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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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신경 – 마지막으로, 현대 교회에 대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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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시도해본 어설픈 답변이었습니다. 신경을 살필 때 그 어구에 담긴 그 성서적인 근거와 더불어 역사적인 필요의 상황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그 한정된 상황을 뛰어넘어 그 위대한 신앙 선언이 담고 있는 현대적인 의미들을 늘 성찰해야 한다고 봅니다. 바로 그때 그것은 과거의 신경이 아니라, 현대에도 역시 메시지를 전해주는 살아있는 전통으로서의 신앙 선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하나이요,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선언이 현대의 분열된 사회, 반목하는 교회 속에서 ‘일치’를 되새겨주고, 현실과 체제에 늘 안주하려는 신앙인에 대해서 ‘거룩한 여정을 통해서 사회를 거룩하게 만들라’는 촉구로 들리며, 지엽적인 사고를 부추기고 경쟁 중심의 사회 속에서 ‘모두를 아우르는 공동선을 추구하라’는 명령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잊혀지는 이 신앙 문화 속에서 그분과 함께 했던 ‘사도들의 나눔과 섬김의 선교’를 채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고정된 역사적인 문서이기 이전에 이미 우리 교회와 사회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대안적인 가치요, 종말론적인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설프나마 참된 교회 안에서 신앙의 여정을 굳건히 하려는 분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질문을 주셔서 저도 한껏 다시금 성찰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고맙습니다. ^^;

주님의 넓으신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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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khfaq

5월 27, 2004 at 2:45 오후

니케아 신경 – 4. 사도적인 교회 – 주교의 교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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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사도적”이라는 말을 통해서는 크게 두 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그리스도의 선교 위임을 받은 사람들을 사도로 불렀던 탓에, 그 사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교회는 이런 선교적 위임을 받은 공동체라는 생각이겠구요. 이것이 사도적 교회의 기본적인 근간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이 사도적인 위임은 교회를 통해서 신뢰감있게 지속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보여주는 표현은 바로 사도들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통해서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맥락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보완적이라 생각합니다. 선교 위임이라는 근본적인 정신과, 이를 교회 안에서 권위있게 지탱해 나가려는 구체적인 교회 치리 형태의 구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발전 과정에서 후자의 맥락을 매우 중요시한 교회들은 전통적으로 감독(주교) 중심적인 교회 치리 형태를 가졌습니다. 분열되기 이전의 초대교회들과, 로마 가톨릭 교회, 정교회, 성공회가 대표적이며, 서유럽 루터교의 일부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사도적인 정신과 감독의 지위를 분리하고자 했습니다. 감독은 이후에 만들어낸 교회 치리에 따른 직제일 뿐 사도적인 계승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사도로서의 교회의 선교적 위상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도계승권 문제는 내내 교회의 일치와 가르침을 위해 중요하게 작용했고, 실제로 성서에도 혼란은 있으나 “주교직”의 존재에 기능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합니다. 교회가 발전하면서 그 역할이 특화되고, 교회의 행정적 치리와 교리적 일치를 위한 중요한 직책으로 안착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회의 선교가 자유로워지면서 교회가 확장되고, 이에 따른 다양성이 자칫 ‘하나인 교회’라는 이상과 이미지에 훼손을 줄 염려도 있었던 것이지요. 어쨌든 사도적 교회라는 의미는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선교 위임, 복음 전파를 근간으로 하여, 역사적인 필요에 따라 구체적으로 주교직을 통해서 그 선교와 사도적인 직무가 지속된다는 생각을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성공회는 기본적으로 사도적 계승권을 굳이 “주교”의 안수를 통한 계승이라는 식으로만 이해하지는 않습니다. 성공회가 교회 일치 운동을 위해 내 놓은 기준 가운데 “주교직”에 관한 문제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적용된 주교직의 형태에 집중하지, 특정한 형태의 주교직에만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물론 성공회 안에서도 다양한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만, 이와 관련해서 아주 좋은 사례를 미국성공회와 미국루터교회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교단은 오랜 교회 일치 대화 끝에, 양 교단의 예배와 성직자의 사목을 교류하고, 안수(서품)까지 함께 하는 “완전 상통” FULL COMMUNION의 관계에 들어섰는데, 그전까지 논란의 핵심은 “주교직”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공동 선교를 향한 부르심”이라는 문서를 통해서, 주교직을 비롯한 성직, 그리고 모든 사목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선교적 증언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주교직은 이런 선교 위임을 받은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선교에 충실하도록 하는 직책이라고 이해했기에, 전통적인 ‘사도 계승권’ 교리를 갖고 있던 성공회와 이와는 다른 치리 구조를 갖는 ‘감독직’을 갖고 있는 루터교가 서로 이런 차이와 공통점을 받아들였던 것이지요.

