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an Korean Anglican FAQ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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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참여, 전통 문화, 교회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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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조선일보 광고제작국에서 광고디자이너면접을 위해 간 적이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조선일보 앞이 성공회 서울 대성당이더군요.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존중한 개신교회인 성공회 서울 대성당의
건축양식을 보면서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 개신교에서 복음전파 우선주의로 인해 사회참여에 소홀할때
묵묵히 교회를 6월항쟁의 장소로 개방한 성공회의 사회참여의지가 생각났습니다.
앞으로도 성공회의 그러한 순수하고 진보적인 신앙이 변색되지 않기를 기원드립
니다. 방긋~

김재홍 형제 드림.

+ 주님의 평화

성 공회에 대한 좋은 인상에 대한 말씀을 이 곳까지 찾아와 남겨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대로 서울대성당은 나름대로 전통 문화를 서양식 로마네스크 건축에 반영하고자 애를 쓴 기념비적인 건물입니다. 물론 점더 치밀하게 살펴보면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우리 문화와 그리스도교의 대화에 대한 문제를, 비판적이 면에서나 긍정적인 면에서나 새롭게 제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 리 전통 문화를 교회 건축에 결합시킨 모습의 전형은 성공회 강화읍 교회를 들 수 있습니다. 유교 향교의 건축과 불교 가람 배치와 건축적 요소들이 혼합된 형태이면서, 동시에 내부는 전형적인 서양식 그리스도교 예배 공간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닿으시면 강화도에 유람하시면서 한번 방문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성공회 대성당이 87년 민주화 항쟁의 역사적인 거처가 되었다는 것 또한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과거의 어떤 역사에만 기대어 으스대지 않고 더욱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와 복음화에 대한 열정을 통해서 우리 사회를 좀더 변화시키고, 소외된 이웃 그리고 소수자들에 대한 포용의 삶을 발전시키기를 더욱 바랄 뿐입니다. 성공회 교인들과 성직자들이 이에 대해 늘 기도하며 고민하면서 애쓰기에 그 미래는 밝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나선 처지에서 교단적 전통의 다름은 때로 불신과 배척을 가져다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의 부족한 점들을 되돌아보게 하고,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마련한다고 생각합니다. 약간 다른 모습으로 같은 길을 함께 하면서 만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만남을 기뻐하며,

주낙현 신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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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khfaq

3월 3, 2005 at 3:2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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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질문에 대한 답변 몇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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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안녕하세요? 저는 숙명여대 사학과 학생으로 성공회에대하여 공부하고있는 중입니다…^^
사실 오늘이 예배가 있는 날인것 같아서 성당에 예배당에한번 가볼까도 했지만.. 낯설고, 또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신도들을 직접 찾아뵙는다는것이 용기가 나지않아 신부님께 먼저 메일을 보내 봅니다..

바쁘시겠지만… 너무 귀찮아마시고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주세요~~~^^
저는 종교학과도 아니고 사학과이기때문에 성공회는 물론 다른 교에대해서도 그리 알고 있는게 별로 없
고 아직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기때문에 더더욱 공부하기가 더욱 힘이드는것 같습니다… 부제님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우선 몇가지 항목이 있는데요,,,,

성공회같은 경우는 불교나 기독교 혹은 천주교 처럼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신도수가 많지 않은 종교라 할수 있는데요..
대부분의 혹은 특별히 성공회를 택하게 된 신도들의 이야기에 대해서 알고 싶군요… 그리고 신부님의 경우에도 어떻게
성공회를 믿게 되셨으며 신부님까지 하게되신 이유도요,,,

그리고 제가 신문이나 매스컴에서 듣기로는 이슬람 같은 종교(아랍권의 종교라 더 그렇겠지만)는 아무리 신자라해도
한국 사람의 경우 대부분이 자신의 종교를 다른 사람이 알기를 꺼려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성공회의 신자들은 어떤지..
(제가 가끔씩 길거리 같은 곳에서 만나는 분들은 그렇지 않은것 같았지만,,,혹시나해서요..^^)
또 기독교나 이슬람 종교와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같은 것인지…. 또 어떤 차이가 있는것인지….
또 다른 종교(우리나라에서 대다수가 믿는 종교)인이나 무교인 사람들에게서 혹시나 특별하다는 인식이나 소외감 같은것을
느껴 본것이 없는지….

