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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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개신교, 근본주의, 교회 분열 등에 대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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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안녕하세요? 당분간 자리를 비우셨군요. 전 그것도 모르고 …
그리고 써놓고 보니 제 글이 창피하게 느껴져서 지웠었습니다.
하지만 제 이메일로 주신 신부님의 답장에 용기를 내어 다시 올립니다.
깔끔하게 수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다시 올립니다.
이 사이트가 앞으로 계속해서 뜻깊은 공간이 되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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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은 이름만 반반한 ‘중도’이기보다는 ‘혼란과 딜레마’의 길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저 자신이 혼란과 딜레마의 길을 걸어왔고, 어찌보면 대부분 사람의 삶 자체가 정돈되지 않고 양극단에 처하고 부조리하고 일관성 없는 것이라 성공회 교단 전체에 대하여 그러한 이상 내지는 이념의 완전한 실천을 강요하는 것은, 그럴만한 자격도 없고 또 부적절한 일이라고 봅니다.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성공회든 그 제도(‘제도화된 종교’라는 말도 있습니다만)를 운영하고 실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기에, 어찌보면 어린아이가 걸음마 하듯이 뒤뚱대고 지척이며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성장의 과정 속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엉성하고 다소 편협한 문제 제기를, 신부님께서 직접 정돈하셔서 열려 있는 답변으로 내어놓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명색은 가톨릭 신자이지만, 그 본성(?)상 프로테스탄트적인 기질이 몸에 밴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외견상 제도적으로 완전히 구비된 안정성, 다양한 수도회 카리스마, 독신이라는 형태로 표현되는 완전한 봉헌 그리고 성화(聖化) 등 가톨릭의 화려한 외모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복음적 가치를 급진적으로 실현(제게 있어서는 무교회주의, 이는 정치적 무정부주의와 일맥 상통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하는 내용적 면에서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갈망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이 양극단에 짓눌려 있을 때 제게 새로운 비전을 열어 주는 제3의 길은 어쩌면 숨통을 터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중도’보다는 ‘합(合, synthesis)’을 바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하늘나라에 가면 찾을 수 있겠죠.^^ 하지만 저는 ‘하느님 나라’를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선포하시고 가르치셨던 예수님의 그 갈망이 예수님의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제가 찾는 것은 어떤 흠 잡을 데 없는 교회인 것 같지만, 사실은 진리(veritas)와 정의가 온전히 구현된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셨기에 그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가장 먼저 기도하셨고 그래서 겨자씨 같은 미미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나라의 건설하는 위대한 일을 몸소 시작하셨다고 봅니다. (그것은 물론 여러 제도 교회에서 얘기하듯이 기독교의 전파나 원주민의 개종이 아니겠지요. )

이러한 갈망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다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기도야말로 이런 인류 전체의 갈망을 대신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제적 기도의 전형이 아니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제가 근본주의를 비판했지만, 사실 그러한 신앙 체계 내지는 양식이 제게 크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대로 부정할 수 없는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중세 시대 성 프란치스코나 사막 교부시대 성 안토니오 같은 사람들은 성서를 글자 그대로 믿었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리고 자기에게 들려오는 그 말씀을 어떤 신학적인 반성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온 몸으로 체현한 사람들 아닙니까? 저 자신 슐라이어마허가 말하는 “무한한 존재에 대한 감수성과 취향”을 근본주의 교단에서 얻었습니다. “종교 고유의 특징은 신비스런 체험, 영원의 세계에 감동됨이다. 종교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그러니까 천상적 섬광인 바, 이것은 경건한 영혼이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에 감동될 때 발생하는데, ‘종교의 거장들’은 이러한 종교 체험을 언어 등을 통해 직접 표현하며,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전해준다.”(한스 큉, 그리스도교, 분도출판사, 856쪽)

저는 그때 정말 순수하게 믿었고, 그러한 체험은 그러한 분열되고 깨어지지 않은 믿음에 대한 그분의 선물이었다고 믿습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체험에 그대로 머물 때, 다시 말해 개인적 체험을 절대화하고 그 달콤함에 중독될 때 근본주의의 폐해는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보다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러한 체험(관상)을 전할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반성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전반적으로 왜곡된 사회구조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전망을 얻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좀 뒤죽박죽이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식으로 ‘대화’해 본 적이 없어서… 신부님이 주신 글에 대한 답글이라기보다는 제 넋두리가 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이걸 말하려면 저게 생각나고 저걸 말하려면 이게 생각나서 어디서부터 가닥을 잡아야 할지… 정말 혼돈과 딜레마에 빠져 있는 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드리는 것 같아 민망하네요. 신부님이라면 어떤 얘기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앞으로 이 게시판을 자주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생각을 정리해서 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할 얘기들이 많을 것 같거든요. 신부님의 답장을 기다려 봅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글을 살려서 올려주셨으니, 개인 메일로 보낸 편지였지만, 저도 그냥 살려서 여기에 덧붙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개인 메일로 보내는 것과 이런 공개된 게시판과 올리는 것이 사뭇 다른 인상이 드는 군요. 뭐 어쩝니까? 이미 뱉어낸 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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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평화