다시 말씀드려 큰 맥락 안에 예수님의 선교를 이어나갈 위임 받을 공동체로서의 “사도적 교회”가 있다면, 그 선교를 위한 방편으로서 ‘주교직’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다시 한번 복음서의 선교 대 위임의 말씀을 되새겨야 할 때입니다. (마태 28:16-20,)

Written by skhfaq

5월 27, 2004 at 2:42 오후

니케아 신경 – 3. 보편적 교회의 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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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와 관련해서 용어의 사용에 대한 이해가 우선해야 합니다. 신경에서 말하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믿음은, 흔히 말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천주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개신교 일각에서 “사도신경”에도 “가톨릭 교회”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 이것은 개신교의 신앙 고백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매우 심려할 말한 무지가 횡행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이라는 말은 “보편적” “전체적”이라는 의미를 담은 말입니다. 해서 가톨릭을 용어를 사용하고 싶어하지 않는 개신교 신학자들은 CATHOLIC 대신에 UNIVERSAL 이라는 대체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어떤 용어가 되었든 이 생각의 근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란 점에서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 교회라는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다가 선교를 통한 교회의 확장과 더불어 전체 세계 교회를 아우르는 의미에서 교회의 체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의미 변화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스스로를 ‘가톨릭’이라고 부를 때, 자신들의 교회 체제가 보편적이고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에 대해서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교회 체제의 전체성이 아니라, 교리의 보편성을 가지고 이에 대항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실제로 교회 체제의 보편성이 가능하고, 교리의 보편적인 동의가 가능한 것일까요?

“하나인 교회”에 대한 생각과 닿아 있는 이 문제 역시 좀더 넓은 시각을 요구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앙인들이 서로 다른 의견과 삶의 형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가운데 사로 협력하고 교제하는 것에 대한 꿈이라고나 할까요? 혹은 그렇지 않은 현실에 대한 도전이라고 보아야겠지요. 다양성은 늘 존재합니다. 그 다양성을 넘어서 우리를 묶어주고 “일치”시켜서 “가톨릭” 교회가 되도록 하는 여정은 이러한 협력과 교제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의 삶이 무엇이었는지를 묻고 그 삶을 현실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공동선”에 대한 성서의 말씀이 이러한 “가톨릭” 교회를 향한 새로운 선교 임무로 들립니다. (로마 8:28, 1고린 12:4-7 을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Written by skhfaq

5월 27, 2004 at 2:40 오후

니케아 신경 – 2. 거룩한 교회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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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 문제도 교회가 거룩한 것이 당연하다면 굳이 언급되지 않았을 문제이겠지요. 앞서 “하나인 교회”에 대한 이야기에서 잠시 언급되었던 도나투스 논쟁과 그와 비슷한 논쟁들이 거듭되면서, 교회에는 “거룩한 사람들”만의 곳인지 아니면 “가라지와 알곡”이 섞여 있는 곳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 역시 역사적인 현실과 이론적인 믿음 사이의 갈등이라고 하겠고, 이 역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갈등과 거리이기도 합니다.

