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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 성서가 나를 이끄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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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가 나를 이끄는 곳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The Rev. Barbara Brown Taylor (미국성공회 사제, 피드몬 대학 및 컬럼비아 신학교 교수)

4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아리안 논쟁이 극에 달했을 때 어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본질에 관한 논쟁을 하지 않고서는 빵 반죽을 사러 가게가 갈 수 없을 정도라고 쓴 적이 있다. 그분은 영원한 성부의 영원한 성자인가? 아니면 그분이 그렇지 않은 특정한 시간이 있었는가? 이 문제로 어떤 주교들이 다른 주교들에게 주먹다짐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황제가 끼어들어 이를 조정해보려는 동안에, 이 논쟁은 도시의 거리에도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논쟁에서 아타나시우스파는 요한복음에서 뽑은 구절을 내세웠고, 아리우스파는 마르코복음에서 나온 구절을 가지고 응대했다.

초대 교회사의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그 후대에 살게 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그런 다음 수업을 준비하고 학생들 페이퍼에 점수를 매기는 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일은 2003년도 미국성공회 총회가 있기 전이었다. 그러니까 미국 전역에서 대표들 과반수가 세계성공회 사상 최초의 공개적인 동성애자 주교로 뽑힌 존 로빈슨 신부의 선출을 인정해 주기 직전이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내가 살고 있는 미국 조지아 주 북부는 어떤 점에서 콘스탄티노플의 거리와 비슷해지고 말았다. 성공회 신자들은 동성애 문제에 대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지 않고서는 어디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아직까지는 이 일로 주먹다짐이 있었다는 소식은 보고 되지 않고 있지만, 이 논쟁으로 교회가 갈라지고 재정 문제까지 위협받고 있다. 게다가 이 논쟁은 발끈 달아오른 몇몇 성서의 구절과도 결부되었다. 로빈슨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복음서의 구절들을 선호하고,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울로 서신의 구절들을 들이대고 있다. 이 불꽃 튀는 접전을 보고 있노라면, 4세기의 안토니오 성인이 문명사회를 벗어나 광야로 피신한 까닭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누가 자기편이 되느냐에 따라서 뱀과 하이에나가 멋진 한 조를 이룰 형국이다.

내가 시장에 나가는 데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 내가 동성애에 대한 어떤 “입장”을 갖고 있지 않다는데 있다. 대신에 내가 갖고 있는 것은 그저“삶”에 대한 생각이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은 하나의 역사인데, 그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매우 중대한 부분을 맡아서 움직이고 있다. 사실 동성애“이슈”를 접하게 되면, 나는 일순간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경험한다. 사실 나는 이렇게 큰 이슈를 머리 속에서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비늘 같은 것이 내 눈을 덮고 마는 것이다. 대신에 나는 그저 내가 학교에서 튈지 안 튈지를 걱정해주었던 가정교사를 생각한다. 나는 사제직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내게 가르쳐 주는 사제를 발견하고, 또 월말에 이르러 음식살 돈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을 때 나를 위해서 통닭 한 마리를 구워준 교수님을 눈에 그린다. 또 에이즈(AIDS)로 죽어갔던 젊은이들 열 몇 명의 얼굴들을 떠올리고, 그들이 얼마나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 마지막 삶을 불태웠는지를 생각한다. 나는 16살 먹은 친구의 얼굴을 생각하며, 여전히 진정한 첫사랑을 기다리고 있음을 본다. 그는 혹시라도 자기가 동성애자라고 느껴지면 바로 자살해 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친구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이것들이 내 시선에 그려지는 이야기들이다. 이 이야기들을 어떤 하나의 입장으로 환원해버리는 것은 어떤 경우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건 마치 얼굴 없는 몸통만 바라보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한 때 성문제를 가지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길이며, 우리가 가진 양쪽의 진리를 좀더 확장해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태도를 거의 포기한지 오래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적어도 인생의 이야기가 “진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오직 성서만이 진리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동성애자 그리스도인들의 위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이 1950년 전에 쓰인 성서의 다섯 구절 가운데 하나만을 가지고 그 다양한 성서 기자들이 의미한 것이 이것이었네 아니네 하는 일에 달라붙어야 한다고 한다.

나는 성서를 사랑한다. 나는 내 반생애를 이미 성서를 읽고 성서를 연구하고, 성서를 가르치고 또 성서의 말씀에 따라 설교하면서 살아왔다. 내 주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영감으로 성서의 모든 말씀을 알 수 있다는 것과는 달리 그 말씀 하나 하나를 깨닫진 못하지만, 나는 성서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며, 이 만남을 통해서 내 일상의 삶 속에서 신구약 성서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아가는데 내 자신을 던지고 있다. 그런데 나의 이런 생활 속에서 매우 특이한 일이 일어난다. 내가 성서에서 배운 것을 실행에 옮기려 하면 성서는 내게 등을 돌리는 것이다. 내 입장에서 어떤 의도를 건져낼라 치면, 성서는 그 종이에 찍힌 말에 기대어 집을 지으려는 나의 의도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성서는 내게 살며시 입 맞추며 세상으로 나를 떠민다. 그리고 약속한다. 하느님을 찾는데 필요한 모든 것은 성서의 페이지에도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살덩이에도 있다고. 율법서를 읽든지 복음서를 읽든지, 기록된 말씀은 나를 떠밀어, 이 지상에서 그 어떤 갈등과 투쟁, 그리고 깨달음과 실패가 있다 하더라도 나의 이웃들과 함께 정의와 평화를 살아감으로써 그 말씀을 몸으로 체현하라고 촉구한다.

나는 이 길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 새로운 이해에 다다르게 되었다. 즉 성서에 기록된 말씀뿐만 아니라 육신이 된 말씀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본이 신뢰할 만한 것이므로 그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은 단지 그 책에 있는 내용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책에 있는 내용을 벗어나 삶에 말씀을 적용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그런 다음에 그만 시간이 다됐으니 그만 중지하라는 경고를 무릅쓰고 관행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사랑하는 꺼림직한 결과와도 대면하라는 의미이다.

요즘 나는 모든 것이 하나의 입장으로 들린다고 생각한다. 어떤 고백도 그렇게 들린다. 나는 무엇이 옳은지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내가 누구를 사랑하며,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까지 내가 전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의 말씀이 나와 함께 진행되는 일을 조명해 주리라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 내 인생을 걸겠다.

(주낙현 신부 역)

Copyright 2003 by Barbara Brown Taylor. Translation in Korean by Nak-Hyon Joo with permission

출처: 크리스찬 센츄리 The Christian Century – Oct. 23,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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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khfaq

11월 22, 2003 , 시간: 1:3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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