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회 고해성사 예문
신부님 안녕하세요! 전에 변호사와 성공회 사제에 관한 질문 올렸던 법대 다니는 학생입니다.
근데 여기 게시판 닫으신다니 너무 아쉬워요
전 사실 생각보다 꽤 자주왔었는데…막 아무글이나 올리며 질문하기 좀 쑥쓰(?)러워서 계속 눈팅만 했습니다…안닫으시면 안되나요 ㅠ질문 게시판 활성화에 조그마한 도움이 되고자 저도 질문을..^^;;
저는 고해성사를 참 좋아하는데 (사람이 가장 겸허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참되게 고백하고 그럼으로써 용서받고 사랑받는 순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공회의 고해성사 양식을 알고 싶습니다!
+ 주님의 평화
“작디작은이”님 안녕하세요.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뭐 조회수를 봐서는 별로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꾸준히 오시는 분이 계셨군요. 실효가 다한 것이 아닌가 해서 이제 접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었는데, 좀 시간을 두고 시켜 보겠습니다.
흠.. 엄살을 부렸더니, 여러분들이 성화시로군요 ^^;
성공회 고해성사 예식 전문을 아래에 옮겨 놓습니다. 이것은 한국성공회가 2004년 개정한 새로운 기도서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고해 예식
- 고해예식은 모든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유익하므로 적극적으로 권장된다.
- 사제는 고해내용을 어떤 경우에도 발설할 수 없다.
- 고해소가 없을 경우 교회 안에 사제와 고해자가 얼굴을 마주하지 않도록 칸막이가 설치된 적당한 장소를 준비해야한다.
- 사제는 소백의와 자색 영대를 한다.
- 고해자는 먼저 자신이 지은 죄를 자세히 생각하고 진정으로 뉘우치며 다시는 반복하여 죄를 짓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고 나온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아멘
○ 주님 앞에 나아와 모든 죄를 고백하오니 용서와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 주께서 그대의 마음과 입에 계시어 모든 죄를 진심으로 겸손히 고백하게 하소서.
○ 아멘.
○ 전능하신 하느님과 거룩한 교회와 사제 앞에 고백합니다. 나는 생각과 말과 행실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 의무를 소홀히 했습니다. 특별히…. (여기에서 분명하고 간결하게 고백할 죄를 말한다.) 이러한 나의 죄와, 이 외에 잊어버리고 기억하지 못하는 모든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오니,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용서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사제는 간결하게 권면의 말과 보속을 주면, 고해자는 다음 기도를 바친다.)
○ 주 하느님, 내가 죄를 지어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사오니, 악을 저지르고 선을 소홀히 한 모든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나이다. 또한 주님의 은총으로 속죄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며 죄의 유혹을 피하기로 굳게 다짐하오니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아멘.
✛ 진실로 죄를 뉘우치며 주님을 믿는 사람을 용서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룩한 교회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으니, 나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그대의 모든 죄를 사합니다.
◯ 아멘.
✛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그대에게 강복하시고 항상 지켜주소서.
◯ 아멘.
✛ 주께서 그대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 평안히 가십시오.
◯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기도서 성찬례의 다양성과 신학
주낙현 신부님께
신부님께 예전학을 전공하신다기에, 또한 감리교와 성공회는 역사적인(예전적인) 유산을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많기에 용기를 내어, 주의 만찬례(성찬예배)의 성찬기도 양식에 대한 저의 견해를 몇 자 적고, 관련된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 질문은 미국 성공회 공도문집 (The Book of Common Prayer) 1979년도판 323쪽부터 시작되는 The Holy Eucharist: Rite One (성찬기도/축성경 제1양식?)과 355쪽부터 시작되는 The Holy Eucharist: Rite Two (성찬기도/축성경 제2양식)의 차이에 관한 것입니다.
다 아시는 것이겠지만, 제1양식은 토마스 크랜머 대주교님등이 중세의 전통적인 로마미사경본을 성서적인 원칙에 따라 개정하여 공도문 제1판에 실으셨던 최초의 영어 미사/성찬례에 그 역사적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후 여러 차례 공도문집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 정신과 의식문의 표현들은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이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제1양식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그것이 존 웨슬리를 통해 감리교회에도 전해져서 미연합감리교회가 1988년 성가집과 1992년 예배서를 개정할 때까지, 그리고 한국 감리교회도 최근 들어 새 예배서를 내기 전까지, 적어도 의식문(감리교는 “예문”이라고 부릅니다)에 있어서는 근간이 되어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실제로는 그 예문을 전해준 존 웨슬리 목사님의 의도대로 주의 만찬례가 집례/집전되지는 않았습니다. 한국 감리교회의 경우는 1970년대 이후, 더 축약된 (Sursum corda 와 Sanctus 등이 생략된) 예문만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 사정은 새 예배서가 나온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최근 널리 사용되고 있는 제2양식은 성공회, 미연합감리교회, 로마 카톨릭을 막론하고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 재발견 이후, 20세기의 Liturgical Movement의 성과를 반영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신부님이 번역해서 올리신 성찬기도도 이 제2양식을 더 발전시킨 것 같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제1양식이 성찬/성체에의 참여를 통해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과 그에 따른 여타의 축복과 은택을 받아 누리는 다소 개인적인 경건/신심에 초점이 맞춰진 것에 비해, 제2양식은 하느님의 창조섭리와 우리 인간의 타락과 배반에도 불구하고 구세주를 보내시어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느님의 화해의 은총 및 성령의 내림을 통한 Sanctification(축성.성화)과 친교에 강조점이 두어진, 한마디로 우주적인 구속사의 vision 안에 공동체적인 일치의 신학을 잘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근에는 환경/생태적인 의향도 더 부각되는 듯합니다). 제2양식이 지닌 이러 저러한 장점 때문인지, 제가 참예해 본 미국 성공회 성찬예배는 거의 100%가 이 제2양식으로 집전되었습니다. 이건 여담인데, 저와 교분이 있던 말레이시아 출신 성공회 신부님은 기숙사 방에서 아침에 혼자서 조도를 드리실 때, 공도문집 1양식도 아닌 로마 카톨릭의 제1양식으로 하신다는 말씀을 들었던 바, 저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고교회 경향의 종착점은 역시 로마인가? Like J. H. Newman?]
