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an Korean Anglican FAQ blog

성체조배, 그리고 성체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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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주신부님.

얼마전부터 신부님의 홈페이지를 열심히 방문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의 글들이 저의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먼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장로교인인데, 요즘 부쩍 성공회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성체강복”과 “성체조배”가 무었인지요?

성공회나 루터교회는 장로교등의 일반 개신교와는 달리 성체성사를 중시하고, 주님의 실제임재를 믿는건 알겠지만, 성체조배와 성체강복은 무엇인지요? 또 그걸 언제 어떻게 하는지요? 성공회의 저교회파에서도 그걸 하나요?

성공회에서는 모든 교회가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감실에 보존하나요?

한국 성공회는 상당히 강한 고교회파인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교회파의 경향을 가진 성공회교회나 성직자들도 있는지요?

학업으로 바쁘신줄은 알지만, 상세한 답변을 부탁 드립니다. 신부님의 글이 제게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됩니다.

모쪼록 학업과 사목활동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원하며, 답변 기답립니다. 감사 합니다.

+ 주님의 평화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전에 성공회의 성체 이해에 관련된 답변에서 지나치듯 언급한 내용을 용케 기억하셔서 새로운 질문을 던져 주신 것 같습니다.

사실 성체조배와 성체강복은 성서적인 기원을 갖는다기 보다는 역사적인 기원을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그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원래 성찬례의 원형이 된 “감사의 식사”(유카리스티아)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의 일상적인 공동체 식사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 공동체의 발전과, 그 안에서의 여러가지 갈등 등으로 인해서, 좀더 “예식적인 식사”로 변화되었지요. 그런 가운데서도 공동식사에 참여하지 못했던 사람을 기억하고 먹이기 위해서(교회 성립 초기의 상황), 혹은 주님의 한 몸을 나누는 거룩한 빵과 포도주를 함께 나누지 못한 사람들, 즉 박해로 인해서 감옥에 있거나, 몸이 불편해서 식사에 함께 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그 공동체의 일치와 연대를 기억하는 의미로(이것은 좀더 후대의 상황이 되겠습니다) 이를 보존해서 나중에 전달하기 위해서 함께 기념한 성체, 혹은 축성한 성체를 보존하는 관습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공동 식사로서의 성찬례가 점차 그 성격을 잃게 되었고, 특별히 이단 논쟁과 더불어서 그리스도의 신성이 더욱 강조되는 마당에,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고백했던 축성된 빵(성체)의 위치도 그만큼 격상되는 과정을 겪습니다. 그리고 9세기부터는 실제로 평신도들은 “감히” 영성체를 하지 못하고 그저 눈으로만 보는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이지요. 라틴어로 드리는 미사여서 일반 사람들로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미사에 다만 성체 거양(축성된 빵을 들어올리는 일)을 통해서 보이는 성체에 대한 신심이 더욱 강조되었던 것입니다.

공동체의 예배인 성찬례가 끝나고서, 축성된 성체를 일정한 곳에 모셔두고 그 앞에서 경배하 도하는 행위인 성체조배는 이러한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합니다. 성체조배는 그러므로 빠르게는 8세기부터 시작해서 13세기 이른바 대중적인 신심 운동이 강력하게 대두되는 시기에 그 힘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의 사정으로보면 성찬례를 통해서 거양되는 성체를 바라는 보는 것보다는, “축성하여 보존된 성체” 앞에 나가서, 이것을 주님의 실제 몸으로서 생각하며 가까이 대면하고, 그 앞에서 기도하는 행위가 평신도들에게는 더욱 친밀한 것이 되었던 것이지요. 이것은 공동식사, 즉 공동체의 나눔으로서의 성찬례가 퇴색되면서 나타난 하나의 탈출구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성체강복은 바로 이러한 대중적인 성체에 대한 신심이 확대되면서 나타난 부가적인 현상이라고할 수 있습니다. 성체 강복은 말 그대로, 축성하여 보존하고 있는 성체를 가지고(대체로 아주 화려한 성체틀이나 성합에 보관한 상태로 – 이 모양을 아시려면 영화 “미션”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모인 사람들에게 축복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아마 이것은 14세기 초반에 교회 안에서 본격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미사가 있건 없건 간에 이 성체를 담은 성체틀을 가지고서 순행을 한 다음, 이것을 가지고 교인들에게 축복을 하는 것이지요.

현재 로마 가톨릭 교회에는 이러한 성체조배와 성체강복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성공회에서도 일부에서는 이러한 전통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한국성공회의 경우는 일상적인 성체조배와 성체강복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성찬례를 제정하신 날을 기념하는 성목요일의 기념 성찬례에서 성찬례가 없는 금요일 예식을 위해서 성찬례를 보관하고, 그 앞에서 밤을 세워가며 성체조배(성체수직)를 하고, 그 직전에 성체강복식을 하는 관습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성목요일의 성체조배와 성체강복식은 매우 의미 깊은 예식으로 성공회에는 남아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성체조배와 성체강복식이 천주교에서는 매우 빈번한 것인데 비교한다면, 성공회에서는 매우 축소된 전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특히 한국의 개신교와 같이 서방기독교의 중세적인 전통이라면 무조건 거부하는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매우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것이 성찬례라는 맥락을 떠나서 축성된 빵, 즉 성체 자체에 대한 신심으로 이해된다면, 그리고 강복식이 축성된 성체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다는 이것은 신학적으로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성찬례의 연장 선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 여전히 현존하시며, 우리의 삶 속에 함께하신다는 의미로서 이해되고, 또 그런 신비를 좀더 깊이 명상하기 위한 것이라면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이것이 공동체의 예식인 성찬례의 의미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두번째 질문하신 축성된 성체의 감실 보전 관습은 성공회에서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일차적인 목적은 성체조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찬례에 함께 참여하지 못했던 사람들과 나누기 위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가운데서 축성한 성체를, 여러가지 사정으로 함께 참여하지 못했던 사람이 나눔으로써, 한 몸을 나누는 공동체 의식, 혹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와 연대를 경험하기 위한 것이지요.

세번째 질문은 한국성공회가 고교회파 전통에 서 있는데 과연 저교회파는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국성공회가 물론 고교회파 전통의 선교사들의 영향 속에서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두부 자르듯 반듯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이것은 하나의 경향이라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한국성공회는 세계성공회의 다양성 속에서 함께 교류하고 있고, 또 한국의 다른 그리스도교 형제 교단들과 교류하고 있으므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저교회파라고 하는 것도 굳이 이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다양한 경향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가운데 어떤 경향이 좀 두드러지는 것이라고 하겠지요. 역시 한국성공회에도 저교회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들이 매우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답변 시도가 용두사미가 되지 않았는지 걱정스럽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된 형제

주낙현 신부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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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khfaq

4월 6, 2003 , 시간: 1:5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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