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an Korean Anglican FAQ blog

교회의 사회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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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주 신부님.
저는 장로교회를 다니는 청년입니다.
이번에 SOFA개정을 위한 서명을 교회 이름으로 하려고 했었습니다.
청년회 담당 전도사님도 크게 호응을 해 주셨고,(교단차원으로 소파
개정운동이 벌어지도록 하실정도였습니다.) 학생회 담당 전도사님도
크게 호응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문제는 담임 목사님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사회참여를 하는게 싫으신 듯 합니다.
교회이름으로 사회참여를 하면 안된다면서, 오히려 교회의 사회 참여를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성경에서는 사회참여를 어떻게 보는지 궁금합니다.
정말 교회에서 사회참여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인지요..
답답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저는 교회가 사회참여를 하지 않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한국 개신교가 독재에 침묵을 지킨 것을 알기에….

질문에 대한 아타나시오님의 답변

저도 같은 내용을 고민하고 있어
함께 나눠보고자
그냥 주제넘게 답변을 드립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점점 더 보수화되어가는 교회의 침묵에
무척이나 답답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성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느끼는 점은
기독교의 본질은 구약에서 신약까지
철저히 사회적인 종교라는 점입니다.
바울로 신학에 와서야 개인적으로 편향된 느낌도 약간 받습니다만
적어도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성서는 철저히 사회적으로 민감한
종교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 참여하지 않는 것보다도
훨씬 종교적으로 어렵다는 것도 함께 느낍니다.
종교가 자칫 잘못 참여할 경우
독재와 제국주의의 첨병 구실을 하거나
이익집단이나 정치집단으로 오용되기에 너무나도 좋은 조건을 가진 것이
교회이기도 한 것같습니다.
이것은 비단 보수적이거나 식민적인 이념을 부르짖을 때 뿐 아니라
진보와 인권을 지향할 경우에도 교회가 권력이 되는 순간
언제든지 변질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 변질은 보수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추구하는 하느님의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세속적으로 오용되지 않기 위해서는
신중하고도 조심스러운 걸음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참된 진리를 조금이나마 깨달은 사람이라면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하느님을 향한 올바른 신앙의 자세가 되는지를
성령께서 알려주실 것이라는 점을 굳게 믿을 것입니다.

저 양심에서, 저 수많은 사람들의 울림 속에서 메아리치는
성령의 메시지에 귀를 닫고 마음을 닫는 것이 신앙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형제님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가로막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양심의 울림을 따라 살고자 노력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저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신부님이건 목사님이건 간에
잘못된 의도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존중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 경계선은 여전히 모호하고
쉽지만은 않은 일인 것같습니다.
제 고민도 사실 여기에 있습니다.

+ 주님의 평화

김재홍 형제님 안녕하세요?

좋은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게으름을 피우는 동안에 아타나시오 형제님이 참 좋은 답변을 주셨군요.
역시 나눔은 서로를 살찌우고, 풍요롭게 하는게 틀림없습니다.

좋은 답변에 제가 또 무슨 말을 덧붙일까요?

다만 한가지만 덧붙여보고자 합니다. 사족이 되질 않길 바라면서….

김재홍님께서는 한국 교회가 역사 속에서 독재 정권 앞에서 침묵한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보수적인 교회들은 대체로 교회의 정치 참여는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런 교회들이 보여주었던 것은 “침묵”을 통한 독재 정권의 “인정”이라는 암묵적인 정치 참여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교회의 사회적 책임, 혹은 정치적 책임은 그것이 어떤 외향적 성격을 띄는 적극적인 것이든, 암묵적인 책임 회피이건 분명히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삶의 모든 행동들은 모두 “정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역사적으로 살피건대, 사회 정의를 부르짖고 실천했던 많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 신앙인들을 탄압했던 정치 권력자들에 편승하여, 보수적인 교회들이 신학적인 이유를 들어 함께 비판하며 입을 막었던 것은, 정반대의 행동으로 보여준 명백한 “정치 참여”였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행동은 어떤 점에서 모두 정치적인 행동이었음이 분명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꿈과 이상은 정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현실 사회의 변화를 꿈꾸고, 이에 대한 실천이 없는 신앙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의 정의를 위해서 염려하고, 기도하고 나아가 행동하는 것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부르심입니다.

그 참여의 구체적인 방법과 전략은 물론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아타나시오 형제님의 깊은 고민에 대한 “사족”이 아니었나 두렵군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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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khfaq

1월 14, 2002 , 시간: 12: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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