야 할 것을 버리는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이겠습니까?
신부님의 의견이 물론 아니시겠지만 성공회의 동성애자에 대한 주교 서품 같은 것은 자유의 미명아래 해서는 안될 것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반성하고 새로운 교회와 선교의 비전을 찾아가며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라는 신부님의 글은 모순 됩니다.
복음을 강조하면서도 개혁과 진보라는 미명아래 복음 정신에 어긋나는 것들을 주장하는 논리말입니다.

또 한가지 질문들입니다. 성공회는 성찬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임재설을 교리로 가지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임재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즉 성체를 어떻게 바라보시는 지를 알고 싶습니다. 분명 가톨릭의 성체이해가 왜곡되어 있다고 하시겠지만 성경에 분명히 그리스도에 몸과 피를 나누어 마셨다는 초대교회에 증언이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한 의견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공회는 가톨릭과의 유대성에 따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3단계로 나누어 진다고 하는데 이점에 대해서도 답변 부탁드립니다.
하이 class 로우 class 라는 표현 말입니다.

일치(Unitas)의 출발은 대화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신부님과 대화 할 수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주님의 평화

엘리사님과 이야기가 길어지는군요(^^). 이곳에만 시간을 쓸 수는 없는 처지이니 최선을 다하되 되도록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일 치의 출발을 대화”로 생각하게 되었다니 기쁩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 속에서는 공통점도 발견하게 되지만 극명한 차이점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차이점들을 이미 엘리사님이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선 이러한 차이점은 로마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천양지차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우선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제가 엘리사님께 우선 바라는 게 있다면 이렇습니다. 어떤 분명한 기준을 두고 분명한 견해를 밝히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 분명한 기준에 대한 성찰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성찰이 충분하지 않으면 필요 없는 오해가 줄기차게 생겨나고, 결국 자신을 어느 시점 안에 가두고 다른 것을 보지 않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예를 들어봅니다. 저는 “완고한 보수주의자”라는 제한된 표현 속에서, 그리고 그런 표현의 선택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 속에서 나름의 생각을 펼쳐낸 것이지, 엘리사님께서 지적하는 것처럼 “보수”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지적들은 내내 엘리사님이 가진 선입견 안에서 확대해석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견해나 “진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표현들이 그 예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태도, 그리고 “세상이 무너지는” 증거로 제시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평가 자체가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다양하다는 점을 먼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엘리사님은 제 말을 인용한 “우리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반성하고 새로운 교회와 선교의 비전을 찾아가며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라는 말을 어떤 모순 어법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에는 “복음”과 “진리”를 엘리사님이 마음에 두고 있는 어떤 특정 교리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습니다. 교리는 “복음”과 “진리”를 드러내고 소통하기 위한 제한적인 방법이요 표현에 불과합니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으로 교리는 “복음”과 “진리”를 막는 장애물로 등장하기도 했고, 그것을 훼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오류에서 어떤 교회 전통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또 그런 이유에서 교리는 시대와 상황 속에서 변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리가 변화와 요구와 도전을 용기 있게 받아들일 때 그것은 또한 복음을 드러내는 수단으로서 유용성을 항상 유지하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과 교리의 차이이자, 그 관계이기도 합니다. 이 상관관계의 긴밀한 역동성을 식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이기도 하며, 또한 우리의 기도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런 식별을 통해서 교회는 교리의 변경을 결정하기도 하고, 잘못된 교리에 근거했던 교회의 생활과 실천을 바꾸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자기 개혁입니다. 이것이 또한 맹목적인 세속적 지배 이데올로기와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른 점입니다.

이런 생각 끝에 저는, 엘리사님이 그리스도교 전통, 최소한 로마 가톨릭 전통 자체의 풍부한 자산들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많은 내적인 대화를 열어가길 권유합니다. 그리고 대화가 깊어가는 과정 속에서 다른 여러 동료 신앙인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엘리사님의 교회 성직자와의 대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전통의 신앙인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전통에 대한 이해가 폭넓고 깊어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성찬례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는 이 게시판의 다른 곳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화체설”과 “성찬”과 같은 검색어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질문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성공회 내의 어떤 성향에 대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가톨릭과의 유대성”이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기 어렵고, 예전적인 성향과 신학적인 성향에 따라 “고교회” “광교회” 그리고 “저교회”라는 표현으로 성공회 내의 다양한 흐름을 설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내용 역시 검색어를 통해서 먼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 삶과 죽음과 부활로 보여주신 복음의 길을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만나게 될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그 잡히질 않고 내내 걸어야 할 것을 요구하는 복음의 목소리가 엘리사님을 늘 이끌어 주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넓고 크신 은총이 함께 할 것입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4월 23, 2004 at 3:22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