이 믿음의 근거는 역시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근거한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여겨왔기에, 이상적으로 그 몸에 참여한 사람들도 거룩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이상적 기준으로만 판단하면 거룩하지 못한 사람은 교회에서 축출되어야 마땅합니다. 실제로 교회는 역사적으로 이런 축출과 배제를 경험했으며, 그 어리석음을 거듭 깨닫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 거룩함의 판단 기준은 무엇인가? 누구 교회의 다른 사람을 거룩하지 않다고 간단 명료하게 판단하게 그들을 갈라내어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할 것인가? 이런 사고 방식은 몇가지 역사적인 연원에 근거해서 이름을 붙이자면 “청교도적 사고”(PURITAN)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들만이 “정결하다”는 식의 도덕적 엄격주의의 옷을 입고 등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가라지와 알곡이 섞여 있을테고, 그것을 가리는 일은 우리들의 일이 아니라 마지막 때의 하느님께서 하실 일로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성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니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근거한 만큼 그 그리스도의 몸에 초대된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해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모두 하느님 앞에 선 자로서 마지막 때에 거짓은 거짓으로, 진리는 진리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 마지막 때의 하느님 앞에 설 자로서 ‘나’는 이 교회를 통하여 나를 얼마나 거룩하게 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앞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광야를 배회하며 약속의 땅을 밟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순례하는 공동체”이기에 거룩함을 향한 그 순례의 과정에 충실할 때만이 “거룩한 교회”의 이상이 썩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즉 “거룩한 교회”라는 믿음은 어떤 추상적 개념 정의가 아니라, 이 순례의 과정 속에서 드러날 “아직 아닌” (NOT YET) 종말론적인 공동체의 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대체로 “칭의론”(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에 대한 편견과 과도한 집착으로 인해서, 신앙인의 “성화”(SANCTIFICATION)의 순례적인 개념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신앙 사건이 끝난 것처럼 오도되고, 신앙과 교회 공동체의 사귐 속에서 발전시켜야 할 “거룩함”에 대한 지속적인 순례의 여정은 끝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당신과 계약을 맺은 백성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레위기 19장 2절)

Written by skhfaq

5월 27, 2004 at 2:38 오후

니케아 신경 – 1. 하나인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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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인 교회”에 대한 믿음은 그 믿음이 깨뜨리는 위협의 순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니케야 신경이 형성되기 전에 교회는 매우 큰 분열의 조짐을 보였는데, 그리스도교가 공인되기 전인 250년경의 박해 사건과 더불어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했던 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박해에 의한 “배교자”들 가운데는 일반 신자들뿐만 아니라 주교들과 같은 고위 성직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해 이후 이들이 다시 그 일을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대두되었고, 이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과 그럴 수 없다는 주장으로 첨예하게 갈라졌습니다. 도나투스 논쟁이라 불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교회의 일치에 위협이 생기게 된 것이지요. 논쟁 끝에 과거의 잘못을 근거로 독자적인 교회를 만들려는 생각은 “교회의 분열” 위협으로 간주되고 최종적으로, 교회는 “하나”로서 일치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여파 속에서 니케아 신경 (325년)에도 이 내용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교회의 일치에 대한 믿음은 그리 성실하게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분열했고 (1054년), 서방교회 역시 1517년 개신교 종교개혁을 통해 분열되고, 이후 개신교의 분열은 가속화되어 지금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니케아 신경 당시의 상황을 가지고 보면, 모든 교회는 지금 분열 안에 있는 교회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현재의 교단들(로마 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은 저마다 니케아 신경이 선언하는 “하나인 교회”에 대한 믿음을 자기의 논리 속에서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 신경(CREED)가 보여주는 믿음의 선언과 분열의 현실 사이에는 분명한 거리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며, 이 현실을 인정하고 하나인 교회에 대한 믿음을 현재의 상황에서 다시 생각해야 할 필요가 뒤따릅니다.

