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an Korean Anglican FAQ b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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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부한 대화의 향유, 게시판, 그리고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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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낙현 신부님 반갑습니다.

혹시나 하고 들어와 봤더니, 금새 제 글을 읽어보시고 반가운 답신을 남겨주셨군요. 이번에 석사과정을 마치시고, GTU에서 예전학으로 박사 프로그램을 시작하신다니, 축하드립니다. 그렇다면 지금 졸업 준비로 한창 바쁘시겠군요.

저는 프린스턴에서 중세 교회사(사상사)로 6년전에 박사과정을 시작했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늦춰지다 보니까, 논문을 다 마치지 못하고 비자 만료로 지난 1월에 한국에 돌아 왔습니다. 서론을 포함하여 Two Chapters를 더 써야 하는데, 아직도 차마 포기는 못하고 붙잡고 있습니다만, Only God knows when or whether I would be finished.

프린스턴에 있을 때 한 3년전 그곳 Seminary의 Episcopal Fellowship에 나가서 주중에 Holy Communion에도 참예하고 그분들과 교유도 나누었더랬습니다. 진정 카톨리코스적인 교회란 바로 그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외국인으로서 또 비성공회교인으로서 충분히 다가갈 수 없었던 제 자신의 한계 때문에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지만, 담당 사제셨던 Tawnley 신부님을 포함한 그분들의 포용과 환대의 정신에 경의를 포합니다. )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성공회의 고교회적 전통이나 로마 카톨릭, 정교회의 전례와 영성에 대해서 부족하지만 제가 아는 만큼 좋아하고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때때로 사회학적으로 말해서 내 종교적 준거집단은 혹 그 어드메 있지 않는가 우려(?) 비슷한 걸 해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전 제가 태어나고 자라난 감리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사랑하며, 또 존 웨슬리 목사님(사제)을 통해서 물려 받은 우리의 공교회적 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물론 대다수의 우리 감리교 형제자매님들이 이 귀중한 보화의 가치를 잘 모르는게 안타깝기도 하구요. — 이런 말씀 드린다고 실망하실 신부님은 아니시리라 짐작되어서 누구에게도 하기 쉽지 않은 얘기를 익명을 빌어 몇마디 두서 없이 풀어 보았습니다. (이 점이 신부님의 이 홈피.블로그가 종교간의 대화를 표방하는 몇몇 로마 카톨릭 형제들의 홈피나 카페하고는 다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점이 참 편안하게 다가 옵니다.)

그런데 이 “질문 있어요”란을 닫으신다고요?

이 블로그의 다른 곳에서는 코멘트 남기기가 여의치 않던데, 그리고 그 란에서 묻고 대답한 내용들이 참 진지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던데요. 아쉽다는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 들어와서 이런 객담도 남길 수 없게 되는 건가요?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여하튼 건강하시고요, 한 달음에 갈길 달려 가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 주님의 평화

루시안 전도사님, 즐거운 대화를 독려하시는군요(^^). 무엇보다도 지금 진행 중이신 논문을 어서 마치셔서 한국에서도 폭넓은 신학적인 대화의 장을 마련해 주시길 바랍니다.

여 러교회 전통, 특별히 예전적 교회의 전통 속에서 신앙과 영성의 기운을 감지하시는 마음에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사실 웨슬리 신학과 영성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이런 풍부한 전통과의 깊은 대화 속에서 나온 그분의 삶과 신앙이, 우리네 좁디 좁은 아집의 울타리를 금새 넘어가 버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대화를 더욱 깊고 넓게 하는 것이 후세대의 일이고, 신앙인들의 일이겠지요.

언젠가는 이 “질문”란을 닫으리라 생각하지만, 우선은 지켜보고 있습니다. 닫을라치면 언뜻언뜻 루시안님 같은 분이 오셔서 그러지 못하게 막거든요. 사실 저는 이런 대화로 풀어가는 이야기 속에서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주제들을 다시 생각할 수 있었던 같습니다. 제가 빚을 많이 지고 있는 셈입니다. 다만 그 빚의 무게도 있고, 한편으로 그 효용 가치가 떨어진 것 같아서, 이제는 앉아서 질문을 받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좀더 적극적으로 이야기와 고민을 나누고, 혹은 건방지게 도전도 해보려는 것이지요.

블로그 코멘트가 잘 안달리나요? 스팸 방지를 위한 코드 입력에서 좀 불편하리라 생각합니다만, 금방 익숙해지실 겁니다. 밤새 루시안님이 코멘트 도배를 하는 바람에, 좀 블로그다운 얼굴이 드러나는군요.