지난 번에 게시판을 통해서 주신 글 잘 받아 읽었습니다. 그 이후 곧바로 어떤 회의에 2주일 가까이 참석해야 했기에 게시판에 답글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 참에 다시 찾아와 보니 글을 지우셨더군요.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해서 답장을 해야지 하는게 이렇게 늦어졌습니다. 짧게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님께서 하신 말씀의 대부분을 동감하고 있습니다. 특히 근본주의의 문제는 매우 상당한 도전으로 다가오는데, 제 자신이 근본주의를 매우 싫어하는데다가, 여러가지 경험을 통해서 그 폐해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는 종교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형태의 신념 체계와도 맞물려 돌아가기가 일쑤입니다.

성공회에 관련해서만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아무래도 성공회가 최고의 이상적인 교단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성공회는 그래서 스스로를 언젠가 사라져야 할 교단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일치가 이뤄지는 날, 이 분열을 극복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소망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그 벽을 허무는 순간을 위해서, 그 사라짐을 위해서 전력질주하는 것이 성공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품어왔으면서도 성공회가 내내 독자적인 교단을 고수해왔던 것은 다름아니라 성공회가 근본주의적 태도들과 대결해왔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 가톨릭이나, 퓨리탄 중심의 개신교 사고 방식은 성공회가 보기에 하나의 사고 방식으로 모든 것을 획일화하려는 태도로 보였고, 그것은 근본적 교리, 근본적 신앙이라는 “근본주의”의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이기에 이를 거부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본주의에는 혼란이 없습니다. 그러나 혼란없는 아주 깔끔한 이론은 실제로 삶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엉성하게 뒤얽혀 있는 것이 삶이고, 내 삶 자체에서도 모순은 이리저리 나를 괴롭히는 실정입니다. 사람들은 바로 그 모순과 당당히 대결하기 보다는, 누군가가 지어준 산뜻한 논리, 혹은 교리, 혹은 어떤 윽박지르는 듯한 신앙 체험을 약처방으로 삼아 그걸 의지하고 살아가기가 쉬운 법, 그래서 (부정적으로 보자면) 종교는 끊임없이 그런 약처방으로 지금까지 버텨오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이것이 종교의 전부는 아니지요.

성공회에 대한 한 생각… 이런 점에서 성공회는 다른 방법을 취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삶의 혼란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 하지만 우리는 다만 하느님을 향해서 길을 걷는 자일 뿐, 진리를 거머쥐고 있다고 자랑하지 않을 것… 다만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가 누구이든지 그들과 함께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며 지치지 않도록 길을 걸을 것…

사람은 지치기 마련인지라, 쉬고도 싶고, 자리에 틀어 앉아 안주하며 집을 짖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성공회에는 개신교의 어떤 모양이 드러나기도 하고, 로마 가톨릭의 어떤 양상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그 여정 가운데 하나이니, 앞서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리 쉴 터는 항상 필요하니까요. 다만 자리 틀고 앉아서 길 걷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비 걸며 털석 주저 앉으라며 가던 길을 포기하라고 권유하진 말았으면 하는 것이지요 ^^

아침에 일어난 상념으로, 편안하게 적어봤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7월 3, 2004 at 2:57 오후

성공회에 대한 많은 질문 – 답변의 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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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대학교3학년 학생인데
이곳을 알게 되어서 찾아와보고 몇가지 질문과 답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저희 집안은 개신교 가정이고 저도 개신교(장로교)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제가 다니던 교회에서 상처받은 후로는
아직까지 딱히 섬길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인’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그저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한때 장로교회를 열심히 아끼고 섬기면서는
꽤나 배타적이고 보수적인(보수적이긴 천성인가 봅니다 허허..) 사람이었는데
교회문제로 1년 넘게 방황하면서 유명하다는 교회, 큰교회, 작은교회
천주교회와 성공회까지 두루 다녀보면서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고 지금은 동네 성당에 나갈 때도 있고
새 교회를 나갈 때도 있습니다.