음..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으로 성공회가 어떤 형식으로 발전하고 사회에 이바지했으면 좋겠는지…^^
너무 질문이 많았나요?^^ 너무 벅차시면 몇가지에만에 대해서 만이라도 답변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힘드시면 제가 직접 찾아가서 만나뵈도 저는 더 영광이고요~~^^: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주님의 평화

안녕하세요? 이름을 알 수 없으니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제 홈페이지에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질문을 던져 주시 것도 감사하구요.

공부하는 사람의 특권은 누구한테나 부끄러움 없이 물어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성공회 성당을 찾으셔서 경험을 하고 여러분들을 만났으면 더 좋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에 관련된 이야기는 무엇보다 교리적인 태도나 신학적인 입장보다는 경험이 어떤 점에선 더 중요할테니까요.

질문하신 내용에 대해서 간단히 답변드리겠습니다.

1. 성공회는 교인이 적은 그리스도교의 한 교단입니다.

성공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의 한 교단입니다.
그리스도교에는 천주교와 개신교로 분류되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고 침례교 등 아주 다양하지요.
성공회는 16세기 종교개혁과 함께 나온 3대 교단 가운데 하나입니다.
즉 루터교, 장로교, 성공회가 종교개혁을 통해서 형성된 개신교의 주요 3개 교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3개 교단은 이후 개신교 발전의 뿌리가 됩니다.
예를 들자면 성공회에서 감리교나 구세군 등이 형성되어 독자적인 교단으로 발전되었던 것이지요.

성공회를 “택하게 된 동기”랄까, 이런 것은 다른 종교인들과도 그 모습이 비슷하다가 할 수 있습니다.
가족이나 부모님이 신자여서 그대로 그 신앙을 물려받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물론 이런 경우가 대다수입니다만)
저처럼 장로교에 있다가 신학적인 이유나, 다른 어떤 요인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성공회에서 다른 개신교나 천주교로 이적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처럼요.

현재 한국성공회 신자들은 “아마도” (공식적인 통계가 없으므로, 제 느낌으로)
성공회에서 나고 자란 신자가 40% 그리고, 개신교에서 온 신자들이 약 35%,
그리고 천주교나 다른 종교에서 온 분들이 약 10%, 나머지는 종교가 없던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2. 성공회 신자는 성공회 신자인 것을 드러내는가?

말씀하신, 자기 종교를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것과 숨기는 것의 차이를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리고 이슬람교와 관련한 내용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성공회는 스스로를 매우 훌륭한 그리스도교 신앙적 전통의 하나라고 믿고 있고
그에 대한 자긍심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 개신교 신자들과는 그것을 드러내는 모양과 태도가 좀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의 성공회 신자들은 성공회 신자가 된 것을 기쁘고 즐겁게 생각합니다.

3. 다른 종교와의 관계…

질문하신 내용 가운데는 몇가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성공회는 앞서 말씀드린대로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 가운데 하나입니다.
같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천주교 혹은 다른 개신교들과 약간의 차이점들이 있는 것이지요.
우선 같은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차이점 보다는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 선후 관계가 매우 중요하지요. 사람들은 쉽게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에만 관심을 두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전체 맥락과 그 대상을 오해하기 매우 쉬운, 위험한 방법이라고 봅니다.
여느 교단처럼 성공회도 다른 교단들과 교리와 그 교회의 모습에서 차이가 조금씩 있습니다.
특히 성공회는 다른 개신교와 비교할 때, 예전(전례 혹은 예배)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천주교와 흡사한 모양을 갖고 있지요. 그러나 그 이면에 있는 신학적인 태도는 오히려 개신교와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성공회는 한국에 있는 많은 개신교와는 달리,
사회 문제나 윤리, 교리적인 문제 등에 대해서 매우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성공회가 수적으로 소수이고, 한국의 천주교나 개신교 등과는 달리 매우 개방적인 교리적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의 정형화된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성공회 신자들은 이에 대해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수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는 어떤 사태와 사건, 그리고 무슨 문제를 판단하는데 매우 협소한 시각을 줄 가능성이 많다고 봅니다.
그러나 점차로 지각있는 분들은 성공회가 갖고 있는 신앙적 태도와 교리적, 예전적 성향들이
우리 사회에 좀더 필요한 가치들을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그리스도교 신앙 전통이라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새로운 성공회 신자 가운데 대부분은 개신교 혹은 천주교에서 온 분들입니다.

