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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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 중도인가? 잡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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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공회 서울교구청에 전화하여 도봉교회를 소개받았습니다.
신부님과 약속까지 잡았다가 교회 홈페이지 들어가보고 멈칫했습니다.
십일조…부터 시작해서 우리나라에 일반화된 개신교회의 분위기가 강하게 풍겨서…
좀 거부감이 들더군요.
제 생각에는 성공회의 개방성과 Via Media 제3의 길과는 서로 배치되는 게 아닌가
하는 …
아래 게시판글에도 보면 여의도 순복음교회 출신이 사제가 된 경우도 있던데
나이, 성별, 교파, 사상 등 성직에 대한 자격조건으로 어떠한 것도 내걸지 않는
불편부당함과 공평성 내지는 복음주의적 가치가
성공회 안에, 좋게 말하면 스펙트럼의 다양화, 나쁘게 말하면
정체성의 모호함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사실 근본주의를 혐오하는 사람입니다.
저 자신 한때 저 자신도 모르게 근본주의에 빠져 허우적거렸던 사람입니다.
(가톨릭에 와서야 비로소 저 자신의 질병을 확인하였지만 말입니다.)
아래 어느 전도사님이 지적하셨듯이 대한민국 대부분 개신교회가
이런 근본주의에 오염되어 있다고 봅니다.
전방위에 걸친 미국문화의 영향이 낳은 결과이겠죠.
그런데도 이에 대한 신학적인 반성을 통해 여과됨이 없이
교회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사제직을
무차별적으로 개방한다는 것은…
자칫 via media가 아닌 via dilemma로 빠질 위험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의 생각이 논리적으로나 지식적으로나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을 줄 압니다만,
신부님의 그 겸허하신 성품에 기대어
감히 이런 말씀을 드려봅니다.
신부님의 답변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우선 지난 답변이 도움이 되어 교회까지 알아보게 되었다는 소식에 기쁩니다. 교단을 옮기는 일은 또 다른 신앙적 결단의 부분이기 때문에 주저할 일들이 많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좋은 문제제기를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말씀하신 내용은 저 역시 고민하고 있고, 그 고민의 흔적을 다른 분들과 나눠서 좀더 깊은 알음알이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이런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고민스럽지만 즐거운 대화가 지속되리라 생각하고 님의 문제제기에 대한 제 생각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님께서 제기하는 문제는 실제로 하나이지만, 좀더 큰 범위에서 성공회(신학)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과 그 구체적인 신앙 생활 형태에 관련된 것으로 억지로 나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먼저 님을 주저하게 한 구체적인 교회의 현상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지요. 성공회가 개신교적인 분위기를 많이 “풍기고” 있다는 말은 부분적으로 사실입니다. 교회생활과 관련해서 한국개신교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관습이나 사목 형태가 공공연하고, 일례로 지적하신 “십일조” 같이 일견 개신교의 특허품처럼 보이는 헌금 생활도 분명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개신교적인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면 어떤 것이든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한국 개신교의 교회 행태 전체가 잘못된 것이 아닌 탓이고, 비판 받는 개신교의 어떤 요소를 성공회가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해서 그대로 적용해서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일부 개신교가 싫다고, 같은 예수를 믿는 다른 개신교단이나 성공회, 정교회, 천주교 모두 한 통 속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말씀하신 십일조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십일조는 성서적으로도 분명한 근거를 가지고 있고, 교회의 선교를 위해서 매우 필수적인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성서적인 맥락에서 이해된 봉헌이 아니라, 교회 자체를 위한, 즉 종교 집단 그 자체를 위한 모금 행위에 지나지 않을 때 비판 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 문제를 한국의 많은 개신교가 보여주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만, 그것이 십일조와 같은 봉헌 행위와 그 용어를 폐지할 이유는 안됩니다. 제 경우에 제 자신이 십일조 생활을 하고, 교인들에게 십일조 생활을 하도록 신앙적으로 권고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성서에서 말하는 대로 교회가 부름 받은 선교를 위해서 사용되어야 하는 지를 함께 나눕니다. 그것은 강요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 생활 속에서 비롯되는 선교 행위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좀더 넒은 의미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개신교와 성공회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성공회가 개신교 종교개혁의 중요한 역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에, 그에 대한 부정은 성공회 자체에 대한 부정입니다. 한국의 상황 속에서 역시 한국의 그리스도교라는 전체 상황 속에서 성공회가 자리잡고 있기에, 개신교로서의 성공회가, 그리고 가톨릭적 전통을 지키려는 성공회가 그 사이에서 함께 영향을 주고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재미있는 일은 천주교에서 오시는 성공회로 오시는 분들은 성공회가 너무 개신교적이라고 비판하지만, 다른 개신교에서 오시는 분들은 성공회가 너무 천주교적인 것 같다고 “멈칫”거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공회의 정체성에 대한 우려는 성공회 자체 내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특정한 시각으로 성공회 전통을 보려는 입장 자체의 혼란스러움의 반영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게다가 한 교단을 이적한다는 것은 신앙적 전통의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것인데 – 물론 여기에는 자신의 신앙적 체질이랄까, 어떤 선호도가 작용하지만 – 어떤 분들은 그런 변화를 받아들이기보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어떤 고정관념을 다른 공간에서 펼쳐 보이겠다는 ‘의지’를 강조하지요. 종교 혹은 믿음이란 무릇 ‘자신의 변화’를 중심으로 움직여 나가는데 이렇다면 교단의 이적이 무슨 의미일까 갸우뚱거리게 만들지요. 하기야 이런 일들은 성공회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 단체에서 공통적입니다. 천주교에도 양상이 다르지만 가만 보면 비슷한 갈등이 있고, 개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다만 이런 갈등의 여지 속에서도 어떻게 복음적인 가치에 내 자신을 맡기고, 그 길을 가느냐는 것이지요. 신앙의 길은 ‘나’ 자신의 선호도가 점점 묽어지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말이 한참 돌았습니다만, 구체적으로 성소자의 출신 배경과 관련하여 언급하신 것에 대해서도 이런 신앙적인 변화의 길과 관련해서 생각하자면 문제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여부는 모르겠지만, 순복음교회 출신이라도 성공회 사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제 자신이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의 아지트라고 할 수 있는 예수교 장로회 합동 측 교회를 통해서 신앙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다양한 신앙적 체험의 경로로 이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출발지가 아니라, 신앙이라는 긴 여정을 어떻게 걸어가느냐, 그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그 길에서 만나는 예수님의 체험을 성공회라는 신앙 전통 안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제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켜 가느냐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성직 훈련의 과정은 바로 이런 과정의 농밀한 축소판이지요, 그러니 “신학적 반성 없는” 투과가 가능하지 않을 겁니다 ^^;)