젊으니까 그런 욕심이 있지요.
정말 좋은 공동체에서 훈련받고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고
많이 배우고 그럴 수 있는 곳에 안정적으로 있고 싶다고.
물론 제가 가진 은사들로 마음껏 섬기고픈 마음도 가득합니다.

한마디로 마음껏 신앙에 대해 배우고 나누고
헌신하시는 분들 곁에서 본받고픈 마음이 간절합니다.

성공회에 대해서는 학교에서 교양수업으로 서양기독교사를 들을 때
발표를 하기도 해서 나름대로 그 정체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바가 있는데요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은,

우선, 대한성공회는 제가 알기로 고교회파가 우세한 것 같은데
전례와 전통면에서 보수적인 교회가 어떻게 가장 진보적인 교단이라는 평가도
함께 얻고 있는 것인지, 내부에서 어떻게 조율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로마가톨릭에서는 얼마전에 시노드가 열렸었더군요.)
신자로서 관심두는 점은 본당공동체가 항구적인 사목지향성 없이
신부님의 성향에 따라 운영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되기도 하네요.

둘째로는, 여기에 없는 것 같은데
대한성공회에서는 ‘그리스도교인의 제사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 것인지, 사목규정 같은 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천주교의 상장례 관련 부분의 신학적 토착화 노력은 인정합니다만
신자들의 ‘대사(면죄)’문제와 관련하여 연옥설을 이해하기 어렵고
개신교에서 권하는 ‘추모예배’도 이미 그 명칭에서 알 수 있듯
도대체 예배는 주님께 드리는 것인데 ‘추모’는 죽은이이고
또 돌아가신 분이 안 믿는 조상이신데 성경에는 지옥간다 했으니
걱정은 되는데(?) 죽은이들 위해서는 기도하지 말라 그러고…
이렇게 신학적 기반과 성찰이 없는 것도 안타깝고 헷갈립니다.
성공회의 입장은 어떤지요?

셋째로, 성공회에서는 신부님들이 결혼도 하시는데
반대로 로마가톨릭에서처럼 사목을 하면서 독신생활도 유지할 수가 있습니까?
독신사제로서도 별 어려움 없이 사목할 수 있으며 종신까지 그 복지를
교회에서 도와주기도 하나요?

넷째로는, via media를 택하는 성공회의 특성상
신자들도 성공회에서 태어나고 자란 교인들도 있지만
천주교에서나 개신교에서 옮겨온 이들도 꽤나 많은 것 같습니다.
즉, 먼저 그리스도교를 어떤 형태로든 접하지 않고서는
성공회를 이해하고 다가가기가 너무 어렵지 않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예배전례문이나 기도서도 고어투가 많아 어렵기도 하고
신자들의 정체성도 천주교에서 온 신자는 성만찬을 천주교의 희생제사
그대로 이해하고 있을 수 있고
개신교에서 온 신자들은 일부는 그저 예식이 아름다워 올 수도 있고
여하튼 성공회의 정체성이 너무 복잡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유, 제가 워낙 말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습니다.
너무 무슨 ‘질의서’처럼 썼는데요 무례했다면 용서해주십시오 신부님.
쓰면서도 생각해보니 그게 바로 성공회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신자들 머릿수보다, 어디로 도망(?) 못가게 붙잡아 두려는 것보다
쉽게 비판하고 비난하기보다 좀더 기다리고 바라보는 교회 말이지요..

저도…교회사에 관심이 많고
교회간 대화와 연합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렇게 방황기를 주시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외롭기도 하고 힘드네요.

내일이 주일이네요.
복되고 기쁜 주일 되시길 바랄게요.
시간 되시는대로 천천히 답해 주세요. 바쁘실텐데..^^

그럼 안녕히 계세요 주 신부님!

+ 주님의 평화

박경준 형제님, 좋은 질문 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박경준님의 개인적인 “방황”은 그저 한낱 방황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해가는 하나의 “순례”와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방황한다고 스스로를 탓하지 마시고, 그 순례와 신앙의 여정 속에서 하느님을 늘 새롭게 발견하고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좋은 질문 주셨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 여러 답변 가운데 하나의 시도, 혹은 제 경험에 따른 생각을 전하고 함께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신앙의 여정 속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대답은 다양하고, 그 깊이 또한 깊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답변은 아래의 모든 답변들과 같이 하나의 시도요, 계속되는 여정의 한 길목에서 잠시 정리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저는 이것이 신앙적인 문제에 대한 성공회적인 답변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변하지 않는 확고한 답변을 줄 수 있다는 태도와는 좀 거리가 있는데, “확실성에 대한 믿음”은 때로 사람들의 다양한 신앙적 경험과 여정을 손쉽게 재단하고 단죄하는 위험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신 질문 네 가지에 대해서 하나씩 설명해 보겠습니다.