4. 성공회 사회적 기여

성공회는 그리스도교 교단 가운데서도 무엇보다 “신앙의 생활화”를 강조한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성공회가 예전(예배와 기도)를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신앙을 우리 몸에 배게 해서
몸으로 “살아가는” 신앙 생활의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그 탓에 성공회는 “교회”에 대한 개념을 아주 폭넓게 적용하고 있습니다.
즉 교회는 신자들만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하시는 모든 곳이라는 신념과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 사회 속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와 경제적 관계 안에서 소외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성공회는 이런 소외된 사람들이야 말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절급한 분들이라고 보고
이 분들을 위한 선교와 도움에 누구보다도 앞장 서왔습니다.
특히 80년대 부터 도시 빈민 선교로 시작된 “나눔의 집” 운동 등은
이러한 신앙의 생활화의 중요한 면모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성공회는 이러한 신앙의 생활화 안에서, “자기 교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서
사회에 보살핌의 손길을 펴는 일에 앞장서고 있지요. 이것은 다른 종교에도 귀감이 될만 한 것이거니와,
성공회도 다른 종교의 이러한 훌륭한 신앙적 실천에서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공회는 좀더 개인적 구원뿐만 아니라 사회의 변화에 따른 사회적 구원이랄까,
어떤 총체적인 구원에 좀더 신경을 쓰고 있으며, 이 때문에 다른 종교와의 대화에도 매우 적극적인 교단입니다.

아울러, 성공회는 천주교와 개신교 사이에 놓여 있는 갈라진 틈을 잇은
다리 역할을 오랫동안 해왔습니다. 이른바 교회 일치 운동 혹은 에큐메니칼 운동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성공회는 이런 교회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서, 나아가 분열된 사회의 치유를 위해서 힘쓰는 것을
교회의 사명이요 소명이라고 알고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5. 만남은 항상 좋은 것이지만….

좋은 질문에 허튼 대답이 되지 않았나 염려스럽습니다.
한번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있다면야, 저로서도 하고픈 말을 많이 나눌 수 있을텐데요.
하지만 이를 어쩝니까? 저는 지금 태평양을 건너서,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도 싫어하고, 저 역시 싫어하다 못해 증오하고 싶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때문에
참고 있는 바로 “미국”에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하도 덜 떨어져서, 다시 공부하라는 명령을 받고, 작년 가을부터 미국 버클리에서 공부하고 있거든요.
만날 수는 없더라도, 좋은 대화가 지속되기를 희망합니다.

하여튼 부족한 답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 간절합니다.

봄볕처럼 따사로운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기원하며…

주낙현 신부 합장 ^^

Written by skhfaq

3월 19, 2003 at 12:4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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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론과 사회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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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잘 지내시죠?
공부는 잘 되시나요?
여기 홈피에도 자주 들르지도 못하게 되네요.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전부터 제가 성서에 대한 관심 때문에
자주 여쭤보곤 했는데
요즘 와서 질문을 잘 안 드리게 됩니다.
관심이 적어져서 그런 건 아닌데
관심의 방향이 약간 바뀌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 성서를 묵상하다가
‘거룩한 독서’의 느낌을 알게 된 후로는
전에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성서독서의 맛을 새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서에 관한 학적인 관심이 그렇다고 줄지는 않았는데
훨씬 폭이 넓어진 것을 느낍니다.
복음주의에 대한 과도한 거부감도 많이 줄었고
그동안 다소 무시했던 이천년 기독교 전통에 대해
많은 부분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그리고, 저 자신이 얼마나 거만한 눈으로 세상을 보았는지를 새삼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께서는 희망 속에 살아계심을 느낍니다.
하느님을 뵈온 적도 없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더욱 믿을 수 없는 저였습니다만
이제 그렇지 않을 수 있을 것같습니다.
하느님은 정말 사랑이십니다.