익명들이지만, 주님의 길을 함께 걷는 어느 길 모퉁이에서 쉬고 있을 때 서로 웃어주며 그 길을 독려하는 모르는 얼굴로 만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5월 14, 2005 at 3:3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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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와 개신교의 대립, 그리고 성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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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신부님. 밴쿠버에서 일전에 질문드린 유진입니다.
먼저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요즘 학업때문에 많이 바쁘시겠군요. 저는 인터넷에서 한글을 쓸 기회를 갖기가 쉽지 않아서 저번응답에대한 감사의 인사를 못드렸습니다. 죄송 합니다. 늦게나마 질문의 성실한 답변에 감사 드립니다. 신부님의 답변이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또 궁금한게 있어서 질문 드립니다. 시간이 닿는대로 상세한 답변 부탁 드립니다.

#질문: 왜 천주교회는 자기들만이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며, 왜 개신교회나 교인들을 업신 여길까요? 개신교회들을 도대체 교회로 인정하질 않던데, 그건 크리스챤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오만방자함이 아닌가요? 그런 태도를 보이는 천주교인이나 천주교 관련 웹 사이트들을 보면 심히 불쾌 하군요. 우리도 고대 에큐메니칼 3개의 신조로 신앙고백을하고, 성삼위 일체를 믿는데, 왜 교회가 아니며, 왜 구원이 없다고 하나요?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축소시키고 변질시킨 잘못된 복음을 가르치고 있지 않나요? 희생제사로서의 성체성사등의 가르침은 명백히성경의 가르침과는 틀리지 않나요? 또한 그들의 의인론은 전적인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가 개입된 Semi-Pelagianism또는 Synergism을 가르치고 있지 않나요?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변질이며, 그것을 선포하고 가르치는한 그들이 잘못된 교회 같은데….. 여하튼 심히 불쾌하고, 머리속이 어지럽기도 합니다. 이에대한 답변을 꼭 부탁 드립니다.

그럼 부디 학업에 좋은 결실이 있으시길 기원하며,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주님안에서 유진 올림.

+ 주님의 평화

아주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줍잖은 답변이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매우 기쁩니다.

몇달 전에 포틀랜드에 잠시 날아갔다 온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좀더 가면 유진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지요.

다시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질문이라기 보다는 안타깝고 슬픈 질문이라고 해야 할까요?
평화와 화해를 바라는 종교 안에서,
그것도 사랑과 평화를 통해서 구원 역사를 이루신 예수님을 함께 믿는 사람들이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는 것은 매우 슬픔을 떠나서,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현대 교회는 교회의 분열에 대해서 몹시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세기는 그동안의 분열에 대해서 하나의 “죄”로 인식하고,
갈라진 교회들 간의 상호 이해와 일치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성공회를 필두로 해서 많은 개신교들이 이러한 교회 일치 운동(에큐메니칼 운동)에
적극 참여했지요. 물론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천주교)도 여기에 자극을 받고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진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여전히 여러 교회들은 이러한 분열을 그대로 답습하고,
분열을 통해서 다른 교회에 대해서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자기 교회의 정체성을 찾으려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볼 때 매우 유아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지요.

세계적인 수준에서 그리스도교의 일치 운동이 진전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한국의 상황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개신교의 분열은 더욱 심한데다,
같은 서방교회 전통 안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에 뿌리를 대고 있는
개신교가 천주교를 손쉽게 이단시하는 태도들은 매우 볼썽 사납습니다.

천주교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개신교를 “갈라져 나간 형제”라고 나름대로 “격상”하다가도, 최근에는 이러한 태도에서마저 후퇴하여 개신교회들과는 대화조차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이는 최근 로마 가톨릭 교회가 보이고 있는 보수로의 회귀에 기인한 바가 큽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배타적인 태도가 여기에 덧붙여져 있는 듯합니다.

천주교가 한편으로는 종교 간의 대화를 부르짖으며 한국의 전통 종교 등과도 활발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같은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는 다른 개신교회에 대해 유독 배타적인 것은 매우 모순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고, 천주교가 선도하는 듯한 종교간 대화에 대한 의구심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전 세계적인 성향은 분명히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이 여기 버클리에서 공부하면서, 가톨릭 학교에서도 수업을 듣고 이런 문제로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만, 의식있고 깨어있는 분들의 태도들은 전혀 다르지요. 아마도 천주교회의 개별 교회 현장에서는 자기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여전히 이런 태도들을 가지고 신자들을 교육하고 있고, 또 그렇게 믿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누가 먼저냐 할 것없이, 자신의 정당성을 배타적으로 주장하려는 개신교 일각과 천주교 일각의 태도는 분명히 복음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런 태도들이 한국에서 여전하고, 특히 외국에 있는 한인 교회에서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는 소식을 들을 때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유진님께 한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성공회는 그동안 이러한 분열과 대립에 대해서 화해를 만들어가는 일을 자임해왔습니다. 여기에 우리 교회의 정체성이라면 정체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태도 안에서 자칫 성공회가 특성없는 교회처럼 보일런지 몰라도, 그래서 성공회만을 배타적으로 주장하고 싶더라도, 이러한 유혹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우리 자신을 반성해보고,
또 다른 개신교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할 것들을
오히려 존중하면서 경청해준다면, 새로운 길이 열리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염려하고, 그 치유를 위한다면, 바로 이러한 상호 배움과 경청을 자발적으로 하는 교회가 하나쯤은 있어야 합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 성공회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공회는 전혀 다르게 “성찰”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공회 신자는 좀더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너그러움”과도 통하는 구석이 있지요.

