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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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와 사제의 독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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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준님의 질문 3

성공회에서는 신부님들이 결혼도 하시는데, 반대로 로마가톨릭에서처럼 사목을 하면서 독신생활도 유지할 수가 있습니까? 독신사제로서도 별 어려움 없이 사목할 수 있으며 종신까지 그 복지를 교회에서 도와주기도 하나요?

답변의 시도 3

성공회는 성직자의 강제적인 독신제도를 거부한 것이지, 독신 소명을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즉 성직자는 결혼할 수도 있고 독신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소명이지 법이나 명령이 아니라는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공회 안에서 결혼한 성직자와 더불어 독신 성직자들도 있습니다.

성공회 성직자가 겪는 생활 상의 조건들은 결혼한 성직자나 독신 성직자나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이 있는 성직자와 독신 성직자는 좀 다른 형태의 생활에서 비롯되는 나름대로의 생활 상의 어려움과 고민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독신 성직자만을 위한 특별한 복지 혜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은퇴 후의 복지 조건은 어느 성직자에게나 같이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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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khfaq

10월 6, 2003 at 1: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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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직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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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올해 28세로.. 대학 4학년에 다니는 이민영이라고 합니다.
군대에 있을적에..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힘들고 어려운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신앙으로 동료 전우나 후임병들에게 작은 힘
이나마 보탤수 있었던… 보람있는 군대 생활을 했던 기억이 각박한
현실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지만 요즘들어 더욱 그리워져 옵니다.
사실…제대 후…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많이 시들해졌고…
사회에서는 오직 돈을 벌어야 한다. 높은 학점을…높은 TOEIC점수..를…
남에게 뒤쳐지지 말고 앞서가며 살아야한다…는 주위와 제 자신의 관념과
육적 영적 타락까지 겹쳐져 현재 저는 삶의 의미를 거의 상실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다시 말해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라는 본질적인
문제에 다다랐고..보다 인간답게 돈이아닌..명예도 아닌 삶의 본질을 위해
무엇인가 극약 처방을 내려야할 시점에 와 있다고 판단이 되어 깊이 사색하여
도출해낸 삶의 이상이 바로 사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웃의 아픔을..고통을 같이 나누는 삶…스스로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며
경건하게 겸손하게 열심히 노력하는 삶… 정말로 너무도 막연하지만 이러한
삶을 살고 싶은데…
하지만 제가 지금하고 있는 일은 자신을 위해..돈을 위해..명예를 위해…
모든 눈에 보이는 모든 대상을 욕구충족의 대상으로 삼고 생각하고 행동해온..
제 자신이 너무 서글퍼서 죽고 싶을 지경입니다. 꼭 이렇게 사는 방법밖에
없는 건지..제 자신이 너무 싫습니다.
신부님…사제가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나요?

+ 주님의 평화

이민영 형제님 안녕하세요?

깊은 고민 속에서 사제직에 대해서 생각하시다니 기쁩니다.
한 인간의 근본적인 질문으로 “어떻게 살아갈까?”하는 것은
평생을 두고 따라다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통해 누군가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었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훌륭한 사제직을 감당했던 것이겠지요.

이제 생애의 오랜 기간을 이런 삶에 투신하시겠다는 생각을 하셨다니 기쁩니다.

성소, 이른바 “거룩한 부르심”은 매우 다양합니다.
사제직이나 수도직이 그런 성소 가운데 하나요,
다른 여타의 직업을 가지면서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것도 성소입니다.
그 어떤 직책이 더 훌륭하고, 더 낮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사제직은 어떤 도피처라기 보다는 오히려
삶의 온갖 요소들과 부딪히고 대면해야 할 “전쟁터”라고 할까요?
그러나 거기에도 깊은 평화가 있지요.
전쟁을 겪진 않았지만, 전쟁을 알 때 평화의 깊은 의미를 알 듯이 말입니다.

사제 성소는 자신의 “다짐”과는 조금 차원이 다릅니다.
그것은 본래 “자심의 결심”이라기 보다는 히느님의 “부르심”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제직은 성소의 구체적인 형태인 까닭에 아주 현실적인 과정들이 필요합니다.
우선 자신의 신앙 생활을 교회 공동체에서 검증을 받아야 하고,
지도사제와 함께 기도 안에서 성소에 대한 분명한 식별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학 공부를 마치고, 성직자가 되기 위한 신학공부를 대학원에서 해야하고,
그에 따라 부과되는 교회에서의 여러 가지 봉사직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물리적인 시간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노력과 수련도 소요됩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사제직에 대한 성소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면서,
비로소 하느님의 선물이요, 부르심으로서 사제직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들을 깊이 생각하시고 성찰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첫 출발로서, 우선 출석할 교회를 정하시고,
자신의 희망과 다짐을 신부님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구체적인 말씀과 지도를 신부님께서 해주실 것입니다.