이건 질문인데, 성공회에서도 로마 천주교처럼 교중미사가 아닌 사제 혼자 드리는 사적인 미사가 가능한가요?
진짜 궁금한 질문은, 미국 성공회 또는 한국 성공회에서 이 성찬기도 제1양식으로 드려지는 미사가 몇 퍼센트 정도 되나요? 물론 개개 본당의 분위기나 사제들의 선택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그리고 신부님은 개인적으로 성찬기도 제1양식에 대해서 어떤 입장이신가요?
[예컨대, 시대에 뒤진 것이므로 폐지하거나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시는지, 성공회의 독자적인 것이므로 역사적 차원에서 보존하는 것이 좋다고 보시는지, 좀더 그 가치를 살려야 한다고 보시는지?]솔직히 저는 제1양식의 개인적(?) 영성이 제2양식의 보편적, 공동체적 영성에서 다소 간과되는 듯한 자기 성찰의 겸비함과 참회의 깊이를 잘 표현해 주고 있기에 좋아할뿐더러, 제2양식과 병행하여 더 널리 사용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속한 감리교회의 컨텍스트에서 말입니다.
혹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깨우쳐 주심 감사드리고요, 또 불쑥 던지는 무례한 질문에 널리 해량하심 기대합니다.
루시안 올림
+ 주님의 평화
루 시안님 반갑습니다. 좀 복잡한 일들이 겹쳐 일어나고 있는 통에 빠른 답변을 마련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탓에 더 늦기 전에 시도하는 아래의 답변이 충실할 지 모르겠습니다. 매우 심도 깊고 매우 정확한 이해에 바탕한 질문을 주신 것에 우선 감사드리고,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현재 루시안님이 예를 들어 설명하고, 질문하는 내용은 기본적으로 “1979년 미국성공회 기도서”(BCP 1979)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보니 한국성공회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혼란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먼저 바로잡으면서 하겠습니다(이것은 편의를 위한 것이지 오류에 대한 정정이 아닙니다.)
즉 The Holy Eucharist: Rite One 은 “감사성찬례 형식 1”로 The Holy Eucharist: Rite Two는 “감사성찬례 형식 2”로 표시하는 것이 최근 한국성공회 기도서 개정과 함께 도입된 구분법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성찬례식에 들어 있는 성찬기도(Eucharistic Prayer)의 다양한 형태를 “양식”이라는 말로 구분합니다.
이에 따르면, 1979년 미국성공회 기도서는 감사성찬례 1형식과 2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1형식에 2개 양식의 성찬기도, 2형식에 4개 양식의 성찬기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2. 감사성찬례 1형식:
정 확히 지적하신 대로, 성찬례 1형식은 1549년 크랜머 대주교의 첫 공동기도서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영국성공회의 대표적인 기도서인 1662년 기도서와는 사뭇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미국성공회가 이 형식을 사용하게 된 것은 여러 배경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미국성공회와 스코틀랜드 성공회와의 관계라는 특이한 역사 속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미국성공회는 최소한 1789년 공식 기도서 이후 1형식이 1928년 기도서까지 공식적인 성찬례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1979년 현행 기도서가 나오면서 이를 매우 약간 교정해서 1형식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1형식의 성찬기도 1양식은 1549년 기도서의 영향 아래, 미국에서 1789년 이후로 계속 사용된 것으로, 그 주제는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구속 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1979년 기도서는 2양식을 만들어 첨부하면서 그 동안 강조되지 않던 “하느님의 창조 사건과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부각시켰습니다.
3. 감사성찬례 2형식:
1979년 기도서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각각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A 양식은 전통적인 성공회 성찬기도의 신학을 이어 받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B 양식은 히뽈리투스(사도전승)의 성찬기도를 현대화한 것으로 “하느님의 창조 사건과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C 양식은 미국성공회 예전학자의 작품으로 지속되는 하느님의 창조 사건에 깃든 하느님의 현현(계시)에 초점을 둡니다. 마지막으로 D 양식은 4세기 성 바실 전례에 기초한 것으로 동방정교회를 비롯해서 로마 가톨릭, 그리고 감리교와 루터교 등과 대화 속에서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공인된 양식입니다.
4. 성찬례 형식의 선택:
성찬례의 각 형식과 양식에 깃든 의미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고, 교회 공동체는 교회력(교회절기)의 주제에 따라 다양하게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습니다. 1형식은 여전히 고어체 영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2형식은 현대 영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블로그에 번역해서 올려두었던 90년 말의 새로운 성찬례는 이런 구분을 따른다면 아예 3형식이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포용적 언어”의 사용과 창조로부터 이어오는 구속사의 전개, 동방 전례의 요소를 도입한 것들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인의 성향과, 교회의 시간(교회력/절기)의 주제, 그리고 신앙 훈련의 계획과 더불어 선택할 수 있는 융통성이 있습니다. 물론 개인의 차이에 따라서 좀더 좋아하고 깊은 영성을 느끼는 성찬기도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성찬기도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1형식이 현대 신학적으로도 큰 문제를 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2형식의 성찬기도들이 늘 적절한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다면야 다른 성찬기도가 나올 이유가 없었겠지요.