신부님 한가지 질문 할께요.
왠지 신부님께 글쓰다 보면 자꾸 질문거리가 생각나네요.
대천덕 신부님의 글을 보면(아직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만) 성령에 대한 관점과
사회에 관한 관점이 별다른 모순없이 통일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제가 아는 바로는 교계에서 그런 방향은 다소 생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런 흐름이 세계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있는 건지요?
신부님 잘 지내시죠?
공부는 잘 되시나요?
여기 홈피에도 자주 들르지도 못하게 되네요.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전부터 제가 성서에 대한 관심 때문에
자주 여쭤보곤 했는데
요즘 와서 질문을 잘 안 드리게 됩니다.
관심이 적어져서 그런 건 아닌데
관심의 방향이 약간 바뀌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 성서를 묵상하다가
‘거룩한 독서’의 느낌을 알게 된 후로는
전에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성서독서의 맛을 새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서에 관한 학적인 관심이 그렇다고 줄지는 않았는데
훨씬 폭이 넓어진 것을 느낍니다.
복음주의에 대한 과도한 거부감도 많이 줄었고
그동안 다소 무시했던 이천년 기독교 전통에 대해
많은 부분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그리고, 저 자신이 얼마나 거만한 눈으로 세상을 보았는지를 새삼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께서는 희망 속에 살아계심을 느낍니다.
하느님을 뵈온 적도 없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더욱 믿을 수 없는 저였습니다만
이제 그렇지 않을 수 있을 것같습니다.
하느님은 정말 사랑이십니다.

신부님 한가지 질문 할께요.
왠지 신부님께 글쓰다 보면 자꾸 질문거리가 생각나네요.
대천덕 신부님의 글을 보면(아직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만) 성령에 대한 관점과
사회에 관한 관점이 별다른 모순없이 통일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제가 아는 바로는 교계에서 그런 방향은 다소 생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런 흐름이 세계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있는 건지요?

+ 주님의 평화

아타나시오 형제님 안녕하세요?

종종 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구나 성서 독서의 맛을 들이기 계신다니 아주 기쁩니다.
그런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번에 제가 드린 조언이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나름대로 이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보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참으로 넓고도 깊지요.
그런데 또 그걸 손바닥 하나에 얹어놓으려는 시도들이 있고,
이런 짧은 시도로 만든 잣대로 이 사람 저 사람을
휘둘러 판단하는 것은 실제로 신앙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한없는 넓이와 깊이 속에서,
무한하신 하느님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좋은 질문을 주셨는데, 곧장 답변하기가 어렵군요.
특히 그것이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그분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나름대로 매우 특이한 “복음주의적 성령론”을 가지고 계셨는데,
이것은 한국 개신교 혹은 천주교의 이해와는 사뭇 다릅니다.
하지만 그분의 태도는 성공회 신학과 전통, 아니 그리스도교 신학의 전통 속에서 보면, 또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미 그러한 전통이 다양하게 존재하는데도, 한국 교회가 이를 무시했거나,
이런 시도들과 전통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이지요.

저는 다만 좀 다른 관점에서 성령을 이해하고, 영성을 이해는 책을 몇권 소개할까 합니다.
아타나시오 형제님이 책을 좋아하시니까, 이걸로 제 의무를 하나 피하려는 얕은 계략이지요. ^^

우선 성령에 대한 진보적인 신학자의 이해를 살피려면

위르겐 몰트만 “생명의 영” (대한기독교서회)와
클라우스 베스터만 “조직신학”(한국신학연구소)에 들어 있는
성령에 대한 이해를 참조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오래 전에 읽은 책들이라, 좀 가물 가물 합니다만… 죄송 ^^

성서와 함께 읽을 수 있는 재밌는 책은… 좀 오래되긴 했지만…

로버트 매카피 브라운 “뜻 밖의 소식” (한국신학연구소)
로버트 배카피 브라운 “영성과 해방”(한국신학연구소)

그리고 몇몇 라틴아메리카 해방 신학자들의 저서들을 함께 추천하면….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한국신학연구소)
그리고 제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님의 “삼위일체”에 관련된 책을 찾으시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책들이 이해하고 있는 “영성”의 개념이 성령에 대한 이해와
어떻게 분명하게 결합되는지를 설명할 능력이 제게는 없고
그저 마음 깊은 곳에서 서로 울리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해서 덧붙였습니다.

성서 공부와 신학 공부도 좋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한 마음 공부도 잊지 마십시오.