일치에 대한 희망 사항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설명하는 방법으로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눈여겨 볼만한 주장은 세 가지입니다. 즉 현실의 분열을 인정하지만 이는 일시적인 것이고, 세상의 끝 날에 이르러서는 이런 분열이 해소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를 종말론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두번째는 나무 가지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나무가 성장하기 위해서 한 뿌리를 두고 다양한 가지를 뻗듯이 다양한 교회는 하나의 현실이지만 한 나무로서의 유기적인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마지막으로 교단적인 통합에 대한 이상보다는 “한 분이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생각하여, 교회의 다양한 문화적 조건과 역사적 상황 속에서의 다양성을 인정한 후에, 이 다양성 안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교의 본질들을 부분적으로 나누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모자이크론이라고 명명하면 될까요? “다양성 속의 일치”는 말이 여기에 닿아 있지요. 교회 일치 운동에 매우 헌신적인 성공회는 기본적으로 이 세가지 입장을 모두 받아들이면서 현실적인 일치의 노력을 위해서 마지막 입장을 강력하게 견지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이런 논의는 지속적으로 한분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 기초한 교회들이 다양할지라도 서로 교류하고 함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갖게 합니다. 그리고 다양성이 아니라 반목과 질시, 심지어는 싸움으로 치닫는 상황에 대한 반성 속에서 더 이상의 분열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을 위해서 드리는 “일치와 사랑”을 위한 기도는, 니케아 신경의 “하나인 교회”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해석하는 기반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한복음 17장 20절에서 26절에 이르는 예수님의 절절한 “일치”의 기도를 현재의 분열된 교회들은 거듭 되새겨야 하겠지요.

Written by skhfaq

5월 27, 2004 at 2: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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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신경 질문 – 뒤집어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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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있습니다.

니케아신경의 거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이어오는 교회”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이고 – 지금 교회는 정말 많지요, 교단도 많아요
그런데 하나의 교회라는 말을 쓸수 있을까요?

거룩하고 – 여기서 거룩하다는게 교회가 거룩하다는건가요?
아니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거룩하다는건가요?
아니면 하느님과 예수님이 거룩하다는건가요?

공번되고 – 이거는 가톨릭이라는 말이죠?

사로로부터 – 어떻게 이어온다는거죠?

넘 궁금합니다.
혹시 시간있으시면 답변부탁드립니다.

추가질문…

신부님께 질문을 드리고나서
김진만 선생님의 ‘성공회이야기’를 읽어보았습니다.
그 책이 약간 도움이 되었는데,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어서 또 질문합니다.

사도신경에는 ‘거룩한 공회’라고 표현되어있는데
니케아신경에는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로
길게 표현된것에는 신학적 이유가 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신학적 이유는 뭔가요?
답변부탁드립니다.

+ 주님의 평화

답변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오랫동안 홈페이지를 관리할 만한 여유를 갖지 못했습니다. 질문을 주시고 그 답변을 기다리는 마음이 어떤 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미안합니다. 좀더 내실 있는 홈페이지 운영을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답변이 이렇게 늦는 일은 또 없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매우 어려운 질문이기도 합니다. ^^ 답변이 없는 동안 다른 조사와 연구를 통해서 이미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하셨는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제 나름의 답변을 시도해보겠습니다.

이 답변이 제 개인의 답변으로 그치지 않고 질문하신 분이 교회 혹은 어떤 신앙적인 문제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시고 그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질문을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즉 “거꾸로 생각하기”입니다. 이러면 의외로 문제에 대한 접근이 좀 쉬워지고, 오늘의 상황에서 생각하기에 적절한 답변을 구할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님께서 주신 니케아 신경의 교회에 대한 정의는 “하나이요,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걸 모두 부정해서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하나이지 않고, 거룩하지 않고, 보편적이지 않으며, 사도적이지 않은 교회”가 되겠군요. 바로 이것이 이 신경의 구절을 정리해서 삽입한 까닭이라고 봐야겠습니다. 즉 신경을 구성할 당시 이런 교회의 정의가 필요했던 것은 교회가 이런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소망이기도 했고, 그것은 그렇지 않은 현실 때문에 기인한 것이겠지요.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아래에서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Written by skhfaq

5월 27, 2004 at 2:3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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