미국성공회에서는 여전히 1양식을 사용합니다만, 2양식이 더욱 보편적입니다. 그러나 주일에 성찬례가 여러번 있는 경우 꼭 1양식을 아침 일찍 배정해두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그리고 특정한 절기에 사용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몇 퍼센트라고까지는 정확히 말씀드릴 수가 없겠군요.
5.
한국성공회의 경우는 조금 다르니 별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1965년 기도서의 경우는 위에서 말한 1549년 기도서의 성찬례와 매우 비슷한 성찬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82년 새로운 성찬례가 나오면서, 처음으로 다양한 성찬기도 양식이 마련되었는데, 여기서는 성찬기도 2양식이 바로 1549년 전통의 1965년 기도서의 성찬기도를 현대말로 고친 것이었습니다.
6.
한국성공회의 공식기도서인 2004년 기도서는, 미국성공회와 비슷하게 2 형식의 감사성찬례를 가지고 있는데, 2형식이 짧은 성찬례인 반면에 1형식은 4개 양식을 갖고 있습니다. 1양식은 1549년/1965년 성찬기도를 따르며, 2양식은 2000년 영국기도서에서 따왔고, 3양식은 성 크리소스톰 기도문을 따랐다는 1982년 미사 예문의 3양식을 좀더 손질한 것이며, 4양식은 미국성공회의 경우와 같이 에큐메니칼 감사기도로 인정받고 있는 성 바실 전례를 이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우리 신학의 반성에서 나온 것이 없군요. “우리 기도서에 우리 신학의 전통이 없다.” 저로서는 매우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7.
성공회 사제 혹은 신자들 가운데 로마 가톨릭 미사에 대한 동경심을 갖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제가 알고 느끼기로는 극소수에 불과하고 상당히 편협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저는 어느 교단의 전통의 성찬례이건 서로에게서 배우며 자기 전통을 풍요롭게 하기를 격려하고 실천할 지언정, 교회 공동체가 함께 합의하여 교회의 전례의 근간으로 세운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신심 행위나 기도를 위해서 다른 교단의 기도나 성찬기도를 사용하는 것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8.
성공회는 원칙적으로 성찬례를 공동체를 통한 하느님 예배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사제가 혼자서 드리는 이른바 “개인 미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성찬례는 은총의 나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굳이 사제 자신의 신심 행위로서 개인 미사를 드리겠다는 것을 강제로 막을 방도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성공회에 그런 분들이 얼마나 될 지 모르겠습니다만.
9.
개인의 기도를 위해서는 성공회는 훌륭한 “시간 전례”(Liturgy of Hour 성무일도) 전통을 발전시켰습니다. 크랜머 대주교는 이를 수도원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 신자들이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그 형식 또한 공동체 예배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전례-성무일도의 전통은 이른바 일반 신자들의 공동체 전례인 “캐시드럴 전통”과 소규모 혹은 개인적 기도인 “수도원 전통”의 시간전례로 나뉘어 발전했으니 서로 보완하며 사용할 수가 있겠지요.
10. 뭐 이리저리 세면서 답변이 장황해졌습니다. 아무쪼록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드높이, 주님을 향하여 (Sursum corda. Habemus ad Dominum)
주낙현 신부 합장
오주 변용
교회일치에 관심이 많은 감리교 전도사입니다.
대한 성공회 웹 — 서울교구 대성당 — viamedia: 이런 경로로 연결되어 방분하게 되었습니다.
이 “질문있어요” 페이지를 살펴보니, 운영하시는 신부님의 성실하시고도 열려진 그러나 중심잡힌 태도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선교적 사명이 있기에 능히 감당해 마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제 닉네임은 제 불어식 별명(Lucien)을 성공회식 신명 비슷하게 바꾸어본 것입니다. (실제로 “안디옥의 루시안”이란 초대교회 성서학자도 계시더군요).
앞으로도 종종 찾아뵙고 궁금한 것과 관심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괜챦겠지요?
참 질문한가지! 전에 떼제 묵상기도에 다니면서 (프랑스 본원을 방분한 적도 있음) 예수 변모의 이콘에 많은 애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걸 천주교 식으로 신심이라고 까지 할 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성공회에서는 예수님의 생애의 이 사건을 가리켜 “오주변용”이라고 부르시는 것 같아요. 영어와 대조해 보니 “오주”는 “Our Lord”를 고어투의 한자말로 옮긴 것인가요?두서 없이 몇 말씀 드렸습니다.
+ 주님의 평화
루시안 전도사님, 반갑습니다. 웹이 말그대로 거미줄은 거미줄이어서 이리저리 사람을 이어내게 합니다. 감리교는 성공회와 공유하는 유산이 많아서인지 말트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즐거운 대화를 기대합니다. 다만 조만간에 이 “질문이 있어요”란을 닫을 생각이기 때문에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뭐 파리날리는 곳이니까..이히~)
질문하신 “오주변용”은 말씀하신대로, “우리 주님”의 한자 번역어입니다[吾主]. 그러나 최근에 개정된 성공회 기도서(2004년)에서는 “주의 변모”라고 좀더 알기 쉽게 축일 용어를 바꾸었습니다.
