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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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분열과 일치 – 누구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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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님이 쓰신 글]

안녕하세요 .. 저는 가톨릭 신자 입니다

본론만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과연 이렇게 나누어진 교회의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 일까요?

여러가지 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희 교회에 교리에 반대?

한다는 근거야 다의적인 의미가 많이 있는 성경에서 찾아서 신학적으로 정립하면 되

는 것이지 않습니까?

여하튼 주님이 세우신 교회의 본질을 제대로 실천하는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예수님을 직접 체험했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을 조금이나마 더 간직하고 사도들과 여러 성인들의 가르침이 남아있는

있는 교회는 가톨릭(동방가톨릭 포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잘못 속에서도 가톨릭이 구원사업을 행 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성령의 은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분열되었습니다. 피를 흘렸습니다.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모습일까요?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모습일까요?

사도 바오로도 고린토 교회의 분열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두서없이 어설프게 한 말씀 드렸습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 주님의 평화

“가톨릭”님 안녕하세요?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역시 안타깝게 생각하는 그리스도교의 한 신앙인으로서 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생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분열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무엇보다 지난 세기 이후 교회 일치 운동에 가장 헌신적이었던 성공회는 이 아픔을 더욱 크고 깊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분열에 대한 진단의 시각 자체가 서로 다르면, 치유를 위한 처방 역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 속에서 얻는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 교회가 가장 역사적으로 사도적인 교회’이니 ‘이 교단’을 중심으로 일치가 전개되어야 한다든가, ‘이 교회가 가장 성경에 기반한 교회’이니 ‘이 교단’을 중심으로 되어야 한다는 등의 의견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 정교회, 성공회를 비롯한 여러 개신교회들 안에는 이런 자기 주장을 통해서 서로를 설득하려는 움직임이 여전합니다. 그러나 그 전개나 결과는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가톨릭’님께서 주장하시는 대로 로마 “가톨릭 교회(동방 가톨릭 포함)”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의견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오래된 주장입니다만, 정교회(동방교회 및 각 전통의 정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예수님을 직접 체험했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을 조금이나마 더 간직하고 사도들과 여러 성인들의 가르침이 남아 있는 교회”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를 그런 교회로 자신할 지 언정 로마 가톨릭 교회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종교개혁은 크게 보면 중세 서방교회 안에서의 자기 개혁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쉽게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종교개혁이란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어떤 특정한 교단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이 속해있던 서방교회 전체 자체 “안에서” 일어나, 성서의 권위를 새롭게 비추어 보고, 그에 따라 교회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살펴본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다양한 개신교 형성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전혀 분열되지 않은 ‘정통’ 교회라고 자처하는 동방 교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서방 교회 내의 자기 분열일 뿐입니다. 즉 로마 가톨릭 교회도 하나의 분열된 교회의 일원일 뿐인 것이지요.

교회가 분열하여 서로 싸우고 피를 흘렸던 부끄러운 역사는 자신을 중심으로 어떤 일치건 통합이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 속에서 싹텄습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들은 세속 정치 권력을 이용하고 거래를 했으며, 한 분이신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형제들을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도륙했던 것이지요. 즉 어떤 배타적 기준에 의한 일치라는 것이 이미 하나의 환상이거나, 동시에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깨달은 지 오래라는 사실입니다. 서방교회 전통 안에 있는 개신교회가 세월을 거듭해서 분열했던 이유들은 이런 ‘배타적 진리 소유’라는 입장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런 전철을 밟질 않길 바랍니다. 이미 로마 가톨릭 교회는 1960년대 초 바티칸 2차 공의회 이후 이런 배타성의 원리에 대한 반성을 제기하였고, 그 이후 지속적인 교회 일치 대화가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무엇보다도 서로를 통해서 복음의 진리, 교회 신앙의 전통을 풍요롭게 배우는 시기였습니다. 이미 1940년대에 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 측의 교회 일치 운동과 더불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런 포용성의 원칙을 제공한 것은 그리스도교 역사에 큰 축복으로 남아 있습니다.

님 께서 말씀하신 대로, 교회는 잘못을 통해서도 성령의 은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쉬지 않고 전개합니다. 그러나 그 성령의 은총을 로마 가톨릭 교회만이 독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자유롭고 넓으신 성령은 그리스도교회 전체의 분열이라는 아픔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내의 여러 신앙 전통 안에서 그 역사와 그 신앙인들과 그 현장의 삶을 통해서 내내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넓으신 성령님의 활동을 감지하면서, 교회의 분열과 그 아픔을 응시하는 일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해나가는 일은 늘 “내 탓이오” 하는 철저한 자기 반성을 통해서 더욱 깊어짐과 동시에 다른 이들과의 폭넓은 대화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회의 태도에 대해서만 짤막하게 덧붙이면 이렇습니다. 성공회는 교회 일치와 관련하여 “일치를 위해서 스스로 사라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 기꺼이 사라지길 다짐하는 교회”라는 신념을 그 신앙과 실천 속에서 발전시켜왔습니다. 이 때문에 성공회는 어떤 가능성에도 열려 있는 교회가 되기도 하고, 또한 이런 개방성 때문에 그 모호한 정체성에 대한 비판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회는 최소한 이러한 태도가 교회 일치에 진전을 가져오리라는 확신과 경험을 통해서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길도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중요한 하나의 길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 길 속에서 함께 만나서 이야기하고 걷고 어깨동무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길만이 옳다고, 이런 걸음자세만이 옳다고, 이런 여행 복장이 옳다고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종종 이런 자기 주장들은 ‘남을 제어하기 위한 내 신념’이었을 망정 성령님의 은총에 나를 맡기는 ‘투신의 신앙’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길 어느 모퉁이에서 다시 만나기를 희망하며,

주낙현 신부 합장

신부님의 글 정말 잘 읽었고 많이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일치라는 것 말은 쉽지만 서로 양보와 희생을 기본 전제의 바탕으로 삼아야 겠지요.

