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an Korean Anglican FAQ blog

철학적 질문과 종교적 신앙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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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과거에 성공회 서울교구옆을 자주 지나다니던 사람입니다 (영국문화원때문에) 몇번 서울교구 주일 예배(미사??)에 슬그머니 혼자 참석해서 앉아있다가 새신자로 등록하려다가 말기를 몇번했습니다. 그이유는 과거 폼으로 다녔던 개신교회에서 겪 은 (물론 믿음이 없어서 이겠지만)일들을 통해, 동료 기독교인과 목사님들에게서 많은 실망과 분노를 느끼면서 교회를 그만두었기에 지금도 망설임이 많이 남아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종교를 좀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은 저의 마음앞에는 다음과 같은 원초적인 무식한 회의가 어느새 깊이 드리워져있습니다.

제가 겨우 몇권의 책들을 읽으면서 (ex, 야스퍼스,에리히 프롬, 램프레히트등)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예수의 신성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것은 사도바울과 예수제자들과 갈등 문제 그리고 신약성경이 원본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로마교황청의 많은 편집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후 더욱더 그들의 주장에 대해 동조하는 의식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스퍼스와 에리히프롬은 구약에 기초한 기독교인 이라고 들었으며, 특히 야스퍼스는 그의 저술 “철학적 신앙”에서 성서종교를 비판하면서 성서의 어느 한귀절도 주석이 아닌것이 없으며 인간의 한계를 고려했을시 순수한 계시 자체는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수천년에 걸친 인간의 한계 체험의 보고이며, 이 경험들을 통해서 성서 속의 인물들은 신을 확신하게 되고 이 확신에 의하여 자기를 확신하에 된 것이다 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믿음은 주어지는 것이지 (gift) 노력으로 얻는것이 아니라는 말과 정면 대치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를 인간으로 평가 절하 한다 해도,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신에게 도달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실존을 통해서만 영원에 도달할 수 있는것이며, 성육신한 신으로서의 그리스도 신앙은 성서종교의 본질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야스퍼스의 주장은 저에게는 충격이면서도 다시 종교를 찾게하는 기회로서 인식되고 있습니다.

기회라고 말씀드린것은 저는 예수의 신성이 이미 서양의 종교학자들에게도 공격을 많이 받았으며 신약의 신성적 진위여부도 사도바울의 자체적 해석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렇다면 기독교를 믿을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신적인 혼란에 있었는데, 이에 대해 기독교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 할 수 있는 그 길이 위에서 말씀드린 야스퍼스식의 논법이라면 갈등이 해소될 수도 있겠으며 신앙의 개인적이 체험이 가능하리라는 희망도 가지게 됩니다.

저의 이런 거친 얕은 이해에 대해 신부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싶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기독교에 대해 다시 접근이 어려울것이라는 회의감이 들고 있습니다.

+ 주님의 평화

깊은 평화의 인사로 때늦은 답변에 대한 사과를 대신합니다.

님 께서 주신 훌륭한 질문은, 믿기지 않을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성직자인 제 안에서도 계속되는 의문들입니다. 아직 진행중인 이런 의문이 부끄럽지 않은 까닭은, 일언지하에 이런 의문들을 깨끗하게 씻어낼 수 있다면 한 순간의 행복일는지 몰라도, 무한하신 하느님을 대하는 태도로서 정직할 것일까 하는 좀더 깊은 의문이 저를 붙잡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생각에 님께서는 매우 중요한 신앙의 출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문이 없는 신앙은 맹목적이기 쉽거니와, 삶의 길 속에서 만나는 또 다른 의문의 복병 앞에서 무릎 꿇기 십상이지요.

