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an Korean Anglican FAQ blog

Posts Tagged ‘가톨릭

니케아 신경 – 3. 보편적 교회의 교제

leave a comment »

우선 이와 관련해서 용어의 사용에 대한 이해가 우선해야 합니다. 신경에서 말하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믿음은, 흔히 말하는 “로마 가톨릭 교회”(천주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개신교 일각에서 “사도신경”에도 “가톨릭 교회”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 이것은 개신교의 신앙 고백으로 적절하지 않다는 매우 심려할 말한 무지가 횡행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이라는 말은 “보편적” “전체적”이라는 의미를 담은 말입니다. 해서 가톨릭을 용어를 사용하고 싶어하지 않는 개신교 신학자들은 CATHOLIC 대신에 UNIVERSAL 이라는 대체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어떤 용어가 되었든 이 생각의 근간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란 점에서 보편적인 성격을 갖는 교회라는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다가 선교를 통한 교회의 확장과 더불어 전체 세계 교회를 아우르는 의미에서 교회의 체제를 지칭하는 것으로 의미 변화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로마 가톨릭 교회는 스스로를 ‘가톨릭’이라고 부를 때, 자신들의 교회 체제가 보편적이고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에 대해서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교회 체제의 전체성이 아니라, 교리의 보편성을 가지고 이에 대항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실제로 교회 체제의 보편성이 가능하고, 교리의 보편적인 동의가 가능한 것일까요?

“하나인 교회”에 대한 생각과 닿아 있는 이 문제 역시 좀더 넓은 시각을 요구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이는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앙인들이 서로 다른 의견과 삶의 형태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는 가운데 사로 협력하고 교제하는 것에 대한 꿈이라고나 할까요? 혹은 그렇지 않은 현실에 대한 도전이라고 보아야겠지요. 다양성은 늘 존재합니다. 그 다양성을 넘어서 우리를 묶어주고 “일치”시켜서 “가톨릭” 교회가 되도록 하는 여정은 이러한 협력과 교제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의 삶이 무엇이었는지를 묻고 그 삶을 현실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공동선”에 대한 성서의 말씀이 이러한 “가톨릭” 교회를 향한 새로운 선교 임무로 들립니다. (로마 8:28, 1고린 12:4-7 을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Written by skhfaq

5월 27, 2004 at 2:40 오후

교회의 분열과 일치 – 누구를 중심으로?

leave a comment »

[가톨릭님이 쓰신 글]

안녕하세요 .. 저는 가톨릭 신자 입니다

본론만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과연 이렇게 나누어진 교회의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 일까요?

여러가지 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희 교회에 교리에 반대?

한다는 근거야 다의적인 의미가 많이 있는 성경에서 찾아서 신학적으로 정립하면 되

는 것이지 않습니까?

여하튼 주님이 세우신 교회의 본질을 제대로 실천하는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예수님을 직접 체험했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을 조금이나마 더 간직하고 사도들과 여러 성인들의 가르침이 남아있는

있는 교회는 가톨릭(동방가톨릭 포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잘못 속에서도 가톨릭이 구원사업을 행 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성령의 은총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분열되었습니다. 피를 흘렸습니다.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모습일까요?
과연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모습일까요?

사도 바오로도 고린토 교회의 분열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두서없이 어설프게 한 말씀 드렸습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 주님의 평화

“가톨릭”님 안녕하세요? 그리스도교의 분열을 역시 안타깝게 생각하는 그리스도교의 한 신앙인으로서 님께서 말씀하시려는 생각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분열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무엇보다 지난 세기 이후 교회 일치 운동에 가장 헌신적이었던 성공회는 이 아픔을 더욱 크고 깊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분열에 대한 진단의 시각 자체가 서로 다르면, 치유를 위한 처방 역시 다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교회 일치를 위한 대화 속에서 얻는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 교회가 가장 역사적으로 사도적인 교회’이니 ‘이 교단’을 중심으로 일치가 전개되어야 한다든가, ‘이 교회가 가장 성경에 기반한 교회’이니 ‘이 교단’을 중심으로 되어야 한다는 등의 의견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 정교회, 성공회를 비롯한 여러 개신교회들 안에는 이런 자기 주장을 통해서 서로를 설득하려는 움직임이 여전합니다. 그러나 그 전개나 결과는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가톨릭’님께서 주장하시는 대로 로마 “가톨릭 교회(동방 가톨릭 포함)”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의견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오래된 주장입니다만, 정교회(동방교회 및 각 전통의 정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누가 “예수님을 직접 체험했던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을 조금이나마 더 간직하고 사도들과 여러 성인들의 가르침이 남아 있는 교회”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스스로를 그런 교회로 자신할 지 언정 로마 가톨릭 교회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종교개혁은 크게 보면 중세 서방교회 안에서의 자기 개혁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쉽게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종교개혁이란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어떤 특정한 교단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이 속해있던 서방교회 전체 자체 “안에서” 일어나, 성서의 권위를 새롭게 비추어 보고, 그에 따라 교회의 전통을 비판적으로 살펴본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다양한 개신교 형성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전혀 분열되지 않은 ‘정통’ 교회라고 자처하는 동방 교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서방 교회 내의 자기 분열일 뿐입니다. 즉 로마 가톨릭 교회도 하나의 분열된 교회의 일원일 뿐인 것이지요.

