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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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변화, 복음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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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교회사와 관련된 책을 읽었는데,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이 지켰던 7개의절기(유월절,나팔절,초막절)등을 현재에는 왜 안지내는지,일요일에배가 합당한지,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위의 절기들을 모두 폐지시켰다는데,사실인지..교회가 많은 이교사상을받아들이는데 신부님의 생각은 어떠한지 궁금합니다..성서적 근거를통해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주님의 평화

오랜만입니다.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간단히 답변 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으니,
유대교의 절기와 그리스도교의 절기에 대한 관계를 아는 것도 매우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엄연히 유대교와는 다른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혀 새로운 가르침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리니 이를 두고 “새로운 계약”(신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옛 계약”에서는 그에 따른 나름대로의 절기와 그 의미들이 필요했지만,
“새로운 계약”의 시대에서는 “새로운 절기와 그 의미”들이 필요한 건 당연하겠지요.

예를 들어 “유월절”(과월절)은 출애굽 사건에서 하느님의 진노가 히브리 백성들의 집을 묵인하고 “넘어간”(passover)한 사건에서 유래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며, 은총을 베푸신 사건에 대한 감사와 기념입니다.
그리나 신약의 주인공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이 친히 “과월절의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구약의 과월절 사건과 의미 상으로 연결되지요.
그리고 새로운 과월절로서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사건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안식일(현재의 토요일) 보다는,
이 부활의 사건에 더욱 큰 의미를 둡니다. 그러나 안식일 다음날 일어났던 부활일에 대한 기념으로서 주일(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며, 주님의 구원 사건의 완성인 부활을 기념하며,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찬양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교의 절기는 이렇게 해서 오랜 세월 동안 새롭게 정립되기에 이르고,
특별히 그리스도교와 유대교가 완전히 분리되는 1세기 말과 2세기 초에
그리스도교는 독자적인 길을 구축해나가는 것이지요.

그리스도교의 선교 활동은 다른 문화와 만나는 사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복음과 선교지의 문화는 서로 만나서 영향을 주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문화인 한 다른 종교 문화, 혹은 정치 문화 등과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 것이지요.
어떤 종교도 이러한 문화의 상호 작용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복음과 문화가 역사 속에서 만나는 과정에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

Written by skhfaq

1월 14, 2003 at 12:3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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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만병 통치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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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님 다음 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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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의견에 관한 간사님들과 빚진자 님의 견해를 잘 들었습니다.

의도는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몇가지 측면에서 제 견해에 대한 변호와 이견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번째는 성경이 세상 학문의 총론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총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이 특별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학문은 성경의 각론이 아닙니다. 각론이라면 그 안에 성경이 가지고있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요구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히 자연계시만으로 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인 대안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연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릴 뿐이지 그리스도라는 구체적인 답변에 도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각론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세상의 학문 만으로는 구원에 이르는 지식에 도달할 수 없음을 명확하게 지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총론이나 각론식의 결론은 부당합니다.

두번째로, 제가 주장하고 있는 견해에 대한 해석상의 오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1) 성경의 이적이 현대 과학의 한계내에서 해석되지 않는 다는 초 자연적 측면에서 까지 만족을 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고,

2) 세상의 견해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성경이 진리를 포기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답변을 하려면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쓰라는 것입니다.

세상과의 대화를 위해서 이교의 교리를 주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대화를 거부했기 때문에 잘못된 교리를 택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개혁은 세상과의 대화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시작되었음을 다시 고려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교의 비판에서 우리의 편협성이 문제라면 간략하게 나마 제 입장을 밝히려고 합니다.

