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질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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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 성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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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평화

게파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 시도가 이어집니다.
지난 번에 답변 드린 고해성사에 대한 추가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입니다.
내용이 조금 길더라도 용서바라며…

질문 2
고해성사에 대하여서 그것은 하느님 은총의 표징으로 보신다면,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 20-23) 라는 성서말씀에도 불구하고 사제의 赦罪權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신지요? 달리 생각해보면, 고해성사를 통해 죄를 용서받는 신자들과 고해성사를 통하지 않고서 죄를 용서받는 신자들과의 형평성 문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답변 2
하느님의 은총의 표징은 어떤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의 신비는 우리가 어떤 표징으로도 담을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에 대한 이해도 폭넓게 해야하며, 어떤 교리적인 태도나 입장으로 제한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통상 말하는 “사제의 사죄권”이라는 표현은 오랫동안 오해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구분 혹은 명확한 해명이 필요합니다. 궁극적인 죄의 용서는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사제의 사죄권”이라는 말은 “사제가 용서한다”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이름으로 용서를 선포하는 것”이 되는 것이지요.

성서에서 고해성사를 위한 근거는 명확합니다(마태 16:19, 18:18, 요한 20:23). 그러나 그 이해는 역사적인 것으로 제한되거나 왜곡되었으니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이런 고백과 용서의 참회 예식은 초대교회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체로 공개적인 성격이었지요. 예를 들어 세례를 받기 위해서 자신의 지난 잘못을 모두 밝히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례 이후에 저지른 일상적인 잘못에 대해 고백하고 용서를 받는 참회 예식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예식은 애초에 교회 예배 안에서 함께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참회 예식은 초대 교회와 같이 작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매우 중대한 죄(살인이나 성적인 부정, 파괴 행동)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세 초기부터 이러한 개인적인 참회 예식이 일반 신자들의 일상적인 죄의 문제에까지 확대되어 개인적인 고백에 따른 참회 제도로 정착하게 됩니다. 부작용도 많았지요. 중죄자의 경우에는 너무나 가혹한 보속을 주었기 때문에 이를 아예 참회 예식을 회피하는 것이 많았으니 말입니다. 이런 일로 참회 예식의 의미가 상실되는 것을 막으려고 로마 가톨릭은 1215년 라테란 공의회에서 신자들의 의무 사항으로 규정했습니다. 공개적인 참회 예식은 오히려 형식적인 것이 되고, 개인 참회 예식 이른바 개인적인 고해성사가 정착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살펴볼까요? 성공회 성찬례에서나 로마 가톨릭의 미사에서는 “죄의 고백과 용서의 선언”이 포함된 참회 예식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는 초대교회의 예전적인 유산이지요. 즉 우리는 매 성찬례(미사)때마다 고해성사를 치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제가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선포하는 고해(고백과 용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또 이것은 기본적으로 “죄”란 한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을 상기시키시고 결국 참회란 공동체 화해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공개적인 죄의 고백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이 양심을 가리면서 하는 것이라는 판단이 있다면 이를 사제에게 가서 개인적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용기입니다. 그래서 성공회 역시 개인적인 고해성사를 권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찬례의 참회예식(죄의 고백과 용서 선언)과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연장선입니다. 이 개인적인 성사를 통해서 죄를 고백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고, 이로써 하느님의 은총을 더욱 가깝게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또 사제는 단순한 보속을 지정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이 영혼의 성장을 위한 사목적인 돌봄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고해성사를 통해서 얻는 기쁨은 대단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런 점들 때문에 개혁초기에 주님께서 세우신 성사로 세례와 성찬례, 그리고 고해성사를 꼽았습니다. 그러나 로마 가톨릭의 고해성사에 대한 오용 때문에 아예 이를 버리고 말지요. 당시 유행하던 말대로 “아기를 씻긴 욕조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게 되었다”는 빈축을 살만한 일이지만, 그처럼 고해성사의 오용의 문제 또한 심각했다는 증거지요.

현재 고해성사는 여러모로 조명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교리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심리적인 문제와 영혼의 치유, 공동체와의 화해를 위한 훈련과 조건 그리고 사목적인 상담 등 다양하게 접근할 문제이지요.

그러고 보면 개인적인 고해성사 참여 여부로 인한 형평성의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보기에 그런 것이지 하느님께서는 고해성사에 참여한 사람의 마음도 보시고, 성찬례를 통한 참회 속에서 고백하는 사람의 마음도 읽으시기 때문입니다. 참 신앙인이라면 성찬례를 통한 고백이든 개인적인 고해성사이든 하느님 앞에서 정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정직한가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고해성사가 우리 삶에 던지는 질문입니다.

좋은 질문에 감사하며, 항상 주님의 놀라운 은총이 형제님에게 깃들길 빕니다.
주낙현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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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skhfaq

8월 18, 2001 , 시간: 2:4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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