Written by skhfaq

10월 5, 2003 at 1:08 오후

천주교와 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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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이 천주교인을 욕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물론 천주교도 그렇고 개신교목사에게 물어보면 천주교나 성공회나 다 마리아만을 믿는종교라고하고 거기에는 구원이 없다는 싸가지(?)없는 말을 합니다.

보수적이고 배타적인것은 오늘날 한국가톨릭교회가 고쳐야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유독 개신교인들은 그것이 훨씬심한것 같습니다.
원인이 뭘까요??

[강형석님의 답변]

제가 짦은 지식으로 이야기 하면 교회교육이 문제가 아닐까?….생각합니다. 천주교가 마리아를 믿는다라고 하는대 그런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공경한다고 할까나요….그리고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린다고 생각하는대…

마리아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하는 거지요.. 왜 우리도 살아있는 사람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하듯이요… – 성공회도 이런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 죽은사람과의 통공이라고 표현하든가….문제는 교인의 초점이 그리스도 보다는 마리아에게 맞추어서 기도를 한다는 점이 문제가 되는 거지요…-성인공경도 이런식이죠-

성공회는 뭐 수녀님 빼고는 묵주기도를 거의 안하고 마리아에게 그런 기도 하는 삶도 없다 보니…..거의 있는둥 마는둥…부활절에나 좀 하나….

그리고 마리아를 경배한다고들 하는대…공경한다는 표현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천주교가 드리는 훔숭하는 것은 그리스도 이지요…

좀…교회가 오래되어서 미신화되어서 천주교 신자들 중 많은수가 “예수의 어머니께 기도하면 더 잘들어 주지 않겠느냐?”면서 마리아 열풍이 불었다고 보면 될까요….

그러다보니 천주교 교회중 어느교회는 십자가 보다. 마리아상이 성당 제대에 크게 올려지기도 하는 사태가 벌어지더군요…
이런 일을 보고 개신교가 가만히 안있는 거지요..어처구니가 없는것은…개신교는 이런 불쌍한 이단을 구재한답시고 천주교인을 교회로 끌어오는 법에 대한 책자까지 나와있다는 사실이지요.

종교계혁을 단행한 루터나 칼뱅이 교회의 분리를 주장한것이 아니라 개혁을 요구했다는 점을 이저 먹은 것이지요..비록 해어지기는 했으나 모든 교회는 하느님은 몸된교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주님의 평화

천주교와 개신교의 갈등은 여러 원인이 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요.

어쨌든 이에 관해서는 이 게시판 아래에
“유진”님께서 올리신 질문과 그에 대한 제 답변을 참조하셨으면 합니다.

또 검색 명령어를 이용해서,
“마리아”에 관한 교회 간의 논란 등에 대해서도 알아보실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

[김가브리엘님의 댓글]

+샬롬!

이해가 갑니다. 그것이 바로 교단이기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주교의 이단성은 이미 알다시피 1.교황무오설 2. 마리아숭배설등으로 요약할 수 있고 이에 항거해 개혁한 개신교단은 1. 돈 2. 섹스 3.권력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그러면서 너는 뭐를 믿어 이단이네 너는 뭐를 잘못해 이단이네라고 상대를 비방할 뿐입니다. 그곳에 내 탓이요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상대방 잘못만 늘어 놓습니다.

이게 한국 교회 교인(천주교+개신교)들이 교회에서 잘못 배운데서 나온 이기주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이기주의로 그리고 국가이기주의로 빠져가고 있습니다. 종말은 얼마 남지않았다는 것을 이 현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느 교단을 믿던 예수를 믿어 죄를 자백하고 성령을 받아 성령의 열매를 맺어 가는 사람은 구원에 이를 것이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평안하십시요.

[형제님의 댓글]

+찬미예수님!

이 문제에 대해서 오래간 생각해온 사람으로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천주교에도 잘못이 있다면 개신교에도 있고
천주교가 하느님의 기뻐하시는 교회라면 개신교도 그러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쩌면 상호보완적이기까지 합니다.

