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an Korean Anglican FAQ blog

천주교, 개신교, 근본주의, 교회 분열 등에 대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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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안녕하세요? 당분간 자리를 비우셨군요. 전 그것도 모르고 …
그리고 써놓고 보니 제 글이 창피하게 느껴져서 지웠었습니다.
하지만 제 이메일로 주신 신부님의 답장에 용기를 내어 다시 올립니다.
깔끔하게 수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다시 올립니다.
이 사이트가 앞으로 계속해서 뜻깊은 공간이 되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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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은 이름만 반반한 ‘중도’이기보다는 ‘혼란과 딜레마’의 길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저 자신이 혼란과 딜레마의 길을 걸어왔고, 어찌보면 대부분 사람의 삶 자체가 정돈되지 않고 양극단에 처하고 부조리하고 일관성 없는 것이라 성공회 교단 전체에 대하여 그러한 이상 내지는 이념의 완전한 실천을 강요하는 것은, 그럴만한 자격도 없고 또 부적절한 일이라고 봅니다.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성공회든 그 제도(‘제도화된 종교’라는 말도 있습니다만)를 운영하고 실천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기에, 어찌보면 어린아이가 걸음마 하듯이 뒤뚱대고 지척이며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성장의 과정 속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엉성하고 다소 편협한 문제 제기를, 신부님께서 직접 정돈하셔서 열려 있는 답변으로 내어놓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명색은 가톨릭 신자이지만, 그 본성(?)상 프로테스탄트적인 기질이 몸에 밴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외견상 제도적으로 완전히 구비된 안정성, 다양한 수도회 카리스마, 독신이라는 형태로 표현되는 완전한 봉헌 그리고 성화(聖化) 등 가톨릭의 화려한 외모에 매력을 느끼면서도 복음적 가치를 급진적으로 실현(제게 있어서는 무교회주의, 이는 정치적 무정부주의와 일맥 상통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하는 내용적 면에서의 완전성을 추구하는 갈망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이 양극단에 짓눌려 있을 때 제게 새로운 비전을 열어 주는 제3의 길은 어쩌면 숨통을 터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중도’보다는 ‘합(合, synthesis)’을 바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하늘나라에 가면 찾을 수 있겠죠.^^ 하지만 저는 ‘하느님 나라’를 끊임없이 말씀하시고 선포하시고 가르치셨던 예수님의 그 갈망이 예수님의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제가 찾는 것은 어떤 흠 잡을 데 없는 교회인 것 같지만, 사실은 진리(veritas)와 정의가 온전히 구현된 하느님의 나라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셨기에 그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가장 먼저 기도하셨고 그래서 겨자씨 같은 미미한,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나라의 건설하는 위대한 일을 몸소 시작하셨다고 봅니다. (그것은 물론 여러 제도 교회에서 얘기하듯이 기독교의 전파나 원주민의 개종이 아니겠지요. )

이러한 갈망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다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기도야말로 이런 인류 전체의 갈망을 대신하여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제적 기도의 전형이 아니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제가 근본주의를 비판했지만, 사실 그러한 신앙 체계 내지는 양식이 제게 크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대로 부정할 수 없는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중세 시대 성 프란치스코나 사막 교부시대 성 안토니오 같은 사람들은 성서를 글자 그대로 믿었던 사람들 아닙니까? 그리고 자기에게 들려오는 그 말씀을 어떤 신학적인 반성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온 몸으로 체현한 사람들 아닙니까? 저 자신 슐라이어마허가 말하는 “무한한 존재에 대한 감수성과 취향”을 근본주의 교단에서 얻었습니다. “종교 고유의 특징은 신비스런 체험, 영원의 세계에 감동됨이다. 종교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그러니까 천상적 섬광인 바, 이것은 경건한 영혼이 영원하고 무한한 존재에 감동될 때 발생하는데, ‘종교의 거장들’은 이러한 종교 체험을 언어 등을 통해 직접 표현하며,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전해준다.”(한스 큉, 그리스도교, 분도출판사, 856쪽)