교회가 분열하여 서로 싸우고 피를 흘렸던 부끄러운 역사는 자신을 중심으로 어떤 일치건 통합이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 속에서 싹텄습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들은 세속 정치 권력을 이용하고 거래를 했으며, 한 분이신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믿는 다른 형제들을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도륙했던 것이지요. 즉 어떤 배타적 기준에 의한 일치라는 것이 이미 하나의 환상이거나, 동시에 폭력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깨달은 지 오래라는 사실입니다. 서방교회 전통 안에 있는 개신교회가 세월을 거듭해서 분열했던 이유들은 이런 ‘배타적 진리 소유’라는 입장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런 전철을 밟질 않길 바랍니다. 이미 로마 가톨릭 교회는 1960년대 초 바티칸 2차 공의회 이후 이런 배타성의 원리에 대한 반성을 제기하였고, 그 이후 지속적인 교회 일치 대화가 전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무엇보다도 서로를 통해서 복음의 진리, 교회 신앙의 전통을 풍요롭게 배우는 시기였습니다. 이미 1940년대에 성공회를 비롯한 개신교 측의 교회 일치 운동과 더불어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이런 포용성의 원칙을 제공한 것은 그리스도교 역사에 큰 축복으로 남아 있습니다.

님 께서 말씀하신 대로, 교회는 잘못을 통해서도 성령의 은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구원 사업을 쉬지 않고 전개합니다. 그러나 그 성령의 은총을 로마 가톨릭 교회만이 독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자유롭고 넓으신 성령은 그리스도교회 전체의 분열이라는 아픔과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내의 여러 신앙 전통 안에서 그 역사와 그 신앙인들과 그 현장의 삶을 통해서 내내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넓으신 성령님의 활동을 감지하면서, 교회의 분열과 그 아픔을 응시하는 일이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해나가는 일은 늘 “내 탓이오” 하는 철저한 자기 반성을 통해서 더욱 깊어짐과 동시에 다른 이들과의 폭넓은 대화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회의 태도에 대해서만 짤막하게 덧붙이면 이렇습니다. 성공회는 교회 일치와 관련하여 “일치를 위해서 스스로 사라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 기꺼이 사라지길 다짐하는 교회”라는 신념을 그 신앙과 실천 속에서 발전시켜왔습니다. 이 때문에 성공회는 어떤 가능성에도 열려 있는 교회가 되기도 하고, 또한 이런 개방성 때문에 그 모호한 정체성에 대한 비판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회는 최소한 이러한 태도가 교회 일치에 진전을 가져오리라는 확신과 경험을 통해서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길도 성령님께서 인도하시는 중요한 하나의 길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 길 속에서 함께 만나서 이야기하고 걷고 어깨동무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 길만이 옳다고, 이런 걸음자세만이 옳다고, 이런 여행 복장이 옳다고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종종 이런 자기 주장들은 ‘남을 제어하기 위한 내 신념’이었을 망정 성령님의 은총에 나를 맡기는 ‘투신의 신앙’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길 어느 모퉁이에서 다시 만나기를 희망하며,

주낙현 신부 합장

신부님의 글 정말 잘 읽었고 많이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일치라는 것 말은 쉽지만 서로 양보와 희생을 기본 전제의 바탕으로 삼아야 겠지요.