전혀 무관해보이고 서로 싸우기도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느냐구요?
우리는 티격태격 하지만 하느님이 보시기에는
누가 특별히 더 옳으냐 누가 덜 옳으냐 하는 문제는
그야말로 도토리 키재기 같아 보일 것 같습니다.

두 교회가 상호충돌하는 부분들은 광범위한데
사실 그런 논쟁들의 정확한 답을 다 아시는 분은 하느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개신교회는 16세기 종교개혁 이전까지의 구원 사역이
로마가톨릭교회를 통해 이루어져왔음을 인정하고
초대교회 이후로부터 16세기에 이르르기 까지 그리스도교회가
소멸되거나 붕괴하지 않고 나름의 적응과정을 통해
전 유럽의 ‘국교’가 되었갔다는 사실, 그런 과정에서
인간으로서 저지를 수 있는 오류도 있을 수 있고
부정부패나 일부 교리의 변천도 있을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개신교회도, 특히 한국개신교회도 한국선교100주년을 넘기면서
얼마나 다르게 변화되어 왔는가를 생각해본다면
AD33년 이후로 AD1517년에 이르기까지 로마가톨릭교회가 성립하고
세계종교가 되기까지 변화된 역사와 전통을 충분히 이해해야 합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교황을 정점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교황이나 교황청은 이제 중세처럼 부패하거나 타락하지도 않았고
교회의 분열을 중재하고 교회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며
그 부분에 있어서는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한국개신교회가
잘 음미해 보아야 할 부분입니다.
그러나 교황제도 자체가 꼭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교황제도의 성립에 대해서는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인 한스 큉이 쓴 ‘가톨릭교회'(을유)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종교간 대화’ 및 교회일치 차원에서
개신교와 여러 노력을 하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 교황 요한바오로2세의 강경한 태도로
그 방향성이 표류하고 있습니다.

아마 로마가톨릭교회의 근본입장은 여전히
개신교회는 ‘돌아와야할 형제교회’라는 입장인 것 같습니다.
즉 개신교회를 통해 주님이 역사하신 부분들은 거의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로마가톨릭교회는 제가 쓰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교’의 한 부분으로서 로마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회이고
그 외에도 그리스(러시아)정교회가 있고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을 주축으로 하는
개신교회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로마가톨릭교회’만’이 그리스도교회의 전체라고 생각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를 파문하고 갈라져 나갔던 동방그리스도교회에는
로마교회가 초대교회의 4대 교회 중 단 하나일 뿐이었으며
그 나머지 3대 교회와 사도들이 열심히 일군 소아시아의 여러교회들도
모두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역사적으로 로마교회는 스스로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동방교회가 이슬람세력과 중앙집권화되지 못한 국가들 사이에서
표류한 관계로 그 교세가 무너진 것임을 기억해야 하고
로마교회는 애초에 초대교회의 원산인 예루살렘과 소아시아 지역에서도
꽤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시작하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로마교회는 많은 위기 속에서도
교황제도의 수립을 통해 중세에는 교황국가까지 이룩하면서
많은 노력을 다해왔음을, 정신적인 세계교회의 지주이며
식민제국 시대를 거치면서 전세계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는데에도
많은 선교사들과 순교자들을 내었음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
높아지기보다 낮아지시려 했고 결국 십자가를 택하신 주님에 비해
강대한 권력, 넓은 영토, 전쟁과 살육도 마다않았던 방법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로마교회가 반성해야 할 부분인 것입니다.

한국천주교회는
한국개신교회 제 교단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종교간 대화’라는 이름으로 불교계와 보조를 맞추었다면
그에 비해 ‘폐쇄적, 배타적’이다 비난받는 형제교회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천주교회의 훌륭한 장점들을 함께 하여 사회의 빛을 더욱 크게 비추고자
노력해야 했을 것입니다. 물론 개신교회가 워낙 교단이 많아
‘하나의 교회’에 익숙한 천주교로서는 대화하거나 연합사역을 이루기가
영 힘들다 할지라도 서로 배워야 할 점들을 먼저 보려고 한다면
‘일치’는 어려워도 ‘연합’은 좀더 쉬우리라 믿습니다.

특히 악명높았던 마녀사냥이나 종교재판,
신앙의 이름으로 행했던 ‘성바르톨로뮤 대학살’등, 역사가 긴 만큼
지었던 실수도 많았음을 주님 앞에 통회하며 가슴 아파한다면
모든 것이 좀더 쉬워지지 않을까요.