주님의 나라를 향한 순례의 길 속에서 함께 만난 것을 기뻐하며,
주낙현 신부 합장
풍부한 대화의 향유, 게시판, 그리고 블로그
주낙현 신부님 반갑습니다.
혹시나 하고 들어와 봤더니, 금새 제 글을 읽어보시고 반가운 답신을 남겨주셨군요. 이번에 석사과정을 마치시고, GTU에서 예전학으로 박사 프로그램을 시작하신다니, 축하드립니다. 그렇다면 지금 졸업 준비로 한창 바쁘시겠군요.
저는 프린스턴에서 중세 교회사(사상사)로 6년전에 박사과정을 시작했었는데, 여러 사정으로 늦춰지다 보니까, 논문을 다 마치지 못하고 비자 만료로 지난 1월에 한국에 돌아 왔습니다. 서론을 포함하여 Two Chapters를 더 써야 하는데, 아직도 차마 포기는 못하고 붙잡고 있습니다만, Only God knows when or whether I would be finished.
프린스턴에 있을 때 한 3년전 그곳 Seminary의 Episcopal Fellowship에 나가서 주중에 Holy Communion에도 참예하고 그분들과 교유도 나누었더랬습니다. 진정 카톨리코스적인 교회란 바로 그런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외국인으로서 또 비성공회교인으로서 충분히 다가갈 수 없었던 제 자신의 한계 때문에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지만, 담당 사제셨던 Tawnley 신부님을 포함한 그분들의 포용과 환대의 정신에 경의를 포합니다. )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성공회의 고교회적 전통이나 로마 카톨릭, 정교회의 전례와 영성에 대해서 부족하지만 제가 아는 만큼 좋아하고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때때로 사회학적으로 말해서 내 종교적 준거집단은 혹 그 어드메 있지 않는가 우려(?) 비슷한 걸 해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전 제가 태어나고 자라난 감리교회를 떠날 수 없습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사랑하며, 또 존 웨슬리 목사님(사제)을 통해서 물려 받은 우리의 공교회적 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물론 대다수의 우리 감리교 형제자매님들이 이 귀중한 보화의 가치를 잘 모르는게 안타깝기도 하구요. — 이런 말씀 드린다고 실망하실 신부님은 아니시리라 짐작되어서 누구에게도 하기 쉽지 않은 얘기를 익명을 빌어 몇마디 두서 없이 풀어 보았습니다. (이 점이 신부님의 이 홈피.블로그가 종교간의 대화를 표방하는 몇몇 로마 카톨릭 형제들의 홈피나 카페하고는 다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점이 참 편안하게 다가 옵니다.)
그런데 이 “질문 있어요”란을 닫으신다고요?
이 블로그의 다른 곳에서는 코멘트 남기기가 여의치 않던데, 그리고 그 란에서 묻고 대답한 내용들이 참 진지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던데요. 아쉽다는 생각이 드네요.
앞으로 들어와서 이런 객담도 남길 수 없게 되는 건가요?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여하튼 건강하시고요, 한 달음에 갈길 달려 가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 주님의 평화
루시안 전도사님, 즐거운 대화를 독려하시는군요(^^). 무엇보다도 지금 진행 중이신 논문을 어서 마치셔서 한국에서도 폭넓은 신학적인 대화의 장을 마련해 주시길 바랍니다.
여 러교회 전통, 특별히 예전적 교회의 전통 속에서 신앙과 영성의 기운을 감지하시는 마음에 깊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사실 웨슬리 신학과 영성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이런 풍부한 전통과의 깊은 대화 속에서 나온 그분의 삶과 신앙이, 우리네 좁디 좁은 아집의 울타리를 금새 넘어가 버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대화를 더욱 깊고 넓게 하는 것이 후세대의 일이고, 신앙인들의 일이겠지요.
언젠가는 이 “질문”란을 닫으리라 생각하지만, 우선은 지켜보고 있습니다. 닫을라치면 언뜻언뜻 루시안님 같은 분이 오셔서 그러지 못하게 막거든요. 사실 저는 이런 대화로 풀어가는 이야기 속에서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주제들을 다시 생각할 수 있었던 같습니다. 제가 빚을 많이 지고 있는 셈입니다. 다만 그 빚의 무게도 있고, 한편으로 그 효용 가치가 떨어진 것 같아서, 이제는 앉아서 질문을 받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니라, 좀더 적극적으로 이야기와 고민을 나누고, 혹은 건방지게 도전도 해보려는 것이지요.
블로그 코멘트가 잘 안달리나요? 스팸 방지를 위한 코드 입력에서 좀 불편하리라 생각합니다만, 금방 익숙해지실 겁니다. 밤새 루시안님이 코멘트 도배를 하는 바람에, 좀 블로그다운 얼굴이 드러나는군요.
익명들이지만, 주님의 길을 함께 걷는 어느 길 모퉁이에서 쉬고 있을 때 서로 웃어주며 그 길을 독려하는 모르는 얼굴로 만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주낙현 신부 합장
사회 참여, 전통 문화, 교회 건축
전에 조선일보 광고제작국에서 광고디자이너면접을 위해 간 적이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조선일보 앞이 성공회 서울 대성당이더군요.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존중한 개신교회인 성공회 서울 대성당의
건축양식을 보면서 감탄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 개신교에서 복음전파 우선주의로 인해 사회참여에 소홀할때
묵묵히 교회를 6월항쟁의 장소로 개방한 성공회의 사회참여의지가 생각났습니다.
앞으로도 성공회의 그러한 순수하고 진보적인 신앙이 변색되지 않기를 기원드립
니다. 방긋~김재홍 형제 드림.