이것이 어려워서 지금도 이렇게 갈라진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렇고 신부님도 그렇고 자신의 교회에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신부님 말씀대로 교회가 누구를 중심으로 일치해야 되는가란 문제는 정말 많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동안은 무조건 저희 교회 중심으로 라는 생각만 앞섰던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그럼 신부님에 말씀을 제 주관으로 해석한다면

(게다가 종교개혁은 크게 보면 중세 서방교회 안에서의 자기 개혁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부님의 말씀 중에서

만약에 성공회가 잘못한점이 있어서 누군가 개혁이 필요하다고 교회를 나간다면
그것은 올바른 행동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감리교는 성공회에서 나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공회에서는 감리교를 자기개혁를 잘한 교회로 보시는 지요???

마 지막으로 교황 선출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의 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봅니다. 신부님이 앞서 글에서 성령의 작용이 어느 교회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황님에 대한 비판의 글은 남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결국 신부님의 성공회 중심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됩니다. 이 점에 대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또 염치 없이 글을 올립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 되기를 기원하며 -엘리사- (제 본명 입니다.)

+ 주님의 평화

엘리사님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제 답변과 다른 글에 대해 의견 주신 것 고맙습니다. 어떤 질문이든 함께 나눠보자는 초대한 것이니 엘리사님이 염치 없을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즐거움이기를 바랍니다.

이 미 많은 이야기를 위에서 했으니, 다시 질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제 생각을 나누고 싶습니다.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교회 일치라는 관점에서, 그리고 종교개혁을 통한 분열이 하나의 자기 개혁 운동이라고 할 때 성공회와 감리교의 분열을 어떻게 보느냐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는 블로그에 올렸던 새로운 교황에 관한 글이 “성공회 중심의 비판”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제가 답변에서 했던 말과 모순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첫째로, 성공회와 감리교의 분열에 관한 것입니다. 앞서 답변에서 종교개혁에 대한 제 나름의 표현을 다시 언급하자면, 종교개혁이란 세계 그리스도교의 견지에서 보았을 때 “서방 교회 내 자기 개혁 운동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엘리사님이 감리교에 빗대어 말씀하신 “자기 개혁이 잘된 교회”를 뜻하지 않습니다. 저는 어디에서도 종교개혁이 “자기 개혁이 잘된 교회”라는 의미에서 그 분열을 정당화하려고 하지 않았으며 그런 생각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 평가는 잠시 접어두고 그것이 하나의 필연적인 “산물”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회 역사 안에서 일어났던 특정 시기의 어떤 신앙 쇄신 운동이 기존의 전통 안에서 충분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감리교가 독립적인 교단으로 발전해 나간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반성이 필요합니다. 그 하나는 이런 자기 개혁의 동력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당시 교회의 폐쇄성에 대한 반성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 개혁 운동의 주창자가 끝까지 성공회 안에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의 추종자들이 교단적인 분리를 택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성공회로서는 당시의 폐쇄성에 대해서 반성해야 할 것이고, 감리교로서는 분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느냐는 반성이 필요합니다. 즉 반성은 서로에게 요구하는 것이기 이전에 먼저 자기 안에서 시작되어야 하고, 그 때에 건설적인 대화가 진행될 여지가 마련됩니다. 결국 세계 각국으로 펼쳐진 감리교와는 달리 정작 영국 감리교는 최근 영국 성공회와 실질적인 교단 통합과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자신에 대한 반성이 아니라 그 시점을 두고 “올바름”을 따지고 들었다면 요원한 일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더 욱이 현재의 우리는 과거 분열 시대의 당사자들과는 다릅니다. 그 분열과 분리의 역사적, 신학적 계기가 동기가 어떠했든 간에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전통을 유지하면서 살아왔고 그 전통의 영향권 아래서 자신의 신앙을 발전시켜왔습니다. 다만 그 발전 속에서 복음과 신앙의 전통 속에서 우리 신앙을 재발견하며, 우리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반성하고 새로운 교회와 선교의 비전을 찾아가며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교회의 일치는 우리가 이미 살아가고 있는 이 전통 안에서 복음을 통한 이러한 개혁의 길 가운데 만나야 할 어떤 것이지, 과거 어느 시점을 중심으로 한 환원 운동이 아닙니다.

교회의 분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열에는 건설적인 분열이 있는가 하면, 파괴적인 분열이 있습니다. 건설적인 분열과 분리는 교회의 일치를 위협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교의 다양성과 복음의 보편성을 아우르게 하여, 결국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파괴적인 분열은 서로에 대한 반목과 질시를 낳고 결국 대결과 폭력을 동반하게 되어 그리스도의 몸을 훼손할 것입니다.

