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an Korean Anglican FAQ blog

Posts Tagged ‘사회 정의

성령론과 사회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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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잘 지내시죠?
공부는 잘 되시나요?
여기 홈피에도 자주 들르지도 못하게 되네요.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전부터 제가 성서에 대한 관심 때문에
자주 여쭤보곤 했는데
요즘 와서 질문을 잘 안 드리게 됩니다.
관심이 적어져서 그런 건 아닌데
관심의 방향이 약간 바뀌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 성서를 묵상하다가
‘거룩한 독서’의 느낌을 알게 된 후로는
전에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성서독서의 맛을 새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서에 관한 학적인 관심이 그렇다고 줄지는 않았는데
훨씬 폭이 넓어진 것을 느낍니다.
복음주의에 대한 과도한 거부감도 많이 줄었고
그동안 다소 무시했던 이천년 기독교 전통에 대해
많은 부분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그리고, 저 자신이 얼마나 거만한 눈으로 세상을 보았는지를 새삼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께서는 희망 속에 살아계심을 느낍니다.
하느님을 뵈온 적도 없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더욱 믿을 수 없는 저였습니다만
이제 그렇지 않을 수 있을 것같습니다.
하느님은 정말 사랑이십니다.

신부님 한가지 질문 할께요.
왠지 신부님께 글쓰다 보면 자꾸 질문거리가 생각나네요.
대천덕 신부님의 글을 보면(아직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만) 성령에 대한 관점과
사회에 관한 관점이 별다른 모순없이 통일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제가 아는 바로는 교계에서 그런 방향은 다소 생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런 흐름이 세계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있는 건지요?
신부님 잘 지내시죠?
공부는 잘 되시나요?
여기 홈피에도 자주 들르지도 못하게 되네요.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전부터 제가 성서에 대한 관심 때문에
자주 여쭤보곤 했는데
요즘 와서 질문을 잘 안 드리게 됩니다.
관심이 적어져서 그런 건 아닌데
관심의 방향이 약간 바뀌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얼마 전에 성서를 묵상하다가
‘거룩한 독서’의 느낌을 알게 된 후로는
전에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성서독서의 맛을 새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서에 관한 학적인 관심이 그렇다고 줄지는 않았는데
훨씬 폭이 넓어진 것을 느낍니다.
복음주의에 대한 과도한 거부감도 많이 줄었고
그동안 다소 무시했던 이천년 기독교 전통에 대해
많은 부분을 새롭게 보게 됩니다.
그리고, 저 자신이 얼마나 거만한 눈으로 세상을 보았는지를 새삼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께서는 희망 속에 살아계심을 느낍니다.
하느님을 뵈온 적도 없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더욱 믿을 수 없는 저였습니다만
이제 그렇지 않을 수 있을 것같습니다.
하느님은 정말 사랑이십니다.

신부님 한가지 질문 할께요.
왠지 신부님께 글쓰다 보면 자꾸 질문거리가 생각나네요.
대천덕 신부님의 글을 보면(아직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만) 성령에 대한 관점과
사회에 관한 관점이 별다른 모순없이 통일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제가 아는 바로는 교계에서 그런 방향은 다소 생소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그런 흐름이 세계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있는 건지요?

+ 주님의 평화

아타나시오 형제님 안녕하세요?

종종 소식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구나 성서 독서의 맛을 들이기 계신다니 아주 기쁩니다.
그런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난 번에 제가 드린 조언이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나름대로 이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보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참으로 넓고도 깊지요.
그런데 또 그걸 손바닥 하나에 얹어놓으려는 시도들이 있고,
이런 짧은 시도로 만든 잣대로 이 사람 저 사람을
휘둘러 판단하는 것은 실제로 신앙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한없는 넓이와 깊이 속에서,
무한하신 하느님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좋은 질문을 주셨는데, 곧장 답변하기가 어렵군요.
특히 그것이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님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그분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나름대로 매우 특이한 “복음주의적 성령론”을 가지고 계셨는데,
이것은 한국 개신교 혹은 천주교의 이해와는 사뭇 다릅니다.
하지만 그분의 태도는 성공회 신학과 전통, 아니 그리스도교 신학의 전통 속에서 보면, 또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미 그러한 전통이 다양하게 존재하는데도, 한국 교회가 이를 무시했거나,
이런 시도들과 전통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이지요.

저는 다만 좀 다른 관점에서 성령을 이해하고, 영성을 이해는 책을 몇권 소개할까 합니다.
아타나시오 형제님이 책을 좋아하시니까, 이걸로 제 의무를 하나 피하려는 얕은 계략이지요. ^^

우선 성령에 대한 진보적인 신학자의 이해를 살피려면

위르겐 몰트만 “생명의 영” (대한기독교서회)와
클라우스 베스터만 “조직신학”(한국신학연구소)에 들어 있는
성령에 대한 이해를 참조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오래 전에 읽은 책들이라, 좀 가물 가물 합니다만… 죄송 ^^

성서와 함께 읽을 수 있는 재밌는 책은… 좀 오래되긴 했지만…

로버트 매카피 브라운 “뜻 밖의 소식” (한국신학연구소)
로버트 배카피 브라운 “영성과 해방”(한국신학연구소)

그리고 몇몇 라틴아메리카 해방 신학자들의 저서들을 함께 추천하면….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한국신학연구소)
그리고 제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 못하지만,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님의 “삼위일체”에 관련된 책을 찾으시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 책들이 이해하고 있는 “영성”의 개념이 성령에 대한 이해와
어떻게 분명하게 결합되는지를 설명할 능력이 제게는 없고
그저 마음 깊은 곳에서 서로 울리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해서 덧붙였습니다.