저는 그때 정말 순수하게 믿었고, 그러한 체험은 그러한 분열되고 깨어지지 않은 믿음에 대한 그분의 선물이었다고 믿습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이것이 아버지께서 원하신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체험에 그대로 머물 때, 다시 말해 개인적 체험을 절대화하고 그 달콤함에 중독될 때 근본주의의 폐해는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보다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러한 체험(관상)을 전할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반성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전반적으로 왜곡된 사회구조 속에서는 더욱 그러하다고 봅니다. 이러한 전망을 얻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좀 뒤죽박죽이어서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식으로 ‘대화’해 본 적이 없어서… 신부님이 주신 글에 대한 답글이라기보다는 제 넋두리가 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이걸 말하려면 저게 생각나고 저걸 말하려면 이게 생각나서 어디서부터 가닥을 잡아야 할지… 정말 혼돈과 딜레마에 빠져 있는 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드리는 것 같아 민망하네요. 신부님이라면 어떤 얘기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앞으로 이 게시판을 자주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생각을 정리해서 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할 얘기들이 많을 것 같거든요. 신부님의 답장을 기다려 봅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글을 살려서 올려주셨으니, 개인 메일로 보낸 편지였지만, 저도 그냥 살려서 여기에 덧붙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개인 메일로 보내는 것과 이런 공개된 게시판과 올리는 것이 사뭇 다른 인상이 드는 군요. 뭐 어쩝니까? 이미 뱉어낸 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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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평화

지난 번에 게시판을 통해서 주신 글 잘 받아 읽었습니다. 그 이후 곧바로 어떤 회의에 2주일 가까이 참석해야 했기에 게시판에 답글을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 참에 다시 찾아와 보니 글을 지우셨더군요. 미안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해서 답장을 해야지 하는게 이렇게 늦어졌습니다. 짧게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님께서 하신 말씀의 대부분을 동감하고 있습니다. 특히 근본주의의 문제는 매우 상당한 도전으로 다가오는데, 제 자신이 근본주의를 매우 싫어하는데다가, 여러가지 경험을 통해서 그 폐해를 실감하고 있습니다. 근본주의는 종교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형태의 신념 체계와도 맞물려 돌아가기가 일쑤입니다.

성공회에 관련해서만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아무래도 성공회가 최고의 이상적인 교단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성공회는 그래서 스스로를 언젠가 사라져야 할 교단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일치가 이뤄지는 날, 이 분열을 극복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소망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그 벽을 허무는 순간을 위해서, 그 사라짐을 위해서 전력질주하는 것이 성공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품어왔으면서도 성공회가 내내 독자적인 교단을 고수해왔던 것은 다름아니라 성공회가 근본주의적 태도들과 대결해왔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 가톨릭이나, 퓨리탄 중심의 개신교 사고 방식은 성공회가 보기에 하나의 사고 방식으로 모든 것을 획일화하려는 태도로 보였고, 그것은 근본적 교리, 근본적 신앙이라는 “근본주의”의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이기에 이를 거부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본주의에는 혼란이 없습니다. 그러나 혼란없는 아주 깔끔한 이론은 실제로 삶을 반영하지 못합니다. 엉성하게 뒤얽혀 있는 것이 삶이고, 내 삶 자체에서도 모순은 이리저리 나를 괴롭히는 실정입니다. 사람들은 바로 그 모순과 당당히 대결하기 보다는, 누군가가 지어준 산뜻한 논리, 혹은 교리, 혹은 어떤 윽박지르는 듯한 신앙 체험을 약처방으로 삼아 그걸 의지하고 살아가기가 쉬운 법, 그래서 (부정적으로 보자면) 종교는 끊임없이 그런 약처방으로 지금까지 버텨오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물론 이것이 종교의 전부는 아니지요.

성공회에 대한 한 생각… 이런 점에서 성공회는 다른 방법을 취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삶의 혼란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 하지만 우리는 다만 하느님을 향해서 길을 걷는 자일 뿐, 진리를 거머쥐고 있다고 자랑하지 않을 것… 다만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그가 누구이든지 그들과 함께 다시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며 지치지 않도록 길을 걸을 것…

사람은 지치기 마련인지라, 쉬고도 싶고, 자리에 틀어 앉아 안주하며 집을 짖고 싶어하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성공회에는 개신교의 어떤 모양이 드러나기도 하고, 로마 가톨릭의 어떤 양상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것도 그 여정 가운데 하나이니, 앞서 나무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리 쉴 터는 항상 필요하니까요. 다만 자리 틀고 앉아서 길 걷는 다른 사람들에게 시비 걸며 털석 주저 앉으라며 가던 길을 포기하라고 권유하진 말았으면 하는 것이지요 ^^

아침에 일어난 상념으로, 편안하게 적어봤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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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khfaq

7월 3, 2004 , 시간: 2:5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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