둘째로, 최근 교황 선출과 관련된 글에 대해서는 짧게 답변하겠습니다. 우선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보시라고 권유하는 수 밖에 없지만, 좀더 덧붙인다면 이렇습니다. 그것은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의 신앙인으로서 바라본 하나의 “상념”이었을 뿐입니다. 다만 그 상념의 근거들을 여러 사람들의 평가 – 제가 공부하고 있는 미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 나오고 있는 – 와 더불어 확인하고, 종국에는 어떤 희망을 가져보려는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 많은 미국 가톨릭 신자들의 비판과 실망감을 보면서, 다른 교단의 성직자 한 개인으로서 느끼는 아쉬움의 표출 정도라고 생각하면 좋을 듯합니다. 글 말미에 언급한 것처럼, 그분의 새로운 이름대로 세계와 교회에 “축복”이길 희망할 뿐입니다.

평화를 빌며

주낙현 신부 합장

신부님 이번 글도 정말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인터넷으로 나마 허물없이 대화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교황님에 대한 신부님의 글을 보고 맞는 말씀이지만 제 생각과 다른 부분을 이야기 해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보수라는 의미의 약간은? 부정적인 어조 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판치는 시대로 옛것은 무조건 나쁘다는 의견이 팽배한 세상 입니다. 이 점은 신부님께서도 충분히 동의 하시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진리는 지켜져야 합니다. 진리가 무너질때 세상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진리보다 행위가 앞설 때 역사는 말해 줍니다. 그 결과는 바로 마르크스를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켜져야 할 것은 지켜야 합니다. 단순히 개방 자유. 인간 존중 이라는 논리 아래 지켜야 할 것을 버리는 모습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이겠습니까?
신부님의 의견이 물론 아니시겠지만 성공회의 동성애자에 대한 주교 서품 같은 것은 자유의 미명아래 해서는 안될 것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반성하고 새로운 교회와 선교의 비전을 찾아가며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 라는 신부님의 글은 모순 됩니다.
복음을 강조하면서도 개혁과 진보라는 미명아래 복음 정신에 어긋나는 것들을 주장하는 논리말입니다.

또 한가지 질문들입니다. 성공회는 성찬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임재설을 교리로 가지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임재설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즉 성체를 어떻게 바라보시는 지를 알고 싶습니다. 분명 가톨릭의 성체이해가 왜곡되어 있다고 하시겠지만 성경에 분명히 그리스도에 몸과 피를 나누어 마셨다는 초대교회에 증언이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한 의견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공회는 가톨릭과의 유대성에 따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3단계로 나누어 진다고 하는데 이점에 대해서도 답변 부탁드립니다.
하이 class 로우 class 라는 표현 말입니다.

일치(Unitas)의 출발은 대화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신부님과 대화 할 수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주님의 평화