이것이 어려워서 지금도 이렇게 갈라진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렇고 신부님도 그렇고 자신의 교회에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신부님 말씀대로 교회가 누구를 중심으로 일치해야 되는가란 문제는 정말 많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동안은 무조건 저희 교회 중심으로 라는 생각만 앞섰던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그럼 신부님에 말씀을 제 주관으로 해석한다면

(게다가 종교개혁은 크게 보면 중세 서방교회 안에서의 자기 개혁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부님의 말씀 중에서

만약에 성공회가 잘못한점이 있어서 누군가 개혁이 필요하다고 교회를 나간다면
그것은 올바른 행동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감리교는 성공회에서 나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공회에서는 감리교를 자기개혁를 잘한 교회로 보시는 지요???

마 지막으로 교황 선출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의 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봅니다. 신부님이 앞서 글에서 성령의 작용이 어느 교회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황님에 대한 비판의 글은 남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결국 신부님의 성공회 중심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됩니다. 이 점에 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또 염치 없이 글을 올립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 되기를 기원하며 -엘리사- (제 본명 입니다.)

+ 주님의 평화

엘리사님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 답변과 다른 글에 대해 의견 주신 것 고맙습니다. 어떤 질문이든 함께 나눠보자는 초대한 것이니 엘리사님이 염치 없을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즐거움이기를 바랍니다.

이 미 많은 이야기를 위에서 했으니, 다시 질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제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교회 일치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종교개혁을 통한 분열이 하나의 자기 개혁 운동이라고 할 때 성공회와 감리교의 분열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는 블로그에 올렸던 새로운 교황에 관한 글이 “성공회 중심의 비판”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제가 답변에서 했던 말과 모순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첫째로, 성공회와 감리교의 분열에 관한 것입니다. 앞서 답변에서 종교개혁에 대한 제 나름의 표현을 다시 언급하자면, 종교개혁이란 세계 그리스도교의 견지에서 보았을 때 “서방 교회 내 자기 개혁 운동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엘리사님이 감리교에 빗대어 말씀하신 “자기 개혁이 잘된 교회”를 뜻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디에서도 종교개혁이 “자기 개혁이 잘된 교회”라는 의미에서 그 분열을 정당화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런 생각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 평가는 잠시 접어두고 그것이 하나의 필연적인 “산물”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회 역사 안에서 일어났던 특정 시기의 어떤 신앙 쇄신 운동이 기존의 전통 안에서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감리교가 독립적인 교단으로 발전해 나간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반성이 필요합니다. 그 하나는 이런 자기 개혁의 동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당시 교회의 폐쇄성에 대한 반성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개혁 운동의 주창자가 끝까지 성공회 안에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의 추종자들이 교단적인 분리를 택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성공회로서는 당시의 폐쇄성에 대해서 반성해야 할 것이고, 감리교로서는 분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느냐는 반성이 필요합니다. 즉 반성은 서로에게 요구하는 것이기 이전에 먼저 자기 안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그 때에 건설적인 대화가 진행될 여지가 마련됩니다. 결국 세계 각국으로 펼쳐진 감리교와는 달리 정작 영국 감리교는 최근 영국 성공회와 실질적인 교단 통합과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그 시점을 두고 “올바름”을 따지고 들었다면 요원한 일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더 욱이 현재의 우리는 과거 분열 시대의 당사자들과는 다릅니다. 그 분열과 분리의 역사적, 신학적 계기가 동기가 어떠했든 간에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전통을 유지하면서 살아왔고 그 전통의 영향권 아래서 자신의 신앙을 발전시켜왔습니다. 다만 그 발전 속에서 복음과 신앙의 전통 속에서 우리 신앙을 재발견하며, 우리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반성하고 새로운 교회와 선교의 비전을 찾아가며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교회의 일치는 우리가 이미 살아가고 있는 이 전통 안에서 복음을 통한 이러한 개혁의 길 가운데 만나야 할 어떤 것이지, 과거 어느 시점을 중심으로 한 환원 운동이 아닙니다.

교회의 분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열에는 건설적인 분열이 있는가 하면, 파괴적인 분열이 있습니다. 건설적인 분열과 분리는 교회의 일치를 위협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다양성과 복음의 보편성을 아우르게 하여, 결국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파괴적인 분열은 서로에 대한 반목과 질시를 낳고 결국 대결과 폭력을 동반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훼손할 것입니다.