잡담처럼 들리는 답변이지만, 널리 헤아려 주십시오.
좀더 많은 대화를 통해서 함께 더욱 큰 그릇을 만들어 봅시다.

주님의 크신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

Written by skhfaq

1월 24, 2003 at 12:41 오후

교부 전통과 종교개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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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연일 좋으신 말씀을 많이 듣게 되고 그 은혜 속에 지적으로 비록 매우 작게나마 성장하는 저 자신을 느끼게 되어 매우 감사합니다..

음, 쩝~ 제가 들으니 가톨릭교회에서 성직자등의 정치참여를 명확하게 법으로 정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라고 하더군요..1982년이던가..교회법전을 정비하면서…관습상으로만 전해오던 성직자정치참여 금지를 법제화했다고 하던데..아마 전에 말씀하신 쿠바신부의 경우 그래서 그때는 가능했는지 잘 모르겠군요…

음, 오늘은 이것을 하나 여쭈어 보고 싶군요..

제가 들으니 개신교 주류교단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프란시스코 등은 신앙의 선배로서 존경한다던데요, 사실 이들을 가톨릭교회에서는 교회의 기틀을 다지고 찬란한 금자탑을 쌓은 가히 기념비적인 인물들로 추앙받고 있어요..
교회의 영속성 측면에서 볼 때.. 말에요.. 루터나 칼빈, 헨리 8세등이 이들의 후계자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하군요..

제가 이것을 어느 장로교인에게 문의하였더니 他개신교에서는 딱히 아우구스티누스 등을 계승한다는 의식은 없고 단지 신학적인 지평이 그들과 같다고 이해되므로 존경할 뿐이다고 하더군요..

개신교 중에서는 가장 가톨릭적인 요소가 강한 성공회에서는 아마도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프란시스코등을 공경하는 신심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마는, 만일 그렇다면..

이것은 성공회가 문자 그래로 ‘성스럽고 공번된 교회’로서 이들의 후계자로서 이들의 정통신앙을 계승하기 때문인지요..? 또한 그것은 성공회에서는 헨리 8세등의 성공회 종교개혁자들이 이들의 신학을 승계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으로 저희가 보아도 무방하겠는지요?

아니면, 단지 성공회에서도 기본적으로는 프로테스턴트 계열이니 루터, 칼뱅, 헨리 8세등의 종교개혁정신에 대한 계승의식이 강하고 단지 신학적인 지평을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이분들을 가톨릭에서는 敎父라고 존칭합니다만, 성공회에서도 그말을 쓰는지..) 등과 함께 할 수 있으니 이 분들의 신학을 연구하여 재해석하는 것인지요..? 또한 베네딕도와 프란시스코등과 같은 중세시대의 성인들에 대하여 단지 신앙의 훌륭한 선배로서만 이해하는지…궁금하군요..
사실 가톨릭에서는 베네딕도와 프란시스코 성인등 중세시대의 성인의 靈性을 계승한다고 자부하는 경향이 있거든요…

질문이 다소 산만한 경향이 있지만, 영민한 신부님께서는 질문의 핵심을 잘 파악해내시리라 믿습니다,..^^*
다만 신부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문제와 생각에서 차이가 있을수 있으나 그것은 단지 저의 소견이 좁은 탓으로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답변을 기대해봅니다..

+ 주님의 평화,

안녕하세요? 게파님.

답변이 너무 늦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때쯤부터 지금까지 여러 가지 일들로 겹치게 출연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차분히 앉아있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여러 가지 심적인 분란이 있었던지라 ^^

연일 좋은 질문 주신 것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 수준 높은 숱한 의문과 질문에 제 답변이 신통할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시도해보지요.

질문을 요약하자면…

게파님은 천주교가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프란시스 성인들을 계승하는 교회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고, 종교개혁은 실제로 천주교와의 분리이니, 종교개혁자들은 이들을 계승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가지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성공회가 종교개혁자들과 갖는 친연성과 더불어 교부들의 성과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이 덧붙여져 있군요. 그밖에도 여러 의미가 있는 의문들이 중첩되어 있구요.