이 말은 제 스스로에게도 던지는 말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

Written by skhfaq

3월 5, 2003 at 12:47 오후

교회의 사회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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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주 신부님.
저는 장로교회를 다니는 청년입니다.
이번에 SOFA개정을 위한 서명을 교회 이름으로 하려고 했었습니다.
청년회 담당 전도사님도 크게 호응을 해 주셨고,(교단차원으로 소파
개정운동이 벌어지도록 하실정도였습니다.) 학생회 담당 전도사님도
크게 호응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문제는 담임 목사님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사회참여를 하는게 싫으신 듯 합니다.
교회이름으로 사회참여를 하면 안된다면서, 오히려 교회의 사회 참여를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성경에서는 사회참여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합니다.
정말 교회에서 사회참여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인지요..
답답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저는 교회가 사회참여를 하지 않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한국 개신교가 독재에 침묵을 지킨 것을 알기에….

질문에 대한 아타나시오님의 답변

저도 같은 내용을 고민하고 있어
함께 나눠보고자
그냥 주제넘게 답변을 드립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점점 더 보수화되어가는 교회의 침묵에
무척이나 답답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성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느끼는 점은
기독교의 본질은 구약에서 신약까지
철저히 사회적인 종교라는 점입니다.
바울로 신학에 와서야 개인적으로 편향된 느낌도 약간 받습니다만
적어도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성서는 철저히 사회적으로 민감한
종교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 참여하지 않는 것보다도
훨씬 종교적으로 어렵다는 것도 함께 느낍니다.
종교가 자칫 잘못 참여할 경우
독재와 제국주의의 첨병 구실을 하거나
이익집단이나 정치집단으로 오용되기에 너무나도 좋은 조건을 가진 것이
교회이기도 한 것같습니다.
이것은 비단 보수적이거나 식민적인 이념을 부르짖을 때 뿐 아니라
진보와 인권을 지향할 경우에도 교회가 권력이 되는 순간
언제든지 변질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변질은 보수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추구하는 하느님의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세속적으로 오용되지 않기 위해서는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운 걸음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참된 진리를 조금이나마 깨달은 사람이라면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향한 올바른 신앙의 자세가 되는지를
성령께서 알려주실 것이라는 점을 굳게 믿을 것입니다.

저 양심에서, 저 수많은 사람들의 울림 속에서 메아리치는
성령의 메시지에 귀를 닫고 마음을 닫는 것이 신앙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형제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가로막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양심의 울림을 따라 살고자 노력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저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신부님이건 목사님이건 간에
잘못된 의도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존중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경계선은 여전히 모호하고
쉽지만은 않은 일인 것같습니다.
제 고민도 사실 여기에 있습니다.

+ 주님의 평화

김재홍 형제님 안녕하세요?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게으름을 피우는 동안에 아타나시오 형제님이 참 좋은 답변을 주셨군요.
역시 나눔은 서로를 살찌우고, 풍요롭게 하는게 틀림없습니다.

좋은 답변에 제가 또 무슨 말을 덧붙일까요?

다만 한가지만 덧붙여보고자 합니다. 사족이 되질 않길 바라면서….

김재홍님께서는 한국 교회가 역사 속에서 독재 정권 앞에서 침묵한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보수적인 교회들은 대체로 교회의 정치 참여는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런 교회들이 보여주었던 것은 “침묵”을 통한 독재 정권의 “인정”이라는 암묵적인 정치 참여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교회의 사회적 책임, 혹은 정치적 책임은 그것이 어떤 외향적 성격을 띄는 적극적인 것이든, 암묵적인 책임 회피이건 분명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삶의 모든 행동들은 모두 “정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역사적으로 살피건대, 사회 정의를 부르짖고 실천했던 많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 신앙인들을 탄압했던 정치 권력자들에 편승하여, 보수적인 교회들이 신학적인 이유를 들어 함께 비판하며 입을 막었던 것은, 정반대의 행동으로 보여준 명백한 “정치 참여”였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행동은 어떤 점에서 모두 정치적인 행동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꿈과 이상은 정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현실 사회의 변화를 꿈꾸고, 이에 대한 실천이 없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 염려하고, 기도하고 나아가 행동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부르심입니다.

그 참여의 구체적인 방법과 전략은 물론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아타나시오 형제님의 깊은 고민에 대한 “사족”이 아니었나 두렵군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

Written by skhfaq

1월 14, 2002 at 12: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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