둘째로, 최근 교황 선출과 관련된 글에 대해서는 짧게 답변하겠습니다. 우선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시라고 권유하는 수 밖에 없지만, 좀더 덧붙인다면 이렇습니다. 그것은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의 신앙인으로서 바라본 하나의 “상념”이었을 뿐입니다. 다만 그 상념의 근거들을 여러 사람들의 평가 – 제가 공부하고 있는 미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 나오고 있는 – 와 더불어 확인하고, 종국에는 어떤 희망을 가져보려는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많은 미국 가톨릭 신자들의 비판과 실망감을 보면서, 다른 교단의 성직자 한 개인으로서 느끼는 아쉬움의 표출 정도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글 말미에 언급한 것처럼, 그분의 새로운 이름대로 세계와 교회에 “축복”이길 희망할 뿐입니다.

평화를 빌며

주낙현 신부 합장

신부님 이번 글도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인터넷으로 나마 허물없이 대화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교황님에 대한 신부님의 글을 보고 맞는 말씀이지만 제 생각과 다른 부분을 이야기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보수라는 의미의 약간은? 부정적인 어조 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판치는 시대로 옛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의견이 팽배한 세상 입니다. 이 점은 신부님께서도 충분히 동의 하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진리는 지켜져야 합니다. 진리가 무너질때 세상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진리보다 행위가 앞설 때 역사는 말해 줍니다. 그 결과는 바로 마르크스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켜져야 할 것은 지켜야 합니다. 단순히 개방 자유. 인간 존중 이라는 논리 아래 지켜야 할 것을 버리는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이겠습니까?
신부님의 의견이 물론 아니시겠지만 성공회의 동성애자에 대한 주교 서품 같은 것은 자유의 미명아래 해서는 안될 것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반성하고 새로운 교회와 선교의 비전을 찾아가며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라는 신부님의 글은 모순 됩니다.
복음을 강조하면서도 개혁과 진보라는 미명아래 복음 정신에 어긋나는 것들을 주장하는 논리말입니다.

또 한가지 질문들입니다. 성공회는 성찬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임재설을 교리로 가지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임재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즉 성체를 어떻게 바라보시는 지를 알고 싶습니다. 분명 가톨릭의 성체이해가 왜곡되어 있다고 하시겠지만 성경에 분명히 그리스도에 몸과 피를 나누어 마셨다는 초대교회에 증언이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한 의견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공회는 가톨릭과의 유대성에 따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3단계로 나누어 진다고 하는데 이점에 대해서도 답변 부탁드립니다.
하이 class 로우 class 라는 표현 말입니다.

일치(Unitas)의 출발은 대화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신부님과 대화 할 수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주님의 평화

엘리사님과 이야기가 길어지는군요(^^). 이곳에만 시간을 쓸 수는 없는 처지이니 최선을 다하되 되도록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일 치의 출발을 대화”로 생각하게 되었다니 기쁩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 속에서는 공통점도 발견하게 되지만 극명한 차이점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차이점들을 이미 엘리사님이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선 이러한 차이점은 로마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천양지차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우선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제가 엘리사님께 우선 바라는 게 있다면 이렇습니다. 어떤 분명한 기준을 두고 분명한 견해를 밝히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 분명한 기준에 대한 성찰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성찰이 충분하지 않으면 필요 없는 오해가 줄기차게 생겨나고, 결국 자신을 어느 시점 안에 가두고 다른 것을 보지 않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예를 들어봅니다. 저는 “완고한 보수주의자”라는 제한된 표현 속에서, 그리고 그런 표현의 선택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 속에서 나름의 생각을 펼쳐낸 것이지, 엘리사님께서 지적하는 것처럼 “보수”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지적들은 내내 엘리사님이 가진 선입견 안에서 확대해석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견해나 “진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표현들이 그 예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태도, 그리고 “세상이 무너지는” 증거로 제시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평가 자체가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다양하다는 점을 먼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엘리사님은 제 말을 인용한 “우리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반성하고 새로운 교회와 선교의 비전을 찾아가며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라는 말을 어떤 모순 어법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에는 “복음”과 “진리”를 엘리사님이 마음에 두고 있는 어떤 특정 교리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습니다. 교리는 “복음”과 “진리”를 드러내고 소통하기 위한 제한적인 방법이요 표현에 불과합니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으로 교리는 “복음”과 “진리”를 막는 장애물로 등장하기도 했고, 그것을 훼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오류에서 어떤 교회 전통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또 그런 이유에서 교리는 시대와 상황 속에서 변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리가 변화와 요구와 도전을 용기 있게 받아들일 때 그것은 또한 복음을 드러내는 수단으로서 유용성을 항상 유지하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과 교리의 차이이자, 그 관계이기도 합니다. 이 상관관계의 긴밀한 역동성을 식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이기도 하며, 또한 우리의 기도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런 식별을 통해서 교회는 교리의 변경을 결정하기도 하고, 잘못된 교리에 근거했던 교회의 생활과 실천을 바꾸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자기 개혁입니다. 이것이 또한 맹목적인 세속적 지배 이데올로기와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른 점입니다.