이러한 우리의 구구절절한 실수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당신의 몸된 교회들을 사랑하셔서
오늘도 우리를 용서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를 사랑하시고 칭찬하실 부분들도 살펴보면 많을 겁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천년의 머리에 들어선 우리는
주님이 오시기 전에 우리의 싸움을 마무리 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일에 또 다시 천년이 걸린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서로 다른 것을 찾아내려 하기보다 서로 비교하기보다
서로 같은 모습을 찾는다면, 천주교와 개신교 간에 찾을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더구나 한국교회는 유럽에서와 달리
서로 전쟁까지 한 것은 아니잖습니까?
세계교회의 모범이 될 만한 선한 것이 충분히 나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은 세상,
같이 노력해 봅시다…

평화를 기다리는 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Written by skhfaq

9월 11, 2003 at 12:57 오후

천주교와 개신교의 대립, 그리고 성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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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신부님. 밴쿠버에서 일전에 질문드린 유진입니다.
먼저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요즘 학업때문에 많이 바쁘시겠군요. 저는 인터넷에서 한글을 쓸 기회를 갖기가 쉽지 않아서 저번응답에대한 감사의 인사를 못드렸습니다. 죄송 합니다. 늦게나마 질문의 성실한 답변에 감사 드립니다. 신부님의 답변이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또 궁금한게 있어서 질문 드립니다. 시간이 닿는대로 상세한 답변 부탁 드립니다.

#질문: 왜 천주교회는 자기들만이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며, 왜 개신교회나 교인들을 업신 여길까요? 개신교회들을 도대체 교회로 인정하질 않던데, 그건 크리스챤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오만방자함이 아닌가요? 그런 태도를 보이는 천주교인이나 천주교 관련 웹 사이트들을 보면 심히 불쾌 하군요. 우리도 고대 에큐메니칼 3개의 신조로 신앙고백을하고, 성삼위 일체를 믿는데, 왜 교회가 아니며, 왜 구원이 없다고 하나요?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축소시키고 변질시킨 잘못된 복음을 가르치고 있지 않나요? 희생제사로서의 성체성사등의 가르침은 명백히성경의 가르침과는 틀리지 않나요? 또한 그들의 의인론은 전적인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라, 인간의 행위가 개입된 Semi-Pelagianism또는 Synergism을 가르치고 있지 않나요?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변질이며, 그것을 선포하고 가르치는한 그들이 잘못된 교회 같은데….. 여하튼 심히 불쾌하고, 머리속이 어지럽기도 합니다. 이에대한 답변을 꼭 부탁 드립니다.

그럼 부디 학업에 좋은 결실이 있으시길 기원하며,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주님안에서 유진 올림.

+ 주님의 평화

아주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줍잖은 답변이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매우 기쁩니다.

몇달 전에 포틀랜드에 잠시 날아갔다 온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좀더 가면 유진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지요.

다시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질문이라기 보다는 안타깝고 슬픈 질문이라고 해야 할까요?
평화와 화해를 바라는 종교 안에서,
그것도 사랑과 평화를 통해서 구원 역사를 이루신 예수님을 함께 믿는 사람들이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는 것은 매우 슬픔을 떠나서,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현대 교회는 교회의 분열에 대해서 몹시 가슴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세기는 그동안의 분열에 대해서 하나의 “죄”로 인식하고,
갈라진 교회들 간의 상호 이해와 일치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성공회를 필두로 해서 많은 개신교들이 이러한 교회 일치 운동(에큐메니칼 운동)에
적극 참여했지요. 물론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천주교)도 여기에 자극을 받고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진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여전히 여러 교회들은 이러한 분열을 그대로 답습하고,
분열을 통해서 다른 교회에 대해서 배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자기 교회의 정체성을 찾으려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볼 때 매우 유아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지요.

세계적인 수준에서 그리스도교의 일치 운동이 진전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한국의 상황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개신교의 분열은 더욱 심한데다,
같은 서방교회 전통 안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에 뿌리를 대고 있는
개신교가 천주교를 손쉽게 이단시하는 태도들은 매우 볼썽 사납습니다.

천주교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개신교를 “갈라져 나간 형제”라고 나름대로 “격상”하다가도, 최근에는 이러한 태도에서마저 후퇴하여 개신교회들과는 대화조차 않으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이는 최근 로마 가톨릭 교회가 보이고 있는 보수로의 회귀에 기인한 바가 큽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배타적인 태도가 여기에 덧붙여져 있는 듯합니다.