+ 주님의 평화
성 공회에 대한 좋은 인상에 대한 말씀을 이 곳까지 찾아와 남겨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대로 서울대성당은 나름대로 전통 문화를 서양식 로마네스크 건축에 반영하고자 애를 쓴 기념비적인 건물입니다. 물론 점더 치밀하게 살펴보면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우리 문화와 그리스도교의 대화에 대한 문제를, 비판적이 면에서나 긍정적인 면에서나 새롭게 제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 리 전통 문화를 교회 건축에 결합시킨 모습의 전형은 성공회 강화읍 교회를 들 수 있습니다. 유교 향교의 건축과 불교 가람 배치와 건축적 요소들이 혼합된 형태이면서, 동시에 내부는 전형적인 서양식 그리스도교 예배 공간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닿으시면 강화도에 유람하시면서 한번 방문하시길 권해드립니다.
성공회 대성당이 87년 민주화 항쟁의 역사적인 거처가 되었다는 것 또한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과거의 어떤 역사에만 기대어 으스대지 않고 더욱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기대와 복음화에 대한 열정을 통해서 우리 사회를 좀더 변화시키고, 소외된 이웃 그리고 소수자들에 대한 포용의 삶을 발전시키기를 더욱 바랄 뿐입니다. 성공회 교인들과 성직자들이 이에 대해 늘 기도하며 고민하면서 애쓰기에 그 미래는 밝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따라나선 처지에서 교단적 전통의 다름은 때로 불신과 배척을 가져다 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의 부족한 점들을 되돌아보게 하고,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아름다운 일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마련한다고 생각합니다. 약간 다른 모습으로 같은 길을 함께 하면서 만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만남을 기뻐하며,
주낙현 신부 합장
천주교에서 받은 세례와 견진
안녕하세요 신부님.
사랑하는 아내와 두 딸의 아버지인 저는 우연한 계기에 성공회 신앙에 접했습니다.
전 어렸을때 가톨릭 영세와 견진을 받았습니다.
성공회에서는 어떤 입교 과정이 있습니까
가톨릭의 영세와 견진을 성공회에서는 어떻게 수용합니까?
항상 축복있으시길…….
+ 주님의 평화
성공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떤 우연한 계기가 되든 그건 하느님의 손길이 아니겠습니까?
성공회는 그리스도교 내의 다른 교단에서 받은 세례를 인정합니다. 천주교나 정교회, 그리고 큰 의심이 여지가 없는 개신교의 여러 교단들의 세례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견 진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세례가 그리스도인됨이라는 넓고 더욱 근본적인 신앙 입문의 의미를 갖고 있다면, 견진성사는 그보다는 좀 구체적인 교회 공동체, 즉 그리스도교 전통의 한 공동체에 소속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짙기 때문입니다.
아직 논의 중인 이야기입니다만, 견진이라는 이름 안에는 세 가지 다른 의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첫째는 천주교나 정교회에서 받은 견진을 인정하고 성공회 공동체로 받아들이는 영접 예식이겠고, 둘째는 견진을 받지 않은 분들을 위한 견진 예식입니다. 성공회가 아닌 여느 개신교에서 오신 분들은 견진을 받는 것이겠구요. 마지막으로 신앙 생활에서 멀어졌다가 다시 오는 것일텐데, 신앙 재확인 예식이라고 할까요?
이런 세가지의 의미가 한국성공회 내에서는 섞여 있으니 굳이 구별하지 않아도 그 처지에 맞게 이해하시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견진은 성공회에서 다시 받는 것이지요.
교 회 마다 새로운 신자, 그리고 교단을 이적한 분들을 위한 새신자 교육 과정이 다양하게 있습니다. 어떤 프로그램의 형태가 될 수 있고, 어떤 그룹을 통한 공부일 수도 있고, 작은 교회에서는 신부님과의 친밀한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 가능할 수 있습니다. 교리에 얽매이기보다는 신앙 생활, 즉 하느님을 만나 그분과 함께 걷는 삶에 초점을 둔 대화의 기회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근처 있는 교회를 찾으셔서 신부님과 상의하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성공회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신앙 속에서 아름답고 건강한 가족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연옥 교리?
찬미예수님
안녕하세요 신부님.
저는 가톨릭교회의 신학생입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수업시간에 발표할 연옥에 관한 레포트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준비를 하면서, 그리스도교 다른 교파의 연옥관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는데요.
성공회에서는 연옥을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자료가 없어서
신부님께 도움 말씀을 드립니다.
현재 한국성공회 교리에서는 연옥을 어떻게 바라 보는지에 대한 자료가 필요합니다.
자료가 없다면, 성공회에서 지배적으로 연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라도
필요합니다. 신부님의 도움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신부님께 가득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주님의 평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연옥 “교리”에 대한 성공회의 이해를 한마디로 말하라면, 성공회가 이 교리를 성서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니, 이에 대해서 굳이 설명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되겠군요. 다만 역사적으로 형성된 연옥 교리에 담긴 어떤 사목적인 의미를 고려해서 논의의 여지를 남겨두는 면은 없지 않습니다만, 공식적으로 연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공회 종교개혁과 더불어 나온 성공회 39개 신앙 조항(1563년, 1571년)의 제 22조는 특별히 연옥 문제에 대한 당시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즉 “연옥, 면죄, 성상 및 유물에 대한 예배와 숭배, 그리고 성인을 통한 기도에 관한 로마 교회의 교리는 어리석은 것이며, 헛되게 발명된 것이고, 성서에 전혀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적대하는 것이다.”