성서 공부와 신학 공부도 좋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한 마음 공부도 잊지 마십시오.

이 말은 제 스스로에게도 던지는 말입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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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khfaq

3월 5, 2003 at 12:47 오후

사회 정의를 향한 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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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신부님을 찾아뵙네요.. 제가 어느 개신교 권사님과 얘기를 나누었는데요.그분 말씀으로는 술과 담배는 그리스도교인으로써 할짓거리가 못된다고그러시더군요..

제가 알기로 예수님께서도 포도주를 드셨으며,술,담배는 그리스도교인으로써 즐기되 빠지지만않는다면 괜찮다고 생각하거든요..만약에 위와같은 논리라면,콜라,사이다도 즐겨서는 안된다는(콜라,사이다는 술보다 해로운성분이 더 많다고합니다)논리가성립이되는데요,이에대한 신부님의 견해를 듣고싶습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제가 주한미군범죄근절(주한미군철수운동본부)회원으로 활동중인데,정말 주한미군이 우리나라사람들에게 악한일을 저지르고도 죄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는것이 너무 ***없어보여서 적극적으로 활동을하고있습니다..이에대해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이렇게답변하시더군요. 아버지께서 대학생일때(이승만~전두환)는 항상 물수건을 손주머니에 넣고다니면서 입과코를가리고 다니셨고,사회의 부정부패와독재에 학생들이 피로써 맞써싸우고 있었던시기였습니다. 당시 광주에서 대학을 휴학하고계셨던아버지께서는 군인들에게 대모진압용곤봉에 엊어터지면서도 자유민주주의만세!독재정권을 유지하려는 정권은물러가라는 학생들의 처절한외침에 충격을 받으시고 아버지께서도 학생운동과 데모에 참가하여 독재정권에 맞서싸우셨고,주한미군이 악한일을하면 그들에게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것을 알려주고,옳은것을 옳다고 말할줄알며,잘못된 역사의 흐름을보고 바로잡지않는것은 진정으로 배운자의도리,신앙인의 도리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제가 진정 옳은길을 걷고있는것일까요? 일제의탄압에 독립군의 자금을전달하고,쫒기는 독립투사에게 숨을곳과음식을 제공하며 독립운동에 참가하셨던 할아버지와, 독재정권에 맞서서 당당히 싸우셨던 우리아버지..그러나 독립유공자라는 제대로된 대접조차 받지못하는 이사회에서 `이 사회는 뭔가 잘못되었다!

그것을 고쳐라!,라고 당당히 외치는고, 사회에서 개판치고있는 이단사이비에 `너희는 그런점이 잘못되었다!진실은 이것이다!,라고 말을해야 하는것이 제가가야할 길인지요,그런길을 가는데,가려고 마음을 단단히먹고,다잡아보지만,왜이리 두려운지..이런길을간다고 누가알아주는것인지..너무나 두렵습니다..

+ 주님의 평화

양승우 형제님 안녕하세요? 너무 늦은 답변에 미안하다말로 무색할 지경입니다.
요즘 낯선 환경에서 새롭게 공부를 시작하는 처지에서 겪는 게으름이니 용서하십시오.

양승우 형제님의 고민은 잘 읽었습니다. 사실 변명아닌 변명을 하자면, 나름대로 여러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거듭하고, 굳은 의지를 갖고 계셔서 특별히 어떤 조언을 한는게 필요한가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조언을 바라신다면.. 글쎄요..

우선 “술”에 관한 논란은 사실상 그리스도인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지요. 아예 그런 논란 자체가 좀 문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거야 아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제 의견을 말씀드렸으니, 잘 헤아리시고 개인의 처지에 맞게 판단을 내리시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래에도 언급한 것처럼 그건 일반화시킬 수 없는 “조심스러운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사회 정의를 위한 행동에 대해 간단히 답변드립니다. 사회 정의 활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연스러운 발로이겠지요. 주한미군철수나, 사회 정의의 문제, 그리고 그 밖의 민주화를 위한 싸움들은 우리나라 사회에선 매우 필요한 일이요, 그리스도교 신앙에도 부합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깊은 자기 성찰과 공부, 그리고 자신의 조건에 맞는 적절한 투신을 요구합니다. 자칫 매우 가벼운 논리나 얕은 성찰로 어떤 분위기에만 휩쓸리게 되면, 그것은 자기 자신 뿐만이 아니라 이런 올바른 운동에도 해를 미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굳이 선후를 따지자는 것은 아니지만 “깊이 성찰하고 고민”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나 신앙적 자의식이 이제 막 형성되거나, 사회의식이 형성되는 초기에는 더욱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지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이를 “기도를 통한 성찰”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기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자기 조건에 맞는 실천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어린이에게 어른의 옷을 입힐 수 없듯이, 그에 맞는 적절한 옷을 찾는 것이지요. 제가 보기에 양승우 형제님은 아직 성인이 아니고, 성년을 향해서 공부하는 중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어떤 행동과 실천이 적절한 지를 나름대로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 점들을 아버님이나 선생님과도 이야기를 나누시거나, 출석하는 교회의 선생님과 목사님을 통해서도 이야기를 나눠 조언을 얻어야지요.