님 께서 들어주신 철학자들은 공교롭게도 근대 철학자들치고는 상당히 종교편향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분들입니다. 야스퍼스와 같은 실존철학의 대가와 더불어, 에리히 프롬은 서구의 신맑스주의로 불리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자이기도 한데, 한결같이 철학과 종교의 대화에 대해서 깊이 고민했던 분들이었습니다. 근대철학이 내내 기존 종교-신학이 짓눌러온 숨통에서 조금씩 기세를 얻기 시작하면서 그 “지배의 신학”에 대해서 비판한 것은 당연한 결과요, 또한 종교와 신학 자체의 반성에 중요한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그 결과, 예를 들어주신 성서의 형성사와 관련된 역사적인 사실 혹은 문학 비평적인 연구 등은 이미 신학계에서 일반화되어 신학생들뿐만 아니라 저 같은 성직자들까지도 괴롭히고 있고, 하느님과 인간의 구원 사이에 놓여 있는 예수님의 성육신 교리는 그 “성육신 교리”를 둘러싼 신화 논쟁이 이미 1960년대 그리스도교계를 발칵 뒤집어 큰 생채기를 남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누가 괴롭힘을 당하며, 누가 상처를 입었다는 말일까요? 아무래도 하느님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거나, 그 모종의 답으로 짐짓 사람을 위협하거나 저주했던 지배적인 사람들, 혹은 그들의 생각이 아니었을까요? 성직자로서 나 자신이 이런 모종의 위협적 인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이런 회의와 의심의 시대에 어떻게 하느님에 대해서 말할까 하는 질문을 다시 해봅니다.

야스퍼스가 옳을까? 에리히 프롬이? 아니면 어거스틴 성인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교부들이 역시 맞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송아지를 낳는 암소을 옆에 두고 순산케 해달라고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께 연신 빌어마지 않는 촌부가 옳은 것일까?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열어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내가 성서를 읽고 내 삶을 반추하며, 예배에 참석하여 그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느끼면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지치지 않는 눈으로 살펴볼 것을 요구합니다.

그 대답들은 지금까지의 논리가 철학이 되었든, 기존 교회의 가르침이었든, 신학이 되었든 간에 그것들에게 새로운 회의를 일으키게 하고, 깨지게 하고,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들로 남아서 나를 괴롭혀서 내가 항복 선언을 하려고 하는 순간, 나도 몰래 내 앞에 성큼 와 있거나, 내 뒷전에서 이미 나를 새로운 모험으로 밀어대고 있기가 일쑤입니다. 저는 이것이 신앙을 통해 주고 받은 질문과 대답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현대에 이르러 철학은 종교철학 혹은 신학과 큰 경계를 가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그리스도교 신앙이 일반적인 철학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비 (혹은 화두라고 해도 좋겠지요)를 가지고서 씨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건 그 신조를 날조된 것이라고 말하든, 처녀의 몸에서 낳았다는 이야기가 신화 속에서나 공통적인 것으로 엿보이는 현상이라고 이해하든 아니면 그리스도교 유일의 사건이라고 믿든, 혹은 그 부활의 ‘사건’을 두고 어떤 의미로 해석하든, 그 역사적 사실성을 증명하려고 들든 간에, 문제는 한가지입니다.

예 수 그리스도가 도대체 내게 뭐라고 하는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향해 ‘너는 도대체 누구냐?”라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혹은 내 스스로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떤 길을 제시하는지 눈 여겨 보고, 그 길을 따라가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당당히 대화해보겠다고 감히 도전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도전을 시작하는 길은 여러 가지이겠습니다만, 저는 단연코 예배 공동체의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처지에서 서로 다른 질문을 갖고 모여든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모여,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내는 그 순간의 체험들을 지속시키는 것이 종교적인 신앙에 대한 질문과 답변의 중요한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러지 않을 테니, 님께서도 질문의 끈을 놓치지 않고 스스로를 열어 놓으며 허물 벗듯 전진하기 바랍니다.

주님의 넉넉한 길에서 만나 걷길 기대하며,

주낙현 신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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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khfaq

9월 29, 2004 , 시간: 3:1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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