엘리사님과 이야기가 길어지는군요(^^). 이곳에만 시간을 쓸 수는 없는 처지이니 최선을 다하되 되도록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일 치의 출발을 대화”로 생각하게 되었다니 기쁩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 속에서는 공통점도 발견하게 되지만 극명한 차이점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차이점들을 이미 엘리사님이 지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선 이러한 차이점은 로마 가톨릭 교회 내에서도 천양지차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우선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제가 엘리사님께 우선 바라는 게 있다면 이렇습니다. 어떤 분명한 기준을 두고 분명한 견해를 밝히는 것까지는 좋지만, 그 분명한 기준에 대한 성찰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성찰이 충분하지 않으면 필요 없는 오해가 줄기차게 생겨나고, 결국 자신을 어느 시점 안에 가두고 다른 것을 보지 않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런 예를 들어봅니다. 저는 “완고한 보수주의자”라는 제한된 표현 속에서, 그리고 그런 표현의 선택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 속에서 나름의 생각을 펼쳐낸 것이지, 엘리사님께서 지적하는 것처럼 “보수” 자체를 부정적인 것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지적들은 내내 엘리사님이 가진 선입견 안에서 확대해석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견해나 “진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표현들이 그 예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태도, 그리고 “세상이 무너지는” 증거로 제시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평가 자체가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다양하다는 점을 먼저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엘리사님은 제 말을 인용한 “우리의 삶을 복음에 비추어 반성하고 새로운 교회와 선교의 비전을 찾아가며 스스로를 개혁해야 합니다(Ecclesia semper reformanda)”라는 말을 어떤 모순 어법으로 이해합니다. 여기에는 “복음”과 “진리”를 엘리사님이 마음에 두고 있는 어떤 특정 교리와 동일시하고 있다는 인상이 짙습니다. 교리는 “복음”과 “진리”를 드러내고 소통하기 위한 제한적인 방법이요 표현에 불과합니다. 그러다 보니 역사적으로 교리는 “복음”과 “진리”를 막는 장애물로 등장하기도 했고, 그것을 훼손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오류에서 어떤 교회 전통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또 그런 이유에서 교리는 시대와 상황 속에서 변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리가 변화와 요구와 도전을 용기 있게 받아들일 때 그것은 또한 복음을 드러내는 수단으로서 유용성을 항상 유지하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과 교리의 차이이자, 그 관계이기도 합니다. 이 상관관계의 긴밀한 역동성을 식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성이기도 하며, 또한 우리의 기도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런 식별을 통해서 교회는 교리의 변경을 결정하기도 하고, 잘못된 교리에 근거했던 교회의 생활과 실천을 바꾸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자기 개혁입니다. 이것이 또한 맹목적인 세속적 지배 이데올로기와 그리스도교 신앙이 다른 점입니다.

이런 생각 끝에 저는, 엘리사님이 그리스도교 전통, 최소한 로마 가톨릭 전통 자체의 풍부한 자산들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많은 내적인 대화를 열어가길 권유합니다. 그리고 대화가 깊어가는 과정 속에서 다른 여러 동료 신앙인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엘리사님의 교회 성직자와의 대화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전통의 신앙인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전통에 대한 이해가 폭넓고 깊어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성찬례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는 이 게시판의 다른 곳에서 다룬 적이 있습니다. “화체설”과 “성찬”과 같은 검색어를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질문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성공회 내의 어떤 성향에 대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가톨릭과의 유대성”이라는 말은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기 어렵고, 예전적인 성향과 신학적인 성향에 따라 “고교회” “광교회” 그리고 “저교회”라는 표현으로 성공회 내의 다양한 흐름을 설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내용 역시 검색어를 통해서 먼저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 삶과 죽음과 부활로 보여주신 복음의 길을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만나게 될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그 잡히질 않고 내내 걸어야 할 것을 요구하는 복음의 목소리가 엘리사님을 늘 이끌어 주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 하느님의 넓고 크신 은총이 함께 할 것입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Written by skhfaq

4월 23, 2004 at 3:22 오후

성공회와 성모 마리아

leave a comment »

+ 주님의 평화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그네 wrote :

성모님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있어서 질문 드립니다.

성공회도 성모님을 공경하나요?

성공회는 몇몇 특정한 교리로 통일된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성모 마리아에 대한 견해도 조금씩 다릅니다.

신학적으로나 교리적으로 성공회에서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 – 이것이 신앙의 하위 개념인가요? – 를 보장하거나 확인해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여러 성인들처럼 공경하고 그분의 삶을 화두처럼 여기며 모본으로 삼고 따르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교는 성인들과의 친교(Communion of Saint, 혹은 성도들과의 친교)를 신조 속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성공회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 있는 성인들과 성도들과도 친교를 이룬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그리고 성모님에 대한 교리 중 영원한 동정녀의 교리는 수용합니까?

성공회는 기본적으로 성모 마리아가 동정녀인 상태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이후에도 동정녀로 사셨다거나 요셉과의 결혼 생활을 통해 아이를 낳아 길렀다고 하는 대립적인 주장에 대해 어떤 확실한 말도 하지 않습니다.

또한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마리아의 무염수태 교리나 마리아 몽소 승천 교리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교리들은 19세기 중반 계몽주의의 위협 속에서 천주교가 만들어낸 교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독일에서는 천주교는 다시 구파 가톨릭 교회의 분열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이지만 묵시록에 나오는 창녀 바벨론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구약성서에서 바빌론은 강력한 세속적 힘의 상징이요, 지배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강대국 바빌론에 의해 포로 생활을 해야 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신약시대에 바빌론은 이미 생명을 다한 후였으니, 묵시록에 나오는 탕녀 바빌론은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묵시록에 나오는 음행한 탕녀 바빌론에 대한 언급은 요한묵시록 14:8, 16:19, 17:5, 18:2,10,21 등에 나옵니다. 논란이 있긴 하지만 묵시록에 나오는 바빌론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박해했던 로마와 로마 황제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 로마의 도덕적인 타락이나 황제들의 성적인 탐닉과도 연관이 있어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봅니다.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된 형제 주낙현 요셉 부제 ^^;

Written by skhfaq

1월 21, 2001 at 12:14 오후

성공회에 대해 여러가지 궁금증

leave a comment »

안녕하세요?