답변을 시도하자면…

1. 교부들의 신앙은 모든 그리스도교회가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선 말씀하신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프란시스(프란치스꼬) 성인의 행적과 신앙적 결과물들은 천주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여러 번 언급했던 것처럼, 서방교회 전통에 있는 천주교나 개신교는 모두 이분들의 신앙적 유산을 공유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제게 가르침을 주신 신학교수님은 개신교 목사님이고, 또 종교개혁을 전공하셨던 터라, 그리스도교 신학의 삼총사는 바로 ‘어거스틴, 루터, 칼빈’이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이 대단히 옳다는 것을 늘 인정하고, 이들의 신학적 연구 성과가 그리스도교회 전체에 차지하는 의미를 늘 생각해왔습니다.

2. 교회는 여전히 계승되고 있다.

천주교는 기본적으로 개신교 종교개혁이 교회의 계승과 전통을 단절시킨 것으로 보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문제의식과 입장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처음의 교회로 되돌아가자, 복음의 교회를 새롭게 건설하자”는 것이었지, 교회의 분열이나 단절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 프란시스 성인은 복음의 정신 앞에서 함께 평가받고 다시 존경받아야 할 것이지만, 그들의 성과가 곧 복음과 대치될 수는 없다는 주장을 했던 셈이지요. 그런 점에서 전통교회의 신학을 복음을 연구하면서 새롭게 해석하고 비판하기도 하고 긍정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서방교회라는 같은 전통 안에 있는 천주교와 개신교는 교부 신학의 완성과 기틀을 어거스틴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니 종교개혁의 출중한 신학자인 루터나 칼빈은 어거스틴의 직접적인 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또 교회는 중요한 신학자들의 주장과, 깨지지 않는 교회 제도를 통해서 계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 천주교는 이견이 있을 줄 압니다만, 영속성을 가시적인 교회 제도를 통해 판단하는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천주교 내부에서도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3. 개신교는 종교개혁자들의 신앙을 승계하는 것인가?

개신교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얽매인다면 종교개혁의 주장이었던 “복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무색해지겠지요. 역사적으로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복음서가 증언하는 하느님이요, 구원자로 오신 그분의 아드님 예수님이요,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시는 성령님이지, 루터나 칼빈이 아님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또 루터나 칼빈은 그 역사적인 조건 속에서 복음을 해석하고 한줄기 빛을 주었던 것이지 그것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종교개혁의 거장이라고 해서 이분들의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되겠지요. 사정이 그렇다면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 대한 평가도 그럴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신학을 승계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통해 표현되었던 신앙적인 성과를 계승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요.

그리고 성공회는 헨리 8세의 성과를 그렇게 큰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신학적인 성과라고 보면 더욱 보잘 것 없습니다. 또 성공회의 신학은 여느 다른 개신교처럼 어떤 거장들(루터,칼빈)을 통해 마련되지 않고, 다양한 신학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논쟁과 혼란 속에서 정리되었고, 현재도 정리되며 그런 신학적인 삶이 실험되고 있습니다. 다른 개신교들이 루터라니즘(Lutheranism)과 칼빈이즘(Cavinism)과 같이 그 거장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것과는 달리 성공회는 앵글리카니즘(Anglicanism), 즉 영국 전역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삶의 총체성을 이름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극명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쉽게 말해서 문제는 학파의 문제가 아니라, 삶 전체의 문제이겠지요.

4.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이미 로마 가톨릭 교회와 성공회, 정교회, 기타 개신교는 일치를 위한 대화의 역사를 깊이 쌓아 오고 있습니다. 이런 대화는 서로에게 배움을 주고 받는 형태로 지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천주교의 분도출판사에서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의 강론집을 번역해서 내 놓은 것도 그런 예입니다. 한국은 이상하게도 교파 간의 벽이 높아서 서로를 경원시하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뜻도 아닐뿐더러, 현재 세계 교회의 추세도 아닙니다. 이런 벽들은 결국 서로를 더욱 모르게 하고, 결국 오해하게 만들지요. 서로 겸손하게 배우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교파 간의 담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답변이랍시고 시도했지만, 제 자신도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것 같아 아쉽고 미안합니다. 하지만 질문과 답변이 오가는 과정 속에서 정말로 “진리의 답변”을 주시는 분께서 미진한 부분을 채워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부족한대로 실어 보냅니다. 더 혼란을 부추기지 않을지 염려스럽지만.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된 형제 주낙현 신부 합장 ^^

Written by skhfaq

9월 29, 2001 at 3:0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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