이런 생각 끝에 저는, 엘리사님이 그리스도교 전통, 최소한 로마 가톨릭 전통 자체의 풍부한 자산들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많은 내적인 대화를 열어가길 권유합니다. 그리고 대화가 깊어가는 과정 속에서 다른 여러 동료 신앙인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엘리사님의 교회 성직자와의 대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전통의 신앙인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전통에 대한 이해가 폭넓고 깊어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성찬례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는 이 게시판의 다른 곳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화체설”과 “성찬”과 같은 검색어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질문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성공회 내의 어떤 성향에 대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가톨릭과의 유대성”이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기 어렵고, 예전적인 성향과 신학적인 성향에 따라 “고교회” “광교회” 그리고 “저교회”라는 표현으로 성공회 내의 다양한 흐름을 설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내용 역시 검색어를 통해서 먼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 삶과 죽음과 부활로 보여주신 복음의 길을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만나게 될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그 잡히질 않고 내내 걸어야 할 것을 요구하는 복음의 목소리가 엘리사님을 늘 이끌어 주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넓고 크신 은총이 함께 할 것입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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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khfaq

4월 23, 2004 at 3:22 오후

전례의 보수성과 신학의 진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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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준님의 질문 1.

대한성공회는 제가 알기로 고교회파가 우세한 것 같은데 전례와 전통 면에서 보수적인 교회가 어떻게 가장 진보적인 교단이라는 평가도 함께 얻고 있는 것인지, 내부에서 어떻게 조율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로마가톨릭에서는 얼마전에 시노드가 열렸었더군요.) 신자로서 관심두는 점은 본당공동체가 항구적인 사목지향성 없이 신부님의 성향에 따라 운영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되기도 하네요.

답변의 시도 1.

성공회는 아시다시피 예전적인 전통을 강조하며, 이것을 신앙 생활의 매우 중요한 축으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교단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스럽게 살펴야 할 것은, 전통이 늘 보수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보수적인 전통도 있고 진보적인 전통도 있지요. 또한 옛 생활의 습관이나 관습을 지켜 나가는 것이 곧바로 어떤 신학적인 태도의 보수성과 늘 직결되지는 않습니다. 성공회와는 반대로, 예배 전통에 대해서 아주 “진보적” 혹은 흔히 말하는 “개혁적 전통”에 있는 교단들이 신학에 있어서도 “진보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보수성”이라는 것이 옛 것의 올바른 전통을 지키는 것이라면, 성공회는 기꺼이 보수적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전통 속에는 복음에 대한 신앙인의 응답과 실천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올바른 것으로 여기며 따르는 것이 한편으로는 전통에 대한 “보수성”이면서, 현실적으로는 그 응답과 실천이 우리 사회와 교회 안에서는 “진보성”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보수성과 진보성이라는 표현이 교회나 신앙 안에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성서와 교회의 전통이 보여준 신앙적 가치들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인들은 자신의 신앙 생활의 틀을 지워주는 하나의 전통을 선택하거나 그 안에서 살아갑니다. 성공회는 그 틀 가운데 하나가, 전통적인 예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전통적인 예전 속에서 하느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듣는 경험을 하면서 우리의 신앙과 실천을 키워나갑니다. 그 올바른 신앙의 실천이 하나의 진보적으로 비친다면, 성공회는 진보적이기를 늘 “보수”할 것입니다.

곁들여있는 “시노드”에 대한 질문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시노드는 수십년 만에 한번씩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의 문제점들과 사회의 변화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이며, 대처할 것인가를 논의하고 사목적인 방향을 결정하기도 합니다.

수십년 만에 열리는 로마 가톨릭의 시노드에 비해서, 성공회는 거의 1년마다 시노드를 개최합니다. 그것이 바로 교구 의회이고, 전국적으로 열리는 관구의회입니다. 성공회는 의회민주주의를 교회 정치에 가장 먼저 적용시킨 교단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를 통해서 의견을 조율하고, 사목적인 전망들을 나누며 함께 대처해 나갑니다.

또한 성공회는 성직자 개인의 사목적인 성향에 따라 교회의 사목 활동을 결정짓지 않습니다. 현재의 성직자를 파송하는 인사 원칙 자체가 바로 교구 전체의 사목적인 방향에서 결정되는 것이며, 그 교회의 사목은 다시 성직자 개인이 아니라 교회위원회를 통해서 결정되고 운영이 됩니다. 성공회에서 성직자는 교회 사목의 “지도자”(leader) 이지, “소유자”(owner)가 아닙니다.

물론 현장 사목의 문제에서 이런 원칙을 적용하는 과정에서는 여러 조건과 상황에 따른 격차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모든 적용과 실천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가피한 것입니다. 교단을 떠나서 그런 문제점들은 어디나 존재하는 것이지요.

Written by skhfaq

10월 6, 2003 at 1:09 오후

성공회에 대한 많은 질문 – 답변의 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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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대학교3학년 학생인데
이곳을 알게 되어서 찾아와보고 몇가지 질문과 답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저희 집안은 개신교 가정이고 저도 개신교(장로교)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상처받은 후로는
아직까지 딱히 섬길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인’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그저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한때 장로교회를 열심히 아끼고 섬기면서는
꽤나 배타적이고 보수적인(보수적이긴 천성인가 봅니다 허허..) 사람이었는데
교회문제로 1년 넘게 방황하면서 유명하다는 교회, 큰교회, 작은교회
천주교회와 성공회까지 두루 다녀보면서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고 지금은 동네 성당에 나갈 때도 있고
새 교회를 나갈 때도 있습니다.