우리가 편협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 극단적인 대처 방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단군상에 도끼질을 해 댄다든지 하는 식의 대처 방안, 이미 말씀하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식의 방법론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태도를 가지는 이유는 원론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야말로 담아내는 그릇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교의 비판은 우리의 원론에 대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를 죄의 근원과 결과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단혼한 하나님의 공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의가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에 이루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공의와 사랑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셨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토론자들이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네번째, 토론의 과정에서 섯불리 이교의 비판만을 올리는 것은 위험한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성경도 죄에 대하여 단호하지만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 줍니다. 다시말해 박광제 형제의 말에 공감되는 부분이면서 이견을 보이는 부분인데 정복의 대상으로 보아 자기의에 빠져 강압적인 형태를 보이는 부분이 공감되는 부분이고, 너무 사랑만 강조한 나머지 정복 대상이 사람이 아닌 것 처럼 이야기 하는 것이 이견의 부분입니다. 영혼은 복음의 정복 대상입니다. 물론 박광제 형제가 이야기 해려 했던 부분은 역시 원론이 아닌 태도의 오류임을 지적한 것이라는 것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한쪽의 태도를 강조하기 위하여 다른 반대편의 의견을 적적해 보이는 간격을 두고 이야기 하지 않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여섯째, 세상의 질문에 대해 해답을 주려는 적극적인 태도에 대해 동감하지만 앞서 밝힌대로,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성경을 포기할 이유도 없다는 점입니다. 성경이 총론이라서 모든 대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구원이란는 진리에 이르기 위한 모든 대답을 가지고 있고, 그 삶을 이루어 가는 원칙을 제시하고 있기에 답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빚진자님의 글을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적 근거를 든 논리가 한가지도 제시되어 있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무조건적으로 성경의 구절 몇장 몇절 식으로 인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세상과의 대화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찾아보시라는 것입니다.
단지 나타난 문제가 기독교 전체의 편협함인 것처럼 이야기 되고 있기 때문에 다시 한번 강조 하건대 유일신 신앙에 의해서 이교의 잘못된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추앙을 받고 있는 카톨릭의 세상과의 대화나 자유주의자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우리가 견재해야 할 태도는 분명히 그들의 종교적 관용이 아닌 복음의 전도 대상임을 명백히 하는 바 입니다. 그들은 구원 받아야 할, 사랑의 대상이므로 대화를 시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반론의 견해의 근거가 성경의 진리에 대한 거부일 때는 결단코 거부해야 합니다.

P.S. “종교적 관용”은 유럽의 신학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난 전문적인 용어임을 밝혀 드립니다. 현재 유럽 대륙과 전세계가 알고 있는 프랑스 혁명에서도 천명된 내용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의 교리 조차 독단적인 것으로 거부 되었습니다.

관용이라는 휴머니즘에 대하여 저는 진리의 유일성을 주장하는 바 입니다. 일반적인 사고가 세상과 신앙을 얼마나 미묘하고 밀접하게 연결시켜 주는 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 입니다.

분명히 언급하건대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부적절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우리의 동지는 그들이지 승려 현진이 아니라는 점이 명백한 것처럼 말입니다. 현진 이라는 승려가 주님을 구주와 주로 받아들인다면 몰라도……

———–

부제님 이 토론의 주제는 성경은 세상의 학문과는 동떨어진 것이므로 세상의 학문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줄수 없다는 간사님의 견해였습니다. 부제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 궁금합니다. 참고로 이 토론을 발췌한 곳은 http://www.jdm.or.kr의 토론방에서의 논쟁이었습니다. 부제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 아기 예수님의 평화

참 재미있는 내용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이런 토론에는 한편으로는 문외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관심이 없는지라 적절한 답변을 드릴 수 있을 지 겁이 나는군요. 다만 위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들은 논리성을 갖춘 것 같지만 실은 지극히 주관적인 신념을 기초로 해서 자신의 울타리를 치는 변론이지요. 신앙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주관성에 기초하기 때문에 이런 주장을 옳다 그르다 쉽게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 주관적인 신념이 고집이 되어서 다른 사람의 주관성 즉 다른 사람의 또다른 신념 체계를 거부하려고 하거나 이를 ‘정복’하려고 하면, 그것은 횡포가 되지요. 한국의 교회가 갖고 있는 전반적인 모습은 이런 횡포의 모습과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대화가 별로 없지요. 그리고 대화를 하자면 자신도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겠다는 자기 포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질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복음을 포기하라는 말인가 하면서 들떠 따지겠지요. 그렇다면 복음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어떤 인간적인 논리 체계로 만들어 놓은 신념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서 다른 사람을 쉽사리 지옥에도 보내고 천당에도 보내겠다는 전능자의 오른팔처럼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회의가 들기 마련입니다. 저는 이런 회의가 무척 중요하다고 봅니다. 복음이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불려 올라갈 때까지 묻고 실천하고 다시 물으며 살아야 할 주제입니다. 그것은 몇가지 제자훈련 교재에 나와있는 단기 속성 코스의 훈련이 아닙니다. 흔히들 운운하는 기독교적 세계관과 같은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복음의 주체요, 복음의 내용이요 핵심으로서 그 복음을 사셨던 예수님을 끝없이 바라보면서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봅니다. 종교적 관용이라는 것은 어떤 학술적인 용어가 아니라 누구보다도 엄격하셨으면서도 관대하셨던 주님을 새롭게 발견하기 시작한 징후일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시시비비는 제가 내릴 것도, 또다른 누가 내릴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그것은 형제님의 고유한 권한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복음에 대한 깊은 묵상과 주님에 대한 깊은 사랑 안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지요. 논리와 강압에 눌리지는 말 일입니다.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연약한 아기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Written by skhfaq

1월 23, 2001 at 1:4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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