천주교가 한편으로는 종교 간의 대화를 부르짖으며 한국의 전통 종교 등과도 활발하게 이야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같은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는 다른 개신교회에 대해 유독 배타적인 것은 매우 모순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고, 천주교가 선도하는 듯한 종교간 대화에 대한 의구심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전 세계적인 성향은 분명히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이 여기 버클리에서 공부하면서, 가톨릭 학교에서도 수업을 듣고 이런 문제로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만, 의식있고 깨어있는 분들의 태도들은 전혀 다르지요. 아마도 천주교회의 개별 교회 현장에서는 자기 정체성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여전히 이런 태도들을 가지고 신자들을 교육하고 있고, 또 그렇게 믿고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누가 먼저냐 할 것없이, 자신의 정당성을 배타적으로 주장하려는 개신교 일각과 천주교 일각의 태도는 분명히 복음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런 태도들이 한국에서 여전하고, 특히 외국에 있는 한인 교회에서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는 소식을 들을 때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유진님께 한가지 조언을 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성공회는 그동안 이러한 분열과 대립에 대해서 화해를 만들어가는 일을 자임해왔습니다. 여기에 우리 교회의 정체성이라면 정체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태도 안에서 자칫 성공회가 특성없는 교회처럼 보일런지 몰라도, 그래서 성공회만을 배타적으로 주장하고 싶더라도, 이러한 유혹을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우리 자신을 반성해보고,
또 다른 개신교나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우리가 배우고 따라야 할 것들을
오히려 존중하면서 경청해준다면, 새로운 길이 열리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염려하고, 그 치유를 위한다면, 바로 이러한 상호 배움과 경청을 자발적으로 하는 교회가 하나쯤은 있어야 합니다. 저는 바로 여기에 성공회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공회는 전혀 다르게 “성찰”하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공회 신자는 좀더 복음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너그러움”과도 통하는 구석이 있지요.

잡담처럼 들리는 답변이지만, 널리 헤아려 주십시오.
좀더 많은 대화를 통해서 함께 더욱 큰 그릇을 만들어 봅시다.

주님의 크신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

Written by skhfaq

1월 24, 2003 at 12:41 오후

천주교 성공회 개신교 성직자에 차이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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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신부님과 성공회신부님의 차이점이 있을까요?

차이점은 없길 바라는데.

혹시 있으면 가르쳐주세요

이런 질문해도 괜찮을지는 모르겠지만…..

+ 주님의 평화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대단히 난해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우선 이렇게 말해보지요. 우선 차이점을 말하기보다는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성직자는 교회를 위한 봉사직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그리스도교회의 성직자는 천주교이든, 성공회이든, 다른 개신교이든 차이가 없습니다. 여기서 차이를 요구하면 오히려 그 교회는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이런 공통점 아래서, 성직에 대한 이해의 차이, 그리고 그 실천에 대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천주교와 성공회는 그 사제직의 실천이라는 구체적인 모습에서는 별 차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제직”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다릅니다. 그리고 개신교 안에서도 성직자 혹은 목회자에 대한 이해가 그 교단의 전통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그리고 그 다른 이해 때문에 그 실행에 있어서도 차이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런 이해의 차이에 대해서는 다른 질문에 대한 답변 속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사제직”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해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

Written by skhfaq

7월 29, 2002 at 11: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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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하며 살아갈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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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형 wrote :

알렉산더 히슬롭의 ‘두 개의 바빌론’, 랄프우드의 ‘로마 카톨릭 주의의 정체.’같은 책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그들은 고고학적 방법을 이용해 천주교의 모든 것이 바빌론 우상 종교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성서와는 정반대의 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글쎄요? 어려운 질문이군요. 유익한 질문이기도 하구요. 저는 우선 세상에는 무시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도 있다는 뭐 그런 주의네요. 사실 종교와 신앙의 양태는 너무도 다양해서 어떤 하나의 모습으로 그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개신교가 그처럼 분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다양성의 표본이날까요? 그런데도 좀더 다른 것에 대해서는 쉽사리 인정하려하지 않은 배타주의가 있지요. 자기 모순에 빠지기 쉬운 태도라고 봅니다.

그런 책을 읽으면서 고민이 되면 더 탐구해도 좋을 것입니다. 함께하는 신부님이나 수녀님께도 여쯉기도 하구요, 그런 일방적인 비방섞인 책보다는 그리스도교 간의 대화나 종교 간의 대화에 관련된 책을 통해서 그 중심을 잡아 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사실 저는 그런 책들을 “선정적인” 것이라고 보는데, 그런 류는 별로 정신 건강이나 신앙 성숙에 도움이 안되지요.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일겁니다. 다만 천주교가 그동안 보여왔던 몇가지 행태들이 오해를 살만한 무리한 것이었다는 점을 또 인정하는 것도 중요한 태도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천주교 신자로서 천주교를 비판하고 그의 파문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천주교 신자로 남아 있는 한스 큉과 같은 신학자를 대단히 존경합니다. 성공회도 잘못이 많지요. 사람이 만들어 낸 그 교리와 행태에 잘못이 없을까요?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그런 사실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저는 천주교 신자이지만, 성공회에도 피해가 있을 것 같아서.