저는 부산에 살고 있는 김성호라고 합니다.

천주교 신자인데요, 성공회 홈페이지와 성공회에 관련된 글을 읽으며 참으로 좋은 교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는군요.

특히, 제도교회가 쉽게 빠질 수 있는 교파절대주의에 벗어난 그 넉넉한 믿음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저는 지금 개신교(성결교)에 나가는 자매와 교제중인데요, 그래서 개신교에 관련한 글이나 사이트를 찾아다니며 그 자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려 노력 중 이랍니다.

그런데 대부분 개신교는 천주교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믿음이며 그로인해 순교자적 환상에 쌓여있는 환자(?)들이 많더군요.

그래서 쉽게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적대적 감정만 가지고 돌아선 경우가 숱하지요.

하느님 보시기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전 진정으로 대화하길 원했었는데…

뿌리가 튼튼하다면 가지가 뻗어나가는 것을 괴로워해야 할 이유가 없겠지요.

하느님이 주신 다양한 은사를 서로 나누고 더 풍요로운 신앙의 날들을 가꿀 수 있는 방법도 많은 데…

부제님과 많은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성공회 전반에 관한 것들 그리고 믿음과 신앙 생활에 관한 것들요.

대천덕 신부님의 글을 읽으면서 충분히 가능하리라는 확신도 생깁니다.

부제님께서 가까운 성공회 성당을 소개해 주시면 한 번 다녀볼 생각도 있습니다.

그것이 성공회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먼저 궁금한 점 하나, 성공회가 로마가톨릭에서 분리된 것이 영국 국왕의 이혼문제인걸로 알고 있는데(세계사 시간에 배웠음) 그렇다면 이것은 성공회의 종교 개혁이라는 것이 인간적인 문제 해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런 것이 아니라면 로마가톨릭의 어떤 부분에 대한 개혁의 요구 였는지 알고 싶습니다.

성서 이해의 차이나 신학적 쟁점들로 인한 것이라면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둘째, 현재 로마가톨릭에서는 교황을 가톨릭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교황의 영적 판단에 대해서 순명할 것을 가르칩니다. 성공회에서는 켄터베리 대주교의 위상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성공회 교리를 영국의회에서 판단한다고 하던데요, 이것이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이는 어떠한 근거에서 인정되고 있는지 알고 싶군요. 또 성공회를 영국국교회라고도 하는 데 대한성공회는 영국국교회의 하위관구로서의 위치인지 아니면 하나의 독립적인 관구로서 활동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셋째, 천주교의 성상 숭배에 대해서 많은 개신교에서 우상숭배로 몰아부치는데 이에 대한 성공회의 가르침은 어떠한지, 그리고 성인 공경의 문제에 대해서도 알고 싶고요,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가장 큰 성인으로 모시고 있는데 성공회는 어떤지도 알고 싶습니다.

궁금한게 정말 많지요? 앞으로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처음이라 조금만 쓸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이렇게 됐습니다. 이해해주시길…

그럼 부제님의 답변 애타게(?) 기다립니다.

성공회를 보면서 성공회 신자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는 선교의 방법에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교단의 믿음을 구원의 절대적 조건이라 주장하지 않는 겸손함, 형제들을 이해하는 너그러움, 누구와도 대화하는 열려진 마음 등.

세상의 성공과 주님의 성공은 어차피 같은 영광이 아니지요.

좁은 길이지만 그 길의 아름다움을 알고, 그러므로 그 길을 벗어나지 않는 대한성공회에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런 대화의 장을 열어주신 주낙현 부제님을 위해서도 기도할께요.

김성호 드림

+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찬미합니다.