물 론 이 성공회 신앙조항은 16세기 서방교회 분열의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서, 그야 말로 적대적인 감정이 뒤섞여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후 에큐메니칼 대화 속에서 그 잘잘못을 가려내면서 오해도 함께 풀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의 조항에서도 나온 말들도 사실 그 적대적인 감정들을 걷어낸 후에,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통해서 새롭게 평가할 수 있는 여지들을 남겨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성공회에서는 성상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고, 성인 유물을 존중하며, 경건심의 발로로 행해지는 이에 대한 순례도 있으며, 별세한 이들을 위한 기도를 성찬례의 신자들의 기도 가운데서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연옥과 관련된 문제는 이런 대화의 여지에서 비켜나 있다고 보고 있으며, 굳이 그와 관련된 사목적인 문제를 설명한다면, 사도신경에 드러난 “성도들의 상통”(communion of saints)을 통해서 그 신비를 헤아려 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제 개인적인 견해일 뿐입니다만, 참조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울러 “연옥” 문제에 대한 물음을 위 “성도들의 상통”과 관련해서 답변한 글들이 아래 게시판에 이미 있습니다. 검색 명령어 “연옥”을 통해서 살펴보시면 이어지는 짧은 답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천주교와 성공회의 대화가 교회의 일치를 위한 기도 속에서 더욱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한 분이신 하느님, 한 분이신 주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주낙현 신부 합장
다른 종교가 그리스도교를 비방할 때
질문 생략…
+ 주님의 평화
미카엘 형제님, 흥미로운 질문을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름대로 절박한 심정으로 쓰신 것이 분명한데, 먼저 흥미롭다고 한 것은, 이런 일에 그리 신경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이야기, 혹은 말씀하신대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비방하려고 날조한, 혹은 하나의 픽션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만 이 일로 신앙이 흔들리는 친구나 지인이 있다면, 이를 염려하고 무엇보다 기도해주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솔직한 대화의 기회를 갖기 바랍니다. 하지만 교리적인 접근보다는 어떤 점에서 신앙 (천주교 신자이든 개신교 신자이든)의 걸림돌을 만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점에서 다른 종교가 그리스도교를 비방하는 점에 수긍하는지, 이런 점들을 경청해 주는 기회를 먼저 갖길 바랍니다.
다른 종교에서 그리스도교를 비방하는 일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길게 따다 놓으신 눈요기거리 내용의 기사와 소설, 루머의 역사는 길고도 깊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허구이거나 악의적인 왜곡이었다는 사실이 금새 밝혀지고, 실제로 그리스도교 신앙에 손상을 입힌 일보다는 그런 비방을 일삼는 무리들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부메랑이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제 풀어 못 이겨 스스로 잦아들 터이니 마음 두지 마세요.
이런 사례를 만나면서 한번 숙고할 일을 굳이 찾아 나선다면 이렇습니다. 그 동안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이런 허무맹랑한 비방에 걸려 넘어질 만큼 허약하고 맹목적인 신앙관 혹은 교리적인 가르침에 너무 기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할 일입니다. 자신의 하느님 체험과는 전혀 관계없는 교리에 대해 맹목적으로 신봉하여, 이를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오해하거나, 예수님께서 몸소 보이신 삶에 대한 부지런한 성찰과 명상보다는, 신앙의 지혜마저 단박에 쉽사리 얻어보려는 생각에 편승하여 만든 무슨 무슨 성경 공부 프로그램이나 ‘뜨거운’ 신앙 집회로 얻는 감정으로 신앙의 도를 깨달은 사람 흉내를 내지는 않았던가 하는 것이지요.
이런 일은 성공회를 비롯해서, 천주교,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를 망라해서 우리 신앙 문화에 편만한 모습들이라고 봅니다. 오히려 이런 점에서 저런 가십거리의 기사는 도대체 우리가 신앙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되새기게 합니다. 그러니 함량미달의 몇몇 신흥종교들의 비방도 그런 점에선 늘 미운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안쓰럽긴 하지요.
오해와 비방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늘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살아가고, 그 삶으로 아름다운 향기를 펼쳐내는 것이겠지요. 진흙탕 싸움에 함께 말려들 일은 없다고 봅니다. 내 삶의 힘으로 신앙을 보여주는데 더 관심을 두었으면 합니다.
주님의 올곧은 길 위에 서기 위하여,
주낙현 신부 합장 행복~
철학적 질문과 종교적 신앙 사이에서
저는 과거에 성공회 서울교구옆을 자주 지나다니던 사람입니다 (영국문화원때문에) 몇번 서울교구 주일 예배(미사??)에 슬그머니 혼자 참석해서 앉아있다가 새신자로 등록하려다가 말기를 몇번했습니다. 그이유는 과거 폼으로 다녔던 개신교회에서 겪 은 (물론 믿음이 없어서 이겠지만)일들을 통해, 동료 기독교인과 목사님들에게서 많은 실망과 분노를 느끼면서 교회를 그만두었기에 지금도 망설임이 많이 남아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종교를 좀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은 저의 마음앞에는 다음과 같은 원초적인 무식한 회의가 어느새 깊이 드리워져있습니다.
