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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직에 대한 발칙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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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보다는 이곳이 더 활발한 것 같아 글을 남깁니다.
많은 사람들의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녹아있는 질문과 신부님의 자상하며 명쾌한 답변들이 보는 것 만으로도 아름답습니다.

누구나 일생일대를 고민하지만 함께 고민하기는 참으로 힘든 것이 신앙인것 같습니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우리로서는요.

질문과 답변사이에 묘한 긴장과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차이가 오히려 둘을 엮어주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글중의 성사론적 사제론에 관한 글을 잘 읽었습니다. 존재론과 기능론사이라고 하기보다는 보다 인간적이고 해석학적인, 그럼으로 대단히 성공회적인 시각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편 이제는 우리가 존재론적인 사제론을 받아들이기에는 많이 앞으로 나와있다는 생각이 드는 반면 기능주의적사제론은 아직 많이 남아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기능의 차이가 곧 존재론적 우열로 바뀌지만서도…)

성공회에 남아있는 존재론적 구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예를 들어 부제는 성찬례를 집행못한다던가, 주교만이 할 수 있는 성유축복식이라던가, 기타 평신도와 사제라는 틀속에 기득권적 요소들을 배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사제개개인의 노력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개개인에게 맡기기에는 완고한 제도가 그리 쉽게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사론적 사제로 살기위해서는 오히려 옷을 벗는 사제들이(사제가 되는 것이 의미없는 것이아닌, 사제가 된 이후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과감히 출현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발직한 상상을 해봅니다.

질문은 아니고 고민입니다.

+ 주님의 평화,

이 질문 답변란이 종민 형제님께 도움이 되었다니, 저로서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제직에 대한 제 견해는 사실 독창적인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이것이 성공회의 이해 전체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요,
그저 갓 서품받은 성공회 사제로서 느끼는 고민과
이를 신학적인 고민을 발전시켜 보려고 진척시켜본 “용어” 작업에 머문 것입니다.

거기에 형제님께서 “인간적이고 해석학적”이라는 좀더 고민할 여지와 영역을 부가한 것은
제게는 검토할 좋은 고민거리를 주신 것이니 더욱 감사합니다.

다만 형제님께서 걱정하고 우려하는 것이 있다면,
사제직의 실제 상황이라고 할텐데요.
글쎄, 그건 여전히 교회 전체에, 그리고 성직자 전체에게 화두로 남습니다.
사실 그것은 제 나름대로 구분해본 존재론적, 기능론적, 성사론적 이해에 근거하기보다는
하느님 앞에 선 한 인간의 “정직함”과 결부되는 것인데다,
이러한 이해에 맞추어 얼마나 자신을 쇄신해 나가느냐는 문제와 관련이 깊다고 봅니다.

만인사제론이 그리스도교 전체에서 인정되는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성직에 대한 구분을 두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직은 기본적으로 “섬김”(디아코니아)에 기초한 것으로,
성직은 그 섬김과 봉사를 위한 직책이지 특권과 권위주의의 근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평신도의 “성찬식 집전” 허용이나, 예전 상의 권한 나눔은
얼핏 만인사제론의 실현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자칫 현실에서는 또다른 권위주의의 확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에는 여기서 다 말하기 어려운 행간의 복잡성,
삶의 우연성이 가져다 주는 위험들이 있습니다.

이 처지 속에서 사제직에 대한 성사론적 이해(전혀 정리되지 않았지만)를 통해서
“경계에서 살아가는 사제직”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좀더 자세하게 표명하자면
아마도 종민 형제님께서 말하는 “발칙한 사제직에 대한 구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다만 “구상”이 아니라 내 몸도 그렇게 따라 주기를,
그런 용기와 희망을 키워나기를 바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함께 기도해 주시겠습니까?

주낙현 ^^

Written by skhfaq

1월 21, 2002 at 3:1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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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 사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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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벌써 주일이군요..^^* 세월 참 빠르네요..

오늘 여쭈어 볼 말씀은 다름이 아니오라… 이른바 만인사제주의에 관하여서인데요..

아시다시피 이 문제는 종교개혁부터 격렬한 논쟁이 유래되었고 솔직히 지금도 별로 이 문제는 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즉 이런 문제가 가장 상징적으로 촉발된 형태 중 하나는 전에 여쭈어 본 바와 같이 고해성사라고 보는데요..즉 ‘사제’개념을 가톨릭은 인정하므로 몇몇 성서구절을 근거로 하여 사제의 사죄권을 바탕으로 하여 고해성사를 엄수하고 있고요, 보통 개신교는 사제 개념을 특별히 인정하지 않으니 아예..고해성사란 상상조차 못할 일이 되었지요..여기서도 성공회는 고해성사를 인정은 하되 강요는 하지 않는다는 절충점을 모색하고 있더군요..

이른바 하느님과 인간의 중개자로서의 사제개념을 인정한다는 주장과 인간이 사제의 중개없이 하느님과 바로 통교할 수 있다는 만인사제주의 사이에서 가톨릭과 다른 개신교의 입장을 가장 잘 절충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성공회는 오늘날 어떻게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지요?

제가 이런 것을 여쭈어 보아서 – 특히 가톨릭을 비롯한 타교파와 자꾸 비교하게 되어서 – 죄송하지만, 이러한 것도 다양하고 합리적인 토론을 통하여 변증법적 발전을 도모하자는 것이니 불쾌히 여기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성공회의 공식적인 입장 외에 신부님의 개인적인 견해를 밝혀주셔도 무방할 것 같군요.. 저에게 도움이 많이 되겠습니다..

