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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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서 신앙과 선행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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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평화

세번째 질문과 답변입니다.

질문 3.

잘 아시겠지만 가톨릭의 구원관은 신앙 + 선행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고 개신교는 오로지 신앙만으로 족하다고 하지요.. 이 부분은 종교개혁시부터 굉장히 중요한 논점중의 하나로 부각되었었고요. 아직도 좀 그렇지만 그렇다면 개신교 중 가장 가톨릭 색채가 강한 성공회는 이 부분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요.? 구원이 신앙만으로 족하다고 보시는지 아님, 선행이 덧 붙여져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답변 3.

여기서 가톨릭이라면 로마 가톨릭 즉 천주교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되묻는 것은 “가톨릭”에 대한 오해와 선입견 때문입니다. “가톨릭”이란 한 그리스도교 전통 교단의 명칭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그리고 구원자로 믿는 모든 그리스도교의 대명사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톨릭 신앙”이란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 쯤으로 이해해야 할텐데, 그런 용법이 늘 문제가 되는 것 같군요.

본론에 들어서서,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신앙과 선행의 문제는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 논란을 여기서 재현할 필요는 없지만, 이런 논란에 대한 한가지 불만은 신앙의 원리를 너무 쉽게 단정하려는 듯한 태도입니다. 그러니까 천주교에서 믿음과 선행을 병렬로 놓은 것도 문제지만, 이를 굳이 선후의 문제 혹은 종속의 문제, 아니면 배제 용법을 써서 “믿음만”이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앙”은 이러한 인간적인 손쉬운 용법 너머에 있습니다. 신앙과 선행의 문제는 하나의 문제이지 선후의 문제 혹은 병렬의 문제가 아니지요.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신앙인에게 선행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할 생활의 덕목이라면, 그것은 이후에 무엇이 덧붙여져야 구원이 가능하다는 조건법과 상당히 다르지요. 그리고 신앙은 그것을 가진 사람의 총체를 드러낼텐데 “신앙”이라는 하나의 이념적인 아집만 있고 “이에 따른 삶”이 보이지 않는 것 또한 가톨릭 신앙에서 벗어납니다. 이는 모두 신앙의 경지에 들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신앙+선행”이라는 등식이나 “신앙만”이라는 조건도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참 인간이요 참 하느님으로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보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지요. 그분에게 신앙과 선행이라는 것은 구별되어 있지 않습니다.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한 분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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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khfaq

8월 15, 2001 at 2:3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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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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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이님께서 남긴 내용]
안녕하세요.

구원이란 단지 믿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아니면 믿고 선행이 있어야 됩니까?
제생각은 전자는 아니고 후자인것같아요.

감사합니다 (2000.9.17)

+ 주님의 평화

좋은 질문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제야 답변드려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사실 요즘 매우 바쁜 일이 있었던 탓도 있지만, 간단하게만 답변할 수 없는 질문으로 고민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항상 답변에는 고민스러움이 있지요. 이 답변은 하나의 의견이지 정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정답”을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이 저를 지배하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말머리가 장황해서 미안합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신비의 사건입니다. 이를 하느님의 신비라고 하는 것은 구원의 사건에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단호한 생각 때문입니다. 사실 ‘구원’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왈가왈부할 수 없는 처지라는 말이지요. 전적으로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조건부 계약과는 다르지요. 그런데도 “구원의 조건”은 “믿음”이라는 등식이 쉽게 통용됩니다. 이는 아마 하느님의 신비를 어떻게든 인간의 말로 표현해서 설명하고 설득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제한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입니다. 저는 이런 전제를 두고 질문하신 것에 간단히 답변하겠습니다. 말머리가 더 길군요. 용서 ^^

믿음과 실천을 대립시키거나 선후관계로 파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믿음에 따른 구원”이라는 주제는 신약성서에 로마서에 가장 잘 나타나는데,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믿음’ 자체만 언급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 로마서에서 ‘실천’ 혹은 ‘행함’이라는 인간의 선행에 대해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사도 바울로 당시 율법주의적인 유대인들이 가식적인 율법의 실천에만 매달리며 진정한 속내의 변화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다른 신앙심 깊은 이방인들을 향해 우쭐거리는 종교적인 오만을 드러냈던 것과 관련이 깊지요. 로마서 전개를 조심스럽게 살피면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가 자세하게 전개됩니다. 게다가 고린토전서 13장에서는 ‘가장 좋은 길'(표준새번역)로 믿음, 소마, 사랑을 이야기하고 그 가운데서 으뜸을 ‘사랑’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삶과 실천이야말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지요.

게다가 야고보서에서는 로마서와 정반대의 표현들이 엿보여서 이채롭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야고 2:14) 이것이 로마서와 모순되는 말일까요? 사실 이 역시 율법주의적인 유대인들 혹은 신앙심 깊은 체하는 신자들의 종교적인 오만함과 위선에 대한 경고라는 점에서 로마서와 맥이 닿아 있다고 할 것입니다.

“믿음” 안에는 “사랑”이라는 실천이 이미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실천은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제대로’ 할 수 있다는 자긍심이 들어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믿음과 사랑의 실천은 뗄 수 없는 것이요, 선후관계도 아니지요.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장 비난받는 요인은 곧 사랑의 실천이 없는 허울뿐인 ‘믿음’의 과대포장과 선전 때문이 아닐까요? 믿음은 선전도 과대포장할 것도 아니요, 다만 삶 속에서 믿음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 자체가 아닐런지요.

부족한 답변이나마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부제 드림 ^^

Written by skhfaq

10월 3, 2000 at 1:11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