모든 것에 궁금해 하고, 특별한 세상을 통한 하느님의 정의 실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양승우 형제님은 분명히 더욱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정진하시고, 자기 생활도 많이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

Written by skhfaq

10월 25, 2002 at 11: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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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사회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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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주 신부님.
저는 장로교회를 다니는 청년입니다.
이번에 SOFA개정을 위한 서명을 교회 이름으로 하려고 했었습니다.
청년회 담당 전도사님도 크게 호응을 해 주셨고,(교단차원으로 소파
개정운동이 벌어지도록 하실정도였습니다.) 학생회 담당 전도사님도
크게 호응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문제는 담임 목사님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사회참여를 하는게 싫으신 듯 합니다.
교회이름으로 사회참여를 하면 안된다면서, 오히려 교회의 사회 참여를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성경에서는 사회참여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합니다.
정말 교회에서 사회참여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인지요..
답답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저는 교회가 사회참여를 하지 않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한국 개신교가 독재에 침묵을 지킨 것을 알기에….

질문에 대한 아타나시오님의 답변

저도 같은 내용을 고민하고 있어
함께 나눠보고자
그냥 주제넘게 답변을 드립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점점 더 보수화되어가는 교회의 침묵에
무척이나 답답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성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느끼는 점은
기독교의 본질은 구약에서 신약까지
철저히 사회적인 종교라는 점입니다.
바울로 신학에 와서야 개인적으로 편향된 느낌도 약간 받습니다만
적어도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성서는 철저히 사회적으로 민감한
종교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 참여하지 않는 것보다도
훨씬 종교적으로 어렵다는 것도 함께 느낍니다.
종교가 자칫 잘못 참여할 경우
독재와 제국주의의 첨병 구실을 하거나
이익집단이나 정치집단으로 오용되기에 너무나도 좋은 조건을 가진 것이
교회이기도 한 것같습니다.
이것은 비단 보수적이거나 식민적인 이념을 부르짖을 때 뿐 아니라
진보와 인권을 지향할 경우에도 교회가 권력이 되는 순간
언제든지 변질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변질은 보수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추구하는 하느님의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세속적으로 오용되지 않기 위해서는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운 걸음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참된 진리를 조금이나마 깨달은 사람이라면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향한 올바른 신앙의 자세가 되는지를
성령께서 알려주실 것이라는 점을 굳게 믿을 것입니다.

저 양심에서, 저 수많은 사람들의 울림 속에서 메아리치는
성령의 메시지에 귀를 닫고 마음을 닫는 것이 신앙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형제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가로막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양심의 울림을 따라 살고자 노력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저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신부님이건 목사님이건 간에
잘못된 의도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존중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경계선은 여전히 모호하고
쉽지만은 않은 일인 것같습니다.
제 고민도 사실 여기에 있습니다.

+ 주님의 평화

김재홍 형제님 안녕하세요?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게으름을 피우는 동안에 아타나시오 형제님이 참 좋은 답변을 주셨군요.
역시 나눔은 서로를 살찌우고, 풍요롭게 하는게 틀림없습니다.

좋은 답변에 제가 또 무슨 말을 덧붙일까요?

다만 한가지만 덧붙여보고자 합니다. 사족이 되질 않길 바라면서….

김재홍님께서는 한국 교회가 역사 속에서 독재 정권 앞에서 침묵한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보수적인 교회들은 대체로 교회의 정치 참여는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런 교회들이 보여주었던 것은 “침묵”을 통한 독재 정권의 “인정”이라는 암묵적인 정치 참여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교회의 사회적 책임, 혹은 정치적 책임은 그것이 어떤 외향적 성격을 띄는 적극적인 것이든, 암묵적인 책임 회피이건 분명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삶의 모든 행동들은 모두 “정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역사적으로 살피건대, 사회 정의를 부르짖고 실천했던 많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 신앙인들을 탄압했던 정치 권력자들에 편승하여, 보수적인 교회들이 신학적인 이유를 들어 함께 비판하며 입을 막었던 것은, 정반대의 행동으로 보여준 명백한 “정치 참여”였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행동은 어떤 점에서 모두 정치적인 행동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꿈과 이상은 정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현실 사회의 변화를 꿈꾸고, 이에 대한 실천이 없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 염려하고, 기도하고 나아가 행동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부르심입니다.

그 참여의 구체적인 방법과 전략은 물론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아타나시오 형제님의 깊은 고민에 대한 “사족”이 아니었나 두렵군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

Written by skhfaq

1월 14, 2002 at 12: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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