젊으니까 그런 욕심이 있지요.
정말 좋은 공동체에서 훈련받고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고
많이 배우고 그럴 수 있는 곳에 안정적으로 있고 싶다고.
물론 제가 가진 은사들로 마음껏 섬기고픈 마음도 가득합니다.

한마디로 마음껏 신앙에 대해 배우고 나누고
헌신하시는 분들 곁에서 본받고픈 마음이 간절합니다.

성공회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교양수업으로 서양기독교사를 들을 때
발표를 하기도 해서 나름대로 그 정체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바가 있는데요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우선, 대한성공회는 제가 알기로 고교회파가 우세한 것 같은데
전례와 전통면에서 보수적인 교회가 어떻게 가장 진보적인 교단이라는 평가도
함께 얻고 있는 것인지, 내부에서 어떻게 조율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로마가톨릭에서는 얼마전에 시노드가 열렸었더군요.)
신자로서 관심두는 점은 본당공동체가 항구적인 사목지향성 없이
신부님의 성향에 따라 운영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되기도 하네요.

둘째로는, 여기에 없는 것 같은데
대한성공회에서는 ‘그리스도교인의 제사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 사목규정 같은 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천주교의 상장례 관련 부분의 신학적 토착화 노력은 인정합니다만
신자들의 ‘대사(면죄)’문제와 관련하여 연옥설을 이해하기 어렵고
개신교에서 권하는 ‘추모예배’도 이미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도대체 예배는 주님께 드리는 것인데 ‘추모’는 죽은이이고
또 돌아가신 분이 안 믿는 조상이신데 성경에는 지옥간다 했으니
걱정은 되는데(?) 죽은이들 위해서는 기도하지 말라 그러고…
이렇게 신학적 기반과 성찰이 없는 것도 안타깝고 헷갈립니다.
성공회의 입장은 어떤지요?

셋째로, 성공회에서는 신부님들이 결혼도 하시는데
반대로 로마가톨릭에서처럼 사목을 하면서 독신생활도 유지할 수가 있습니까?
독신사제로서도 별 어려움 없이 사목할 수 있으며 종신까지 그 복지를
교회에서 도와주기도 하나요?

넷째로는, via media를 택하는 성공회의 특성상
신자들도 성공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교인들도 있지만
천주교에서나 개신교에서 옮겨온 이들도 꽤나 많은 것 같습니다.
즉, 먼저 그리스도교를 어떤 형태로든 접하지 않고서는
성공회를 이해하고 다가가기가 너무 어렵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예배전례문이나 기도서도 고어투가 많아 어렵기도 하고
신자들의 정체성도 천주교에서 온 신자는 성만찬을 천주교의 희생제사
그대로 이해하고 있을 수 있고
개신교에서 온 신자들은 일부는 그저 예식이 아름다워 올 수도 있고
여하튼 성공회의 정체성이 너무 복잡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유, 제가 워낙 말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습니다.
너무 무슨 ‘질의서’처럼 썼는데요 무례했다면 용서해주십시오 신부님.
쓰면서도 생각해보니 그게 바로 성공회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신자들 머릿수보다, 어디로 도망(?) 못가게 붙잡아 두려는 것보다
쉽게 비판하고 비난하기보다 좀더 기다리고 바라보는 교회 말이지요..

저도…교회사에 관심이 많고
교회간 대화와 연합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방황기를 주시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외롭기도 하고 힘드네요.

내일이 주일이네요.
복되고 기쁜 주일 되시길 바랄게요.
시간 되시는대로 천천히 답해 주세요. 바쁘실텐데..^^

그럼 안녕히 계세요 주 신부님!

+ 주님의 평화

박경준 형제님, 좋은 질문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박경준님의 개인적인 “방황”은 그저 한낱 방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가는 하나의 “순례”와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방황한다고 스스로를 탓하지 마시고, 그 순례와 신앙의 여정 속에서 하느님을 늘 새롭게 발견하고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좋은 질문 주셨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 여러 답변 가운데 하나의 시도, 혹은 제 경험에 따른 생각을 전하고 함께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신앙의 여정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대답은 다양하고, 그 깊이 또한 깊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답변은 아래의 모든 답변들과 같이 하나의 시도요, 계속되는 여정의 한 길목에서 잠시 정리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저는 이것이 신앙적인 문제에 대한 성공회적인 답변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변하지 않는 확고한 답변을 줄 수 있다는 태도와는 좀 거리가 있는데, “확실성에 대한 믿음”은 때로 사람들의 다양한 신앙적 경험과 여정을 손쉽게 재단하고 단죄하는 위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신 질문 네 가지에 대해서 하나씩 설명해 보겠습니다.

Written by skhfaq

10월 5, 2003 at 1:08 오후

성공회의 고교회파와 저교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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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성공회홈피 게시판에서 친절하고 성의있게 답변해 주신것에 대하여 이 자리를 빌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음, 여쭈어 보고 싶은 말씀은,,
제가 들으니 성공회에서도 고파와 저파가 있다던데..
이것은 단순히 신학적인 경향인지요?
아님…다른 개신교처럼 같은 교파내에서도 교단의 분열이 있었던 것인지요?