김성호 wrote :

>저는 주교 신자인데요, 성공회 홈페이지와 성공회에 관련된 글을 읽으며 참으로 좋은 교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는군요.특히, 제도교회가 쉽게 빠질 수 있는 교파절대주의에 벗어난 그 넉넉한 믿음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 성공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좋은 평가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먼저 궁금한 점 하나, 성공회가 로마가톨릭에서 분리된 것이 영국 국왕의 이혼문제인걸로 알고 있는데(세계사 시간에 배웠음) 그렇다면 이것은 성공회의 종교 개혁이라는 것이 인간적인 문제 해결에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런 것이 아니라면 로마가톨릭의 어떤 부분에 대한 개혁의 요구 였는지 알고 싶습니다. 서 이해의 차이나 신학적 쟁점들로 인한 것이라면 그것을 알고 싶습니다.

: 영국성공회가 성립되던 당시는 이른바 종교개혁의 시대였습니다. 서방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 가톨릭교회가 중세를 넘어 16세기에 들어서는 그 타락이 심각했습니다. 그 타락은 복음을 위협할 정도였다는것이 당시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새롭게 출발시킨 교회는 단순히 “분열”이나 “분리”가 아니라 올바른 교회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분열과 분리라는 표현은 로마 가톨릭에서 말하는 용법이 되는 것이지요.

: 개신교 종교개혁은 종교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이 맞물리면서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에서 진행된 종교개혁은 첫 시작에서는 정치적인 면이 강했습니다. 그것이 국왕 헨리 8세의 혼인무효문제(이혼 문제가 아님)가 발단이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정치적이라는 면도 사실 국왕 개인의 욕심과 욕정(많은 천주교인들이 비방하듯이)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과 연계한 스페인이라는 정치 권력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의 성공회의 성립과정은 정치적인 독립과 함께 교리 신학적으로도 로마 가톨릭의 오류들에 대한 반성과 비판으로 길을 잡아갔습니다. 그 내용은 로마 교황의 지배권에 대한 저항, 그리고 중세 교회의 잘못된 교리와 행태들(구원론과 관련된 교리들과 교회 정치, 성찬례에 대한 이해, 성직자들의 타락, 교인들의 무지 등)에 대한 수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현재 로마가톨릭에서는 교황을 가톨릭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교황의 영적 판단에 대해서 순명할 것을 가르칩니다. 성공회에서는 켄터베리 대주교의 위상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성공회 교리를 영국의회에서 판단한다고 하던데요, 이것이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이는 어떠한 근거에서 인정되고 있는지 알고 싶군요.

: 우선 각국 성공회의 위치와 세계성공회(The Anglican Communion)의 차이를 알아야 할 것 같군요. 영국 성공회(The Church of England)가 전 세계성공회를 대표하지 않습니다. 각국 성공회는 저마다 독립적인 형태돌 유지됩니다. 영국에서는 성공회가 국교이기 때문에 국왕이 영국교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수장이라는 말은 헨리 8세때에 사용되다 그 이후에는 사라졌음). 그리고 국왕은 항상 의회를 통해서 모든 일을 결정하고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의회의 결정에 따라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회에는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는 국가와 종교가 “하나”로 이해되고 있는 국교 채택 국가에서만 이뤄지는 독특한 전통입니다. 미국성공회나 한국 성공회 등은 이런 일이 없지요. 한국이나 미국 등지에서는 주교와 성직자, 평신도로 이뤄지는 관구의회, 혹은 교구 의회를 통해서 모든 일이 결정됩니다. 캔터베리대주교는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관구를 대표하는 동시에 전세계성공회를 대표합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 성공회에 대해 어 행정적 교리적 권한도 없습니다. 참고로 영국내 성공회를 대표하는 사람은 요크의 대주교입니다.

>또 성공회를 영국국교회라고도 하는 데 대한성공회는 영국국교회의 하위관구로서의 위치인지 아니면 하나의 독립적인 관구로서 활동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 좀더 명확하게 말한다면 성공회가 영국에서는 국교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가 스코틀랜드에서는 국교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교 한국에 있는 장로교를 스코틀랜드국교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 있는 성공회를 두고 영국국교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세계성공회는 각 관구의 독립성이 완전히 보장되어 어느 나라도 다른 나라 성공회에 대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셋째, 천주교의 성상 숭배에 대해서 많은 개신교에서 우상숭배로 몰아부치는데 이에 대한 성공회의 가르침은 어떠한지, 그리고 성인 공경의 문제에 대해서도 알고 싶고요, 천주교에서는 마리아를 가장 큰 성인으로 모시고 있는데 성공회는 어떤지도 알고 싶습니다.