우선 열린 마음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무엇보다 도형님의 신앙 전통(천주교) 안에서 체험한 깊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고백하고 살아가면 된다고 봅니다. 설명은 차후의 일이 아닐까요? 그리고 천주교 안에서도 역시 개신교를 향하여 “열교”니 “갈라져 나간 형제들”과 같이 자신의 우월성으로 우쭐거리고 개신교를 열등하게 보는 천주교의 태도들에 대해 비판적이 되었으면 합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그런 우쭐거림에 매우 비판적이셨거든요. 무엇보다 자기 성찰이 신앙 생활에 더 유익하다고 봅니다. 남을 비방하는 것보다. 그러니까 한 수 위에서 놀면 되지 않겠어요? 답변이 됐나요?

주님 안에서 하나된 형제 주낙현 부제 드림 ^^;

Written by skhfaq

1월 23, 2001 at 1:0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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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과 구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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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 그리스도 찬미

답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간단하게 답변을 “시도”하자면…

김성호 wrote :

이번에 알고 싶은 것은 성공회의 인간관과 구원관 입니다.

제가 알기로 가톨릭에서는 인간 타락을 부분적 타락으로 이해하고 그래서 인간의 자기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고(선행을 통한), 개신교에서는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했으므로 하느님이 은혜를 통한 구원만이 가능하다고 이해하는 줄로 압니다. 성공회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알고 싶군요.

글쎄요.. 제가 알기로는 천주교의 기본적인 구원론이 “인간의 자기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는 성호님의 생각에는 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직 천주교의 다른 교리서를 찾아보지 못해서인지 몰라도 기본적으로는 천주교도 “인간의 자기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뒷부분에서 물으신 인간의 타락과 상태에 대한 이해에서 천주교와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 사이에는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성공회는 장로교를 이끌어낸 칼빈과 같은 분의 “전적 타락”이라는 용어를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본성까지도 죄로 오염되어 있으며, 인간 자신의 자연적인 힘과 선한 행위로만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의롭다고 인정받는 일)에 놓일 수 없다고 봅니다. 선행 자체가 우리의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며, 우리를 그분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기 때문입니다. 아마 천주교에서 말하는 선행은 바로 이러한 은총 이후에 지속되어야 할 신앙인의 덕목이요 윤리이지 구원의 조건은 아닐 것입니다. 이 점에서 천주교는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거나, 교리적인 가르침과는 달리 평신도들의 오해가 많은 것 같습니다.

성공회에서도 ‘익명의 크리스챤’을 인정하나요?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로마 가톨릭의 예수회 수사이셨던 칼 라너 신부님의 신학적 주장의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천주교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논란은 남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교황청의 교리성성에서는 칼 라너 신부님의 주장을 경계하라는 칙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성공회라는 교단이 신학적으로 인정하느냐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변드릴 수가 없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칼 라너 신부님의 신학적인 성찰과 주장들이 성공회의 기본적인 신학적인 태도와 가깝다고 생각하고, 저도 그분의 통찰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공회 성당을 처음 찾는 사람이 사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나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면 알려주셨으면 좋겠네요. 성공회에서는 개역 한글판 성경을 보는지 공동번역 성서를 보는지도 알려주세요.

성공회에서는 1977년 한국 개신교와 천주교가 세계 최초로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를 공식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개역성서나 최근에 성공회를 포함한 개신교측에서 새롭게 번역한 “표준 새번역성경”(1993)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식 예배와 기도를 위한 성서는 “공동번역 성서”입니다.

성공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려면 성서와 아울러 “미사예문”(1982)이 필요합니다. 성공회 기도서인 “공도문”(공동기도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성공회 성가(1990)을 준비해야겠지요.

다시 한 번 부제님의 진실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훌륭한 사제가 되시도록 기도로 함께 하겠습니다.

계속적인 관심과 좋은 질문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저를 위한 기도에 힘입어 항상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성직자가 되도록 성찰하며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안에서 한형제 주낙현 부제 드림 ^^

Written by skhfaq

1월 23, 2001 at 12:59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