이것이 단순히 과거의 일인가요? 아님, 현재의 성공회 신학이나 목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요?

질문이 좀 황당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음, 제가 본 책에는 그것을 가지고 무슨 ..다른 개신교파의 교단분열처럼 묘사하더라구요.. 성공회 안에서는 따로 분열된 교파나 교단이 없는지요?
참고로 저는 가톨릭신자입니다..
영육간의 건강하시기를…

+ 주님의 평화,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게파님의 질문을 요약하자면,

질문) 성공회에 고파와 저파가 있다는데, 이것은 신학적인 경향인가? 교단의 분열인가?

이런 것이겠지요?

답변을 시도합니다.

1. 고교회와 저교회라는 이름

고교회와 저교회는 성공회의 또다른 교단 이름이 아니라, 교회 내의 신학적이며 사목적인 흐름을 대표하는 이름이라고 생각하시면 좋을 것 같군요. 높고(high) 낮음(low)를 나눈 것 자체가 별로 적절하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그렇게 써왔으니 이를 인정하고 풀이하자면 이렇습니다.

성공회는 종교개혁을 통해 형성된 교회이지만, 오랜 그리스도교 전통의 산물을 쉽게 무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방 교회(대체로 로마 가톨릭)에서 발전시키는 교리적인 특징과 예배의 특징을 나름대로 소화해서 갖추고 있지요. 이에 대해서 좀더 분명한 개혁을 요구하는 분들이 있어서 하나의 성공회 안에서는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점에서 옛 것을 좀더 지켜내고자 했던 분들이 이른바 “고교회”(High church)의 흐름을 마련했지요. 하지만 좀더 많은 개혁의 요소를 받아들인 교회들이 많았습니다. 이를 굳이 말하자면 “저교회”(Low church)라고 말합니다. 이는 고교회파 사람들이 붙여준 약간은 조롱조의 어투이지요. 마치 로마 가톨릭이 개신교를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런 것처럼 말이에요.

2. 역사적인 전개

성공회 안에서는 고교회와 저교회의 계속되는 부침이 있었다고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대체로 그 형태는 고교회적인 모습으로 갖추어나갔다고 봅니다. 그러나 정부의 공인 교회로서 국교회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국교회에 대한 비판과 함께 신앙의 쇄신 요구가 대두되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복음주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로 잘 알고 있는 존 웨슬리 신부(이분은 소천하실 때까지 성공회 신부로 남았습니다)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 운동이 가장 유명하지요. 이런 흐름이 자연스럽게 그전부터 있던 저교회의 흐름과 맞아 들어갔다고 할까요? 이 때문에 복음주의라는 이름과 저교회의 성향을 동일시하는 관례가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한편, 이른바 고교회적인 흐름에서도 신앙 쇄신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옥스퍼드 운동으로 알려진 이 운동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깊은 연구와 초대교회와 교부들(신학과 예배, )에 대한 관심, 그리고 보편교회(가톨릭 교회)로서의 성공회에 대한 확신이 중요한 내용이었죠. 이러한 양상은 현대 성공회 신학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현재의 예전적인 모습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들을 성공회 가톨릭(이때 가톨릭은 천주교를 뜻하지 않고 보편교회를 의미하는 것이죠)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신앙 쇄신 운동은 성서와 교회의 신앙에 대한 공통적인 관심과 더불어 사회적인 약자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몸으로 투신했습니다. 두 운동의 지도자들음 모두 신앙에 따른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성공회 사목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고, 성공회의 복음주의와 미국에서 발전되었던 이른바 복음주의와 구분되게 하는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3. 최근의 모습

고교회와 저교회는 이러한 신앙 쇄신 운동을 통해서 성공회 전체의 성숙에 큰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그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른바 성공회 복음주의의 대표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존 스토트 신부나 알파코스를 성공시킨 니키 검블 신부는 이러한 저교회의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고, 신학적으로는 우리나라에도 0여러 책이 번역되어 있는 알리스터 맥그래스(종교개혁 입문, 역사 속의 신학, 복음주의와 교회의 미래) 신부가 대표적인 분입니다. 고교회적인 흐름에서 보자면 유명한 캔터베리 대주교 윌리암 템플 등을 들 수 있겠지요.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고교회 흐름의 영국 선교사들이 초기 선교를 감당한 탓인지, 그런 요소들이 강하다고 할 수 있지만, 최근에 와서는 다양한 흐름들이 소개되고, 우리 안에서 자생적인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회의 약자에 대한 관습과 배려를 잊지 않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의문을 푸는데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된 형제 주낙현 신부 드림 ^^

Written by skhfaq

8월 14, 2001 at 2:3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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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 성직자, 호칭, 복장, 교회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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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 예수 그리스도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질문에 응답하는 것도 제가 큰 도움이 되고 기쁨입니다. 그러니 질문하시는 분에게는 감사할 일이지요. 시간이 부족하지만 기쁜 일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지요. ^^

[김경현님이 남기신 글]

평소에 느끼는 궁금한 점이 여러가지 있는데,

첫째,결혼하신 사제분들도 주교가 되실 수 있는지요?(Orthodox Church에서는 결혼하신 사제들은 주교가 될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사제에서 주교가 될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지요?