제가 겨우 몇권의 책들을 읽으면서 (ex, 야스퍼스,에리히 프롬, 램프레히트등)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예수의 신성에 대해 회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것은 사도바울과 예수제자들과 갈등 문제 그리고 신약성경이 원본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로마교황청의 많은 편집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후 더욱더 그들의 주장에 대해 동조하는 의식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스퍼스와 에리히프롬은 구약에 기초한 기독교인 이라고 들었으며, 특히 야스퍼스는 그의 저술 “철학적 신앙”에서 성서종교를 비판하면서 성서의 어느 한귀절도 주석이 아닌것이 없으며 인간의 한계를 고려했을시 순수한 계시 자체는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수천년에 걸친 인간의 한계 체험의 보고이며, 이 경험들을 통해서 성서 속의 인물들은 신을 확신하게 되고 이 확신에 의하여 자기를 확신하에 된 것이다 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믿음은 주어지는 것이지 (gift) 노력으로 얻는것이 아니라는 말과 정면 대치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를 인간으로 평가 절하 한다 해도,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신에게 도달하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자신의 실존을 통해서만 영원에 도달할 수 있는것이며, 성육신한 신으로서의 그리스도 신앙은 성서종교의 본질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야스퍼스의 주장은 저에게는 충격이면서도 다시 종교를 찾게하는 기회로서 인식되고 있습니다.
기회라고 말씀드린것은 저는 예수의 신성이 이미 서양의 종교학자들에게도 공격을 많이 받았으며 신약의 신성적 진위여부도 사도바울의 자체적 해석이라는 주장에 대해 그렇다면 기독교를 믿을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정신적인 혼란에 있었는데, 이에 대해 기독교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 할 수 있는 그 길이 위에서 말씀드린 야스퍼스식의 논법이라면 갈등이 해소될 수도 있겠으며 신앙의 개인적이 체험이 가능하리라는 희망도 가지게 됩니다.
저의 이런 거친 얕은 이해에 대해 신부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싶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기독교에 대해 다시 접근이 어려울것이라는 회의감이 들고 있습니다.
+ 주님의 평화
깊은 평화의 인사로 때늦은 답변에 대한 사과를 대신합니다.
님 께서 주신 훌륭한 질문은, 믿기지 않을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성직자인 제 안에서도 계속되는 의문들입니다. 아직 진행중인 이런 의문이 부끄럽지 않은 까닭은, 일언지하에 이런 의문들을 깨끗하게 씻어낼 수 있다면 한 순간의 행복일는지 몰라도, 무한하신 하느님을 대하는 태도로서 정직할 것일까 하는 좀더 깊은 의문이 저를 붙잡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생각에 님께서는 매우 중요한 신앙의 출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문이 없는 신앙은 맹목적이기 쉽거니와, 삶의 길 속에서 만나는 또 다른 의문의 복병 앞에서 무릎 꿇기 십상이지요.
님 께서 들어주신 철학자들은 공교롭게도 근대 철학자들치고는 상당히 종교편향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분들입니다. 야스퍼스와 같은 실존철학의 대가와 더불어, 에리히 프롬은 서구의 신맑스주의로 불리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자이기도 한데, 한결같이 철학과 종교의 대화에 대해서 깊이 고민했던 분들이었습니다. 근대철학이 내내 기존 종교-신학이 짓눌러온 숨통에서 조금씩 기세를 얻기 시작하면서 그 “지배의 신학”에 대해서 비판한 것은 당연한 결과요, 또한 종교와 신학 자체의 반성에 중요한 성과를 가져왔습니다.
그 결과, 예를 들어주신 성서의 형성사와 관련된 역사적인 사실 혹은 문학 비평적인 연구 등은 이미 신학계에서 일반화되어 신학생들뿐만 아니라 저 같은 성직자들까지도 괴롭히고 있고, 하느님과 인간의 구원 사이에 놓여 있는 예수님의 성육신 교리는 그 “성육신 교리”를 둘러싼 신화 논쟁이 이미 1960년대 그리스도교계를 발칵 뒤집어 큰 생채기를 남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누가 괴롭힘을 당하며, 누가 상처를 입었다는 말일까요? 아무래도 하느님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거나, 그 모종의 답으로 짐짓 사람을 위협하거나 저주했던 지배적인 사람들, 혹은 그들의 생각이 아니었을까요? 성직자로서 나 자신이 이런 모종의 위협적 인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이런 회의와 의심의 시대에 어떻게 하느님에 대해서 말할까 하는 질문을 다시 해봅니다.
야스퍼스가 옳을까? 에리히 프롬이? 아니면 어거스틴 성인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교부들이 역시 맞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송아지를 낳는 암소을 옆에 두고 순산케 해달라고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께 연신 빌어마지 않는 촌부가 옳은 것일까?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열어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내가 성서를 읽고 내 삶을 반추하며, 예배에 참석하여 그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느끼면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지치지 않는 눈으로 살펴볼 것을 요구합니다.
그 대답들은 지금까지의 논리가 철학이 되었든, 기존 교회의 가르침이었든, 신학이 되었든 간에 그것들에게 새로운 회의를 일으키게 하고, 깨지게 하고,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들로 남아서 나를 괴롭혀서 내가 항복 선언을 하려고 하는 순간, 나도 몰래 내 앞에 성큼 와 있거나, 내 뒷전에서 이미 나를 새로운 모험으로 밀어대고 있기가 일쑤입니다. 저는 이것이 신앙을 통해 주고 받은 질문과 대답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현대에 이르러 철학은 종교철학 혹은 신학과 큰 경계를 가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그리스도교 신앙이 일반적인 철학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비 (혹은 화두라고 해도 좋겠지요)를 가지고서 씨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분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건 그 신조를 날조된 것이라고 말하든, 처녀의 몸에서 낳았다는 이야기가 신화 속에서나 공통적인 것으로 엿보이는 현상이라고 이해하든 아니면 그리스도교 유일의 사건이라고 믿든, 혹은 그 부활의 ‘사건’을 두고 어떤 의미로 해석하든, 그 역사적 사실성을 증명하려고 들든 간에, 문제는 한가지입니다.