성공회는 그런 신앙의 순례와 여정에 대한 남다른 고민을 하고 있는 교단입니다. 거기에서는 수많은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갈등하기도 하도 때로는 싸우기도 합니다. 말씀 하신대로 그 길은 이름만 반반한 “중도”이기 보다는 “혼란과 딜레마”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교리적인 확신이나 지침이 아니라, 여정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그 혼란과 딜레마를 솔직히 인정하고 이와 분투하며 걸어가자는 길이 성공회의 길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성공회 안에서는 어떤 근본주의도 어떤 교조주의도 발을 붙일 수 없는 것이지요. 어떤 주도적인 획일성이 없기에 성공회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가능하고 – 물론 그 역도 가능하지요 – 그 공간 안에서 서로 부대끼며 서로 변화할 수 있는 여지가 열리는 것이지요.

어처구니없이 길어져 버린 이 답변이 지루하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그 사이에 도움이 될만한 것이라고 건질 수 있으면 다행이겠습니다만…

다시 한번 좋은 생각의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된 형제

주낙현 신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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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khfaq

2004년 6월 18일 at 2:54 오후

성공회의 모호한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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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준님의 질문 4

via media를 택하는 성공회의 특성상 신자들도 성공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교인들도 있지만 천주교에서나 개신교에서 옮겨온 이들도 꽤나 많은 것 같습니다. 즉, 먼저 그리스도교를 어떤 형태로든 접하지 않고서는 성공회를 이해하고 다가가기가 너무 어렵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예배전례문이나 기도서도 고어투가 많아 어렵기도 하고 신자들의 정체성도 천주교에서 온 신자는 성만찬을 천주교의 희생제사 그대로 이해하고 있을 수 있고 개신교에서 온 신자들은 일부는 그저 예식이 아름다워 올 수도 있고 여하튼 성공회의 정체성이 너무 복잡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답변의 시도 4

좋은 지적이십니다. 현재 성공회 신자의 많은 분들이 천주교와 다른 개신교파에서 옮겨 오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역시 성공회를 통해서 처음 그리스도교에 입문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어떤 조직과 공동체에 들어간다는 것은 늘 새로운 경험과 도전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그 조직이 좀더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으면 그에 대한 거부감이 적고, 동화되는데도 시간이 적게 걸리는 것이지요. 우리 나라의 교회 사정상 천주교나 개신교가 그런 예이지요. 아마도 성공회가 우리 사회에서 작은 교단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나온 걱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공회가 좀더 적극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서려는 노력과 다양한 신앙교육을 마련해야 한다는 애정 어린 비판으로 들립니다. 그런 비판에 감사드립니다.

성공회는 현재 기도서를 개정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언어의 문제는 이런 점들을 통해서 조금씩 해결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언어도 어떻게 익숙해지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결과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개신교는 아직도 고어투가 지배하고 있는 한글개역판 성서를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모든 언어나 예식, 그리고 어떤 정체성에 대한 선언이 쉽고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좀더 깊이 할 수 있을까 하는 관심에서 이런 일들을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회는 이런 점에서 교리 자체에 대한 논쟁을 삼가는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분명히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실체 변화 교리”(화체설)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한 사람의 신앙인이 갖고 있는 이 문제에 대한 신앙적 확답은 사실 매우 폭넓어서 교리적인 몇가지 선언과 설명으로 담아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개신교의 성찬례 분위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같은 교단의 교회라 할 지라도 그에 접근하는 태도들이 얼마나 다양합니까?

성공회는 이러한 다양성을 어떻게 하면 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 격려하고 축하며 나눌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정체성은 그러므로 어떤 교리적인 선언에서나 확고한 신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성공회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성서와 교회의 역사적인 전통 안에서 하느님께 예배하는 공동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예배 가운데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새로운 실천을 다짐하면서 신앙의 실천을 통해서 하느님께 다가서려고 노력하는 공동체인 것이지요. 저는 그럼 점에서 “비아 메디아”(via media)를 어떤 가운데의 길, 중도로 표현하는 것보다는, “길 가운데” 있는 신앙인과 교회, 즉 하느님을 향해서 “계속 길을 걸어가는” 태도로 이해하고 싶은 충동이 많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아마도 성공회의 다양성과 어떤 점에서 혼란스러운 것 같은 그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Written by skhfaq

2003년 10월 6일 at 1:13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