성공회는 성직자의 결혼 유무와 관계없이 주교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정교회는 독신 사제만이 주교가 될 수 있지요. 주교의 조건은 한국성공회의 경우 연령과 사목 경험 등의 기준이 있습니다. 이는 물론 나라마다 다르지요. 로마 가톨릭과는 달리 성공회는 교구 의회를 통해서 성직자 대표와 평신도 대표에 의해 선거로 뽑습니다.

둘째, 성공회는 성직자들의 청빙제가 아니고, 교단에서 발령을 내고 부임을 하는데, 이때 한 부임지에서의 임기가 정해져 있는지요? 또한 본인이 원하면 그 부임지에서 평생동안 장기사역을 하실 수 있는지요?

기본적으로 파송제가 한국성공회의 인사방침입니다만, 최근 관구 헌장의 개정에 따라 조건부 청빙제를 허용하기도 합니다. 파송제라 하더라도 교구장과 교회위원회 등과 충분한 협의를 거치게 되어 있습니다. 또 대체로 임지에서 4-5년 정도 머물게 되지만 더 길 수도 있습니다. 더욱 길게 할 수 있는 여지는 있지만 아직 현실적이지는 않습니다.

셋째, 대단히 외람된 질문이지만, 성공회 성직자들의 사례비는 각기 시무 하시는 교회의 재정에서 지급이 되는지요, 아니면 교단에서 일괄적으로 지급이 되는지요? (실례되는 질문인 것 같아 죄송합니다).

이 부분은 제 답변의 영역이 아닌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넷째, 다른 개신교단에서는 성직자를 목사(pastor)로 부르고, 성공회,정교회,천주교에서는 사제(priest) 또는 신부라고 부르는데, 그 개념적,역할적 차이는 무엇인지요?

성공회에서도 역시 성직자를 pastor라고 합니다. 성직자는 기본적으로 목자(pastor)의 사명을 띄고 있기 때문입니다. Priest란 말은 사실 presbyterious(장로, 목사)에서 나온 말이지요. 오히려 사제라는 우리 말이 독특한 것이죠. 이는 신자들의 생각과 의견을 하느님께 고하는 특정한 담당자 역할을 한다는 종교학적인 의미가 강하다고 봅니다. 만인사제설은 이러한 특정집단의 특권의식을 넘어서려는 노력이겠지요. 사실 성공회나 로마 가톨릭, 개신교는 모두 성서에 나타난 만인사제설을 기본적인 사제직의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 안수받는 성직자의 구별이 있듯이 성공회에서도 이 안수받은 성직자의 구별과 역할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신부(Father, 神父)라는 말은 호칭이지요. 신앙을 위한 영적 아버지와 같은 분이라는 의미겠지요.

다섯째, 성공회나 천주교, 정교회의 신부님들은 양복의 윗도리안에 와이셔츠대신 흰색의 플라스틱으로 목을 감싸는 셔츠(천주교 신자들은 로만 칼라 셔츠라고 부르더군요)를 입는데, 그 의미와 유래와 명칭을 정확하게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왜 목사님들은 그 셔츠를 잘 입지 않는지요? (불법인가요?)

이른바 로만 칼라 셔츠(그저 성직 셔츠라고 하지요) 성직자들의 평상복을 간소화한 것이지요. 흰색 속옷에 캐석(혹은 수단)이라는 검정색의 가운같은 옷을 입는 것이 성직자들의 평상복이었습니다. 이걸 간소화해서 셔츠로 개량한 것이라 할까요. 사실 성직자의 옷은 장로교 등 여러 개신교도 착용했습니다. 재세례파의 경우도 비슷한 옷을 입었지요. 외국에서는 개신교의 많은 성직자들이 이런 성직 셔츠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은 감리교 장로교 성직자들이 이 성직 컬러(clerical collar)를 착용하지요. 몇년 전 우리 나라 개신교 일각에서 개신교만의 독특한 성직 셔츠를 디자인해서 보급시키려던 노력이 있었습니다.

여섯째, 이 질문은 주제밖의 질문입니다만, 성공회가 다른 개신교단보다 아름다운 예식과 훌륭한 복음주의적인 전통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개신교단들보다 왜 한국내의 교세가 상당히 미약할까요?(물론, 한국은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역사가 더 긴탓이 주 원인이 되 수도 있겠지만요…), 그렇다면 현재 장로교가 절대적 강자의 위치를 차지하고있고, 장로교적 스타일과 마인드에 익숙한 한국에서는 성공회를 대부분 생소하거나 한국정서와는 맞지않는다는 일부 사람들과, 심지어 일부 장로교인들은 성공회를 이단시 하기까지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보았는데(저는 개인적으로 성공회가 표방하는 신앙노선과 중후한 예식들을 무척 좋아해서 성공회로 옮길 것을 고려하고 있는 중입니다만), 이런 다소 무지하고 비관적인 한국적 상황에서의 성공회의 성장전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요?