주일 축복 많이 받으세요..

+ 주님의 평화

항상 어려우면서도 좋은 질문으로 저를 괴롭히시는(^^) 게파님 안녕하세요?

이번에도 역시 좋은 질문을 주셨군요. 그리고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구요. 이제야 답변드리게 돼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통 답변에 시간을 낼 수가 없었습니다.

답변을 시도하자면…

이른바 “만인사제주의”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에게서 비롯합니다. 마르틴 루터의 “만인사제”론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한번의 희생제사를 통해 우리의 속죄물이신 대사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원의 통로가 되셨으니, 우리 인간은 어떤 다른 통로를 거치지 않고 하느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인간 모두는 하느님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사제라는 것이지요. 두 번째 의미는 “그리스도인은 만인을 위한 만인의 사제”라는 의미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서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바치고, 그들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의미이지요. “만인을 위한 만인의 사제로서 살아가는 신앙인”이라는 이 주장이 사실 루터가 말하는 만인사제론의 핵심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공회는 이러한 주장을 매우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는 사제직에 대한 복음적인 이해라고 보고 있습니다. 사실 로마 가톨릭교회 역시 “세례받은 모든 신자들의 사제직” 이른바 “신자들의 공통 사제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즉 만인사제직에 대한 기본적인 견해는 로마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같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현실에서는 난점은 있기 마련인지라, 원칙적이고 신학적인 추상 개념이 현실 교회 공간과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방식에는 어쩔 수 없는 왜곡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제”를 뜻하는 “프리스트”(priest) 어원이 신약성서의 “장로/원로”(presbyter)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실제로 사제라는 기본적으로 교인들을 관리하고 말씀을 전해주는 사목자(minister)라는 의미가 더 강하겠지요. 그런데 이것이 중세에 이르러서 희생제의에 관련된 “제사장”(sacerdos)으로 의미가 전환되고 말지요. 이것은 중세교회의 교권 강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로써 나온 것이 “사제는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주장입니다. 이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사제직에 대한 이해를 가장 극명하게 표현하는 말이지요. 현재도 세례받은 신자들이 갖는 일반적인 사제직과 구별되어 “본질적으로 다른 사제직”이 있는데 그것이 곧 서품받은 사제들이 갖는 사제직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서품(ordination)의 의미와 관련이 깊은데요, 한마디로 말하자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사제직의 서품에 대해 “존재론적인 시각”(ontological view)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사제 서품을 받은 사람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지요. 거기에 비해서 개신교의 이해는 대체로 “기능론적인 시각”(functional view)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목자는 교회의 사목 행위의 전문적인 기능으로 부름받았고 그 일을 담당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정리합시다. 그리스도교는 기본적으로 “세례받은 모든 이들의 사제직”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실제 교회의 직분으로서 사제직에 대한 이해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가 차이를 갖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이에 대한 성공회의 태도는 무엇인가? 성공회 안에는 로마 가톨릭에 기운 듯한 존재론적인 시각도 있고, 일반 개신교의 주장과 같은 기능론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3의 길은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성사론적인 시각”(sacramental view)이 아닐까 합니다. 이 말은 사제는 일반 인간과 본질적으로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총을 드러내며, 또 그 삶을 살아가는 표지라는 점에서 성사 그 자체라는 관점입니다. 이는 또한 성직자가 단순히 교회라는 제도 안에서 어떤 기능만을 담당한다는 시각과도 구별점이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 평등한 존재로서, 어떤 특정 기능인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풍성함과 빈곤함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온 몸으로 드러내는 삶으로서 “성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지요.

신약성서학자이자 성공회 사제인 루이스 윌리암 컨츄리먼은 최근 자신의 저작 {거룩함의 경계에서 살아가기 : 만인사제직의 쇄신 LIVING ON THE BORDER OF THE HOLY: RENEWING THE PRIESTHOOD OF ALL](1999)이라는 책에서 이 문제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성사론적인 시각”을 대변하지는 않았지만, 책 제목과 같이 거룩함의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삶으로서 사제는 성사라고 보고 싶습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삶에는 사제직이 깃들어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고, 누군가를 도와주며, 상담하고 영적으로 지도하는 모든 것이 바로 사제직의 내용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것이 대사제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것으로 알고 이를 지켜 나갑니다. 또한 서품을 받은 성직자들은 이러한 사제직의 근거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 이 사제직이 꽃피우기를 위해 노력하고,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위해 일한다는 것입니다(2고린 5:18).

로마 가톨릭 교회나 개신교나 모두 대사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사제직에 대해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따르기 위한 고민 속에서 구체적인 이해에서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답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 혼동이지요. 우리는 혼동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어떤 것을 두고 이것만이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우리의 한줌 손길로 잡기에는 벅차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희미한 것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거울처럼 명백해질 것을 바라보며, 그 혼동 속에서 겸손할 뿐입니다(1고린 13:12)

도움이 되셨길 바라며 주낙현 신부 합장 ^^

추신 : 성직 서품의 의미에 관해 써둔 짧은 글이 있는데 도움이 되실지요?

“서품(혹은 안수,Ordination)란 무엇인가?” 다운로드

Written by skhfaq

8월 30, 2001 at 2:55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