우선 필요하다면 저와 계속해서 연락을 해도 되겠지요?

시제직에 대한 희망이 거룩한 부르심을 통한 기쁨으로 피어날길 기대합니다.

몸소 수난의 길을 걸으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3월 25, 2002 at 10: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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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직에 대한 발칙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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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보다는 이곳이 더 활발한 것 같아 글을 남깁니다.
많은 사람들의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녹아있는 질문과 신부님의 자상하며 명쾌한 답변들이 보는 것 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누구나 일생일대를 고민하지만 함께 고민하기는 참으로 힘든 것이 신앙인것 같습니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우리로서는요.

질문과 답변사이에 묘한 긴장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가 오히려 둘을 엮어주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중의 성사론적 사제론에 관한 글을 잘 읽었습니다. 존재론과 기능론사이라고 하기보다는 보다 인간적이고 해석학적인, 그럼으로 대단히 성공회적인 시각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편 이제는 우리가 존재론적인 사제론을 받아들이기에는 많이 앞으로 나와있다는 생각이 드는 반면 기능주의적사제론은 아직 많이 남아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기능의 차이가 곧 존재론적 우열로 바뀌지만서도…)

성공회에 남아있는 존재론적 구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예를 들어 부제는 성찬례를 집행못한다던가, 주교만이 할 수 있는 성유축복식이라던가, 기타 평신도와 사제라는 틀속에 기득권적 요소들을 배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사제개개인의 노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개개인에게 맡기기에는 완고한 제도가 그리 쉽게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사론적 사제로 살기위해서는 오히려 옷을 벗는 사제들이(사제가 되는 것이 의미없는 것이아닌, 사제가 된 이후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과감히 출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발직한 상상을 해봅니다.

질문은 아니고 고민입니다.

+ 주님의 평화,

이 질문 답변란이 종민 형제님께 도움이 되었다니, 저로서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제직에 대한 제 견해는 사실 독창적인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이것이 성공회의 이해 전체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요,
그저 갓 서품받은 성공회 사제로서 느끼는 고민과
이를 신학적인 고민을 발전시켜 보려고 진척시켜본 “용어” 작업에 머문 것입니다.

거기에 형제님께서 “인간적이고 해석학적”이라는 좀더 고민할 여지와 영역을 부가한 것은
제게는 검토할 좋은 고민거리를 주신 것이니 더욱 감사합니다.

다만 형제님께서 걱정하고 우려하는 것이 있다면,
사제직의 실제 상황이라고 할텐데요.
글쎄, 그건 여전히 교회 전체에, 그리고 성직자 전체에게 화두로 남습니다.
사실 그것은 제 나름대로 구분해본 존재론적, 기능론적, 성사론적 이해에 근거하기보다는
하느님 앞에 선 한 인간의 “정직함”과 결부되는 것인데다,
이러한 이해에 맞추어 얼마나 자신을 쇄신해 나가느냐는 문제와 관련이 깊다고 봅니다.

만인사제론이 그리스도교 전체에서 인정되는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성직에 대한 구분을 두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직은 기본적으로 “섬김”(디아코니아)에 기초한 것으로,
성직은 그 섬김과 봉사를 위한 직책이지 특권과 권위주의의 근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평신도의 “성찬식 집전” 허용이나, 예전 상의 권한 나눔은
얼핏 만인사제론의 실현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자칫 현실에서는 또다른 권위주의의 확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에는 여기서 다 말하기 어려운 행간의 복잡성,
삶의 우연성이 가져다 주는 위험들이 있습니다.

이 처지 속에서 사제직에 대한 성사론적 이해(전혀 정리되지 않았지만)를 통해서
“경계에서 살아가는 사제직”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좀더 자세하게 표명하자면
아마도 종민 형제님께서 말하는 “발칙한 사제직에 대한 구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다만 “구상”이 아니라 내 몸도 그렇게 따라 주기를,
그런 용기와 희망을 키워나기를 바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함께 기도해 주시겠습니까?

주낙현 ^^

Written by skhfaq

1월 21, 2002 at 3:1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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