말씀하신대로 우리 개신교의 몇가지 경향과 관계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작은 가운데서도 성공회가 한국 사회 안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겠지요. 외형적인 성장에만 치중할 수만은 없다는 것이 성공회의 태도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공회라는 교단 자체의 성장 전망은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합니다. 교회가 몸집 불리기에서 자유롭기에 좀더 복음에 충실할 수 있지 않을까요? 수적인 성장이 곧 복음적이라는 공식이 성공회에서는 낯설군요.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된 형제 주낙현 부제 드림 ^^;

Written by skhfaq

1월 21, 2001 at 12:24 오후

성공회와 복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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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님께서 남긴 내용]

복음주의 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부제님께서는 성공회가 과연 복음주의를 따르고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요 그리고 성공회는 2가지 종류가 있다고 존 스토트 목사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자신은 복음주의 계열의 성공회 성직자요, 다른 종류는 영국국교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요. 한국에 전파된 성공회는 어느 계열인지 궁금합니다.

+ 그리스도 예수님 찬미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선 몇가지 개념을 찬찬히 살피고 생각해 봅시다.

“복음주의”(evangelicalism)란 무엇일까요? 복음주의란 말그대로로만 신앙에서 그 어떤 것보다 복음의 말씀에 충실하자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교회가 복음에 충실하지 않다면 그건 교회로 보기가 어렵겠네요. 그런 점에서 모든 교회는 기본적으로 복음에 바탕으로 한 복음주의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잘못 사용되고 있는 복음주의의 부정적인 혹은 긍정적인 함의들을 탈피하고자, 저는 굳이 “복음적”이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 성공회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에 기초한 “복음적” 교회이지요.

그런데 성서에 대한 해석과 성서의 권위와 위치에 대한 견해가 분분해지면 그런 견해를 가르는 용어가 나타나기 시작했지요. 복음주의네, 자유주의네, 정통주의네 하는 것들이 그런 예이겠지요.

그러니 미카엘님이 말하는 “복음주의”란 그런 몇가지 신학적 혹은 신앙적 경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른바 “복음주의”계열도 그 성격이 너무 다양해서 딱 어떤 것이 복음주의다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의 예전과 전통을 매우 중시하는 어떤 교회는 “예전적이며 복음주의적”인 교회라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굳이 성공회 안의 신학적 신앙적 경향을 거칠게 가르자면 복음주의적(저교회파 low church), 자유주의적(광교회파 broad church , 전통주의적(고교회파 high church) 경향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영국성공회의 존 스토트 신부는 세계적인 복음주의자로 알려져 있지요. 성공회 저교회파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분이지요. 또 알리스터 맥그래스라는 성공회 신부이자 신학자도 성공회 복음주의의 대표적인 분입니다.

자유주의(이 용어는 참으로 오해가 많은데요, 각설하고)적인 성격을 가진 분들이 성공회에는 많이 있지요. 성서에 대한 문학적 비평을 폭넓게 받아들이려는 신앙 형태이지요. 특히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 “상황윤리”라는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견해들로 인해 교회 일치 운동과 교회의 사회 윤리 및 종교 간의 대화가 많이 진척되기도 하지요.

그리고 고교회주의 혹은 전통주의라고 할 만한 경향이 있습니다. 글쎄요 미카엘님이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성공회는 복음주의와 영국국교가 있다? – 이건 좀 억지이고 명백한 오해이네요. “영국국교”라는 말은 Ch of England 영국성공회에 대한 잘못된 명칭인데 – 세계성공회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마 교회의 예전 전통과 교리적 전통을 중요시하는 고교회적 경향을 가리키는 듯 합니다.

한국성공회는 이들 세가지 부류 가운데 고교회적인 성격을 많이 가진 선교사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물론 선교초기이지요. 하지만 이분들은 스스로를 복음적이며, 인간의 학문의 성과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게다가 한국성공회 안에서는 성령운동과 더불어 민중신학적인 입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앙적 성격과 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성공회는 어떤 경향이다하고 딱하니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적인 경향과 형태도 딱부러지게 “당신은 복음주의요” “당신은 고교회파요”라고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사실 고교회적인 경향이 이해한 깊은 영성과 복음주의가 있기 마련이요, 복음주의적인 경향에서 체험하고 있는 전통적인 예전과 예배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있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아쉬움이 있다면, 한국의 교회(개신교며 천주교를 막론하고)는 너무 내편 네편을 분명히 가르려는 것 같고, 쉽게 “딱지붙이기”(labeling)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러다보면 신앙에 녹아든 그 깊은 맛과 의미를 알지 못하게 될 우려가 있지요. 저는 복음주의자를 신앙적 확신에 찬 신앙인으로 보고 존경합니다. 저는 자유주의자를 세상에 대한 깊은 신앙적 고민과 결단으로 살아가는 용기있는 신앙인으로 보고 감탄합니다. 저는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과 교리를 붙들과 그 깊은 의미를 숙고하며 체험하는 신앙인들을 사랑합니다.

저는 어느 편에 서있나요? 모르지요.

주님의 그 넓은 사랑 안에서 주낙현 부제 드림 ^^

Written by skhfaq

1월 21, 2001 at 12:19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