예 수 그리스도가 도대체 내게 뭐라고 하는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향해 ‘너는 도대체 누구냐?”라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혹은 내 스스로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떤 길을 제시하는지 눈 여겨 보고, 그 길을 따라가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당당히 대화해보겠다고 감히 도전해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도전을 시작하는 길은 여러 가지이겠습니다만, 저는 단연코 예배 공동체의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다른 처지에서 서로 다른 질문을 갖고 모여든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모여,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내는 그 순간의 체험들을 지속시키는 것이 종교적인 신앙에 대한 질문과 답변의 중요한 출발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러지 않을 테니, 님께서도 질문의 끈을 놓치지 않고 스스로를 열어 놓으며 허물 벗듯 전진하기 바랍니다.
주님의 넉넉한 길에서 만나 걷길 기대하며,
주낙현 신부 합장
성공회 궁금증 –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
안녕하세요, 신부님. 저는 25된 기독 청년입니다.
전 하나님의 사랑과 감사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며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보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체감하고 있어요.
저는 궁금증이 많은 청년입니다. 그래서 알고 싶은게 참 많지요. 그러다가 품고 있던 많은 생각 중에 요즘 다시 구체화된 궁금증을 풀고싶어서 이렇게 염치불구하고 질문 한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아, 저는 기독교장로회의 소속의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수많은 교단이 있음을 알고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구나 했습니다. 성향이 보수니 진보니 이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는 안 하겠습니다.ㅋ
그러다가 천주교는 무엇이 다를까..라고 생각하며 전도용 팜플릿도 보고 자세히 알아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성공회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공회는 다소 다르 다고 알려져 있는데 말인데요.서론이 길었습니다. 죄송.꾸벅. 질문인데요. 천주교와 성공회, 그리고 성공회와 개신교(예를들면 기독교 교회들)간의 핵심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해서요. 음, 교리의 차이랄까 그런 것이 있겠지요? 너무 궁금해서 이렇게 물어봅니다. 답변해 주시면 너무 감사할 것 같아요. 헤헤. 요즘들어 성공회에 관한 관심이 지대해져서 그렇습니다.
모두가 어찌보면 방법의 차이일 뿐 하나님 안에서 신앙하여 천국을 소원하기는 매한가지지만 말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과 감사가 신부님과 함께 있길 진심으로 바라면서 질문 마칩니다. AMen.^^*
+ 주님의 평화
WANI 님의 궁금증에 제대로 답변을 남기지 못하고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었군요. “기독 청년”의 궁금증은 좀 급할 것이 분명한데, 그런 마음 급한 사정을 헤아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
WANI 님의 궁금증은 전체적으로 성공회가 어떻게 다른 개신교들, 그리고 천주교와 다르냐는 매우 넓은 질문에 해당해서, 답변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떤 시각의 문제에 대해서 답변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그 리스도교 신앙의 다양한 전통을 알아보고 체험하면, 자신의 신앙적인 지평을 넓혀지리라 생각합니다. 성공회 역시 그리스도교의 아름다운 전통 가운데 하나로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으로 체험하고 이해하고 실천하려고 애쓰는 교단입니다.
성 공회는 그 태생과 초기 발전 과정에서 얻은 경험때문에,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이면서, 역시 초대교회로부터 발전되어왔던 충실한 가톨릭 전통을 함께 보존하고 축하하려고 애쓰는 교단입니다. 한국에 전래된 그리스도교의 상황은 천주교와 개신교로 극명하게 나뉘고, 다양한 전통의 개신교마저도 역시 “미국식 복음주의 장로교”의 인상으로만 남아 있어서 자칫 다른 풍부한 개신교 전통에 눈감아버릴 염려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공회에 대해서 흔히들 묘사하는 말은, 교리적으로는 분명히 종교개혁 전통을 가지고 있지만, 교회의 삶의 방식(즉 예전과 제도 등)에서는 초대교회 이후로부터 발전된 형식을 존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성공회를 매우 간단하게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간단한 만큼이나 헛점도 많습니다. 실제로 개신교의 교리라는 것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큰 물줄기 안에서보면 서로 겹치거나 부분적인 것일 뿐이고, 그 또한 이전의 신앙 전통에 그 물을 대어 나르기 때문입니다. 소위 “가톨릭 전통”이라는 것도 로마 가톨릭 교회, 특히나 중세의 가톨릭 교회라는 각인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판단력으로 보게 되면, 개신교 자체 내에 있는 이른바 교회 전통의 유산에 대해서 설명할 힘을 잃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 러므로, 우리는 어떤 신앙 전통을 가름하거나 비교할 때, 먼저 공통점을 함께 기뻐하고, 그 공통점을 기반으로 하느님과의 저만의 독특한 체험과 전통을 바탕으로 해서 발전시켜 나간 서로 다른 특징을 살펴보는 생각의 순서를 갖춰야 하리라고 봅니다.
예.. 이제 성공회와 개신교, 천주교의 차이점들이 많이 있지요. 그런 세세한 문제들은 많은 분들이 이 게시판을 이용해서 질문하셨고, 저 또한 제 한계 안에서 답변해보려고 시도했습니다. 찬찬히 아래 게시판의 내용을 살펴보시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 가운데서 다른 질문들이 생겨나면 언제든지 게시판에 질문을 던져 주세요.
“25세 기독 청년”의 젊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신앙적 열정을 그리워하는
주낙현 신부 합장