: 제가 아는 한 천주교는 성상 숭배를 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상을 만들어 놓고 이를 이용하는 것이지요. 성공회도 이런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만 천주교만큼 성상을 비치하거나 많이 이용하지는 않습니다. 성인 공경은 그리스도인의 책무입니다. 하지만 숭배는 하지 않습니다. 성공회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를 위대한 신앙의 모본으로 보며 그분의 신앙을 본받아 예수님을 따르려 하지만, 그분 자체를 기도의 대상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이런 점은 천주교와 차이가 있지요.

>성공회를 보면서 성공회 신자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이유는 선교의 방법에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교단의 믿음을 구원의 절대적 조건이라 주장하지 않는 겸손함, 형제들을 이해하는 너그러움, 누구와도 대화하는 열려진 마음 등. 세상의 성공과 주님의 성공은 어차피 같은 영광이 아니지요. 좁은 길이지만 그 길의 아름다움을 알고, 그러므로 그 길을 벗어나지 않는 대한성공회에 주님의 사랑과 평화가 늘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 한국에서 작은 교회로 존재하고 있는 성공회에 대해 이런 호의적인 말슴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넓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우리 손 안에 움켜 잡으려는 오만을 부리지요.

>그리고 이런 대화의 장을 열어주신 주낙현 부제님을 위해서도 기도할께요.

: 저도 개신교의 자매님과 대화하려고 노력하는 성호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형제,

주낙현 요셉 부제 드림 ^^;

Written by skhfaq

1월 21, 2001 at 12:09 오후

성공회로 교단을 옮기려면

leave a comment »

저는 본래 모태신앙으로 장로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별 의미 없이 다니던 중 천주교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엇으나 천주교의 교리 중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아 고민하던 중에 성공회를 알게 되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정말 처음 나간것이지만 좋았습니다 한데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아시고 나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2000.9.21)

+ 주님의 평화

답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래 질문에 대한 답변처럼 여간 고민스러운 일이 아니군요. 게다가 이 일을 직접 겪고 있는 처지로서는 상당한 고민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한 그리스도교 안에 여러 다른 교파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는 어떤 메시지가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한 성서 안에 여러 책들이 존재하고, 하나의 복음인데도 4가지의 복음서가 있어서 우리의 주인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다채롭게 조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 그리스도교 안에 있는 다양한 교파는 그러한 성서의 다채로움의 또 다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질문주신 형제(자매)님께 지금 중요한 것은 성공회의 어떤 점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하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대한 자신의 대답과 확신입니다. 교파라는 것은 하나의 창(window)이라고 할텐데, 형제(자매)님께서 그 창을 통해서 받아 느끼고 있는 바람의 성격과 햇살의 기운 등이 무엇인가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며 기도하시면 어떨까요? 이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식별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부모님과 나눌 대화는 그 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통한 식별의 과정을 거친 후에 자신의 생각을 부모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어떨까요? 사실 성공회와 장로교의 교리적 차이는 장로교와 감리교 혹은 침례교의 교리적 차이보다 크지 않다 볼 수도 있습니다. 몇가지 외형적 특징에 따른 거부감과 우려를 보이시는 것일 수도 있으니 차근차근 말씀드리다 보면 이해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이후에 신부님과도 상담하며 이런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도 있구요.

도움이 되셨으면 하는 바람으로 제 경우를 말씀드립니다. 저 역시 장로교 안에서 훌륭한 신앙 교육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감사하고 있는 일이지요.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나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휩싸였지요. 조심스레 알고보니 그것은 장로교에서 가르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반발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하마터면 그리스도 신앙과 장로교라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제한된 가르침을 혼동해서 신앙을 저버릴 뻔했지요. 이 위기를 넘게 해준 새로운 창이 제게는 “성공회”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또 장로교에 대한 오해(장로교의 주장도 다양하니까)도 있었다고 알게 됐지만 성공회을 통해서 접하고 있는 새로운 기운과 햇살이 저를 또한 이만큼 키워준 것에 깊은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저 나름대로 “좋은 몫”을 택한 것이지요. 형제(자매)님께서 깊은 기도와 식별 속에서 좋은 몫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 어느 곳에나 계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부제 드림 ^ ^

Written by skhfaq